날씨가 따뜻해지는 요즘이다. 작년 같았으면 여행용으로 전에 사둔 배낭에 전동휠체어 밧데리 충전기와 휴대전화 충전기, 옷 몇가지를 챙겨 집을 나섰을 것이다. 일하러 나가거나, 책을 빌리러 집 근처 도서관에 나가는 것 외에는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다.

햇살의 따스함도, 봄바람에 산들거리는 꽃향기도 전염병으로 인한 공포와 혐오를 이기지는 못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누군가와 그냥 마주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나가기가 더더욱 꺼려진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이 꺼려지는 일이 코로나19로 인해 생긴 변화다. 며칠 전 SNS에 연결되어 있는 지인으로부터 센터를 이용하는 발달장애 아동이 코로나에 걸려 사무실을 방역하였다고 한다.

아동이 이용한 장애인콜택시를 방역하였고 콜택시 기사님 역시 2주간 자가격리를 했다고 한다. 발달장애 아동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사와 아동의 가족이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다행히 활동지원사분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으나 아동을 지원할 수 없었다. 아동의 아버지가 치료를 받기 위한 입원기간과 자가격리 기간동안에 일생생활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것이 지인의 SNS로부터 알게된 내용이다.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만약 코로나에 걸린다면 나는 얼마만큼의 영향이 있을 것인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고는 있으나 나 역시 꽤 많은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져 있다.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사무실 사람들, 활동지원사, 친구들, 친구의 가족, 우리 동네 가끔 인사하고 지내는 할머니, 전동휠체어를 고치러 방문하는 이동기기 수리센터 사람들, 액셀 등을 배우기 위해 이용했던 여성인력개발센터... 많았다.

누군가로부터 병이 옮는다면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책임전가로 인해 괴로울 것이다. 누군가에게 병을 옮길 수 있어 그 사람들이 자가격리와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죄책감으로 괴로울 것이다. 누군가의 주목을 받아온 사람들이라면 특히 더욱 그의 행보는 눈에 띌 것이다.

중증장애인은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누군가와 마주해야 한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입었던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순간, 모든 순간 자신과 자신을 돕는 누군가와 마주해야 한다.

‘이 사람으로부터 병이 옮으면 어쩌지?’, ‘이 사람에게 병을 옮기면 어쩌지?’ 등의 생각부터 해야 하는 요즈음,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된다.

“테드, 어느 날 누군가 내 엉덩이를 닦아 줘야만 한다는 사실이 가장 두렵소.”<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56페이지>

전에 함께 일했던 분이 모리 교수와 같은 근육장애인이었다. 누군가는 항상 옆에 있어야 한다. 누군가 엉덩이를 닦아 줘야 하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더 나빠져 병원에 있어야 하거나 혹은 죽는 거라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내 엉덩이를 닦아 주는 일은 정신승리로 이길 수 있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당연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코로나를 대입해보면 나는 혐오의 대상일 수 있다.

코로나 관련 뉴스를 하루 종일 본다. 그러다 해외소식에 장애인 등을 수용한 요양시설에서의 집단감염 소식을 듣는다. 코로나 등의 전염병에 취약계층이 피해가 많다고 한다. 어떤 뉴스에서는 흑인의 사망률이 높다고 한다.

흑인 역시 취약계층인가 보다. 우리나라 뉴스에서 관련 내용이 없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으나 속사정은 알 수 없다. 대구 청도 대남 병원에서의 집단감염 외에 장애인 거주시설 등에서의 감염 이야기가 많지 않고 대부분 초기에 감염사실을 알아내 치료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뉴스를 보며 그나마 다행이다 생각하는 것은 한평생 처음이다.

대구에서 코로나로 2달 가량을 앓고 얼마 전 완치 판정을 받은 친구는 외로움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고 했다. 어제 자신이 먹은 그릇, 침대, 옷 등을 보는데 눈물이 나더란다. 죽고 싶었다고 한다.

코로나로 치료를 받는 동안 아무도 만날 수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집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었다고 했다. 뭐라 위로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코로나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감이 싫었을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음에 외로웠을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자신이 싫었을 것이다. 그 통증의 크기나 강도는 자신만이 알고 있다. 아무말도 해줄 수 없었다. 당장 짐을 싸서 대구로 내려가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아직은 비겁하다. 옮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안했다. 그래서 아무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코로나는 어쩌면 이동이나 거동이 힘든 노인이나 장애인 같은 소수에게 더 잔인한 것인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혐오하게 만들고 자신의 가치없음을 증명하게 되는 바이러스....

코로나 사태가 얼른 진정이 되어 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다.

만나서 위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며칠 전에 어떠한 이유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시원하지 않았다.

아직 그 자리가 싸하게 아프다. 마치 까인 발가락처럼 움직일 때마다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는 듯 하다. 아마도 친구는 그보다 더 하리라. 위로가 되어 줄 수는 없으나 아픈 시간을 함께 해 줄 수 있었으면 한다.

이태리 속담에 “지중해의 겨울을 함께 난 사람만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지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얼마나 힘들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마음이 늘 기억하고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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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주 칼럼니스트 현재 삼육대 일반대학원 사회복지학과 학생으로 장애 전반, 발달장애 지원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 중이다. 장애인 당사자로 당사자 지원에서, 일상생활에서 장애로 인해 느꼈던 것들을 전반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체장애인으로 보여지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어 일상생활 자체가 글감이 될 수 있어 나는 좋은 칼럼니스트의 조건을 갖고 있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 거의 매일 쓰고 있다. 전동휠체어를 매개로 생각하고 지나다니다 본 것들에 대해, 들은 것, 경험한 것들에 대해 쓴다. 전동휠체어 위에서의 일상, 지체장애인으로의 삶에 대해 꿈틀꿈틀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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