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아툴 가완디는 하버드대학에서 공중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은 보스턴 브리검 여성병원 외과의사이다. 2010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에 선정된 인물이다.

아툴 가완디가 2015년에 출간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서문에서 아름다운 죽음은 없으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가 존엄사 지지자라는 말은 아니다.

일부 엄격한 조건에서 존엄사가 필요할 수 있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지만, 주제는 존엄사가 아니라 노후의 말기 행복한 삶을 이야기한다. 무의미한 기계에 의존한 생명 장치에 대한 주제가 아니라 의사가 책임지지 못할 수술과 처방으로 끝까지 책임을 다한 것처럼 인식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나는 최근 장애인 거주시설의 탈시설화와 장애인구의 노령화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면서 아동보육시설과 양로원도 탈시설이 가능할까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접하게 된 책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이다.

제1장은 독립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다. 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현대인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 상황을 통해 고통은 타인의 문제일 때는 무시되고 자신의 문제일 때는 절실함을 보여준다. 기술자로서 의사는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다 해야 하는가, 그런 노력 속에 놓쳐버리고 낭비해버리는 삶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문을 제기한다.

히포크라테스는 고칠 수 없는 장애인에게 의술로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낭비라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암 말기 환자에게는 모든 노력을 다해 보는 것이 희망고문이고, 수술 중 사망을 감수하게 하여 마지막 평화로운 죽음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겪어야 할 정상적 현상이다.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고 조금 더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하지만 의학의 한계를 넘어 발달한 생명유지에만 의존하는 것도 행복한 삶은 아니다. 마지막 행복해야 할 순간을 시술에 허비할 수도 있다.

의학은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으나, 고통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일상을 병원생활로 낭비하게 하기도 한다. 노령화에 의학이 기여하고 있지만, 노령에서 고통의 시간을 만들어주기도 한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독립적이지 않은 삶의 시간을 만들기도 한다.

제2장 ‘무너짐’에서는 노인은 고장난 것이 아니라 그냥 허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다가 죽음이라는 낭떠러지를 만나게 되는데, 인구 밀도가 피라미드형에서 사각형으로 의학은 만들어 놓았다. 의학은 그 낭떠러지를 조금 완만하게 할 뿐이다.

노인은 신체적, 정신적 제약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삶의 질을 돕기 위한 것이 노인학이다. 노인이나 환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대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노인학의 발전에 사회는 무관심하다.

노인 전문팀의 지지를 받은 사람은 일반 의사의 도움을 받은 그룹에 비해 장애 발생은 4분의 1이 감소하고, 우울증은 절반으로 줄었으며, 왕진의 필요성도 40%나 줄어들었음에도 말이다.

노인의 삶의 질을 유지하는 것은 노화의 수용과 목적의식이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즐기고 일상에 기쁨을 찾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가능한 한 최대의 자립능력을 누리는 것이 노인의 행복이다.

제3장 ‘의존’에서는 삶에 대한 주도권에 대해 논의한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전의 상실들이다. 돌봄의 어려움으로 쉽게 요양원을 선택할 수 있으나, 요양원의 규칙은 주도권을 빼앗아 버린다. 터전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다. 화산 폭발에도 집을 지키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 요양원은 지킬 집이 아니다.

제4장 ‘도움’에서는 요양원의 목적인 돌봄과 안전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대안으로 어시스트 리빙과 호스피스 센터를 이야기한다. 자신의 집에 거주하면서 필요한 도움을 받거나 집과 같은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메슬로의 인간의 욕구 모델에서 생리적 욕구 위에 사회적 관계 욕구가 있으며, 그 위에 자아실현과 초월의 욕구가 있다고 한다.

카스텐슨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노인은 성취감보다 인간관계와 일상의 기쁨을 통해 오히려 더 긍정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아 있는가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더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카스텐슨 교수의 ‘사회 정서적 선택이론’이라고 소개한다.

시설은 노인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사실은 자녀들들 위한 시설이다. 노인의 시설이라면 사생활 보호와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 기계적, 통제적, 집단적 서비스가 아니어야 한다. 의사의 결정권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하지만 노인 자신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의학의 모순이다. 어시스트는 활동을 돕는 것만이 아니라 당사자의 선택권이 보장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제5장 ‘더 나은 삶’에서는 빌 토머스 제이스 메모리얼 노인시설에서 한 생명 불어넣기 실험을 소개한다. 반려동물과 식물을 기르고 어린 아이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요양원에 존재하는 역병, 즉 외로움, 무력감, 무료함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보스턴 근교의 뉴 브리지 온 더 찰스는 소규모 은퇴마을로 가정적인 분위기로 운영되는 곳이다. 샌본 플레이스는 70여 명이 거주하는 노인 아파트인데 자립생활이 가능한 사람이 불과 13명이지만 필요한 욕구를 서비스를 개발하여 유지한다고 소개한다.

장애가 심해진 노인을 요양원으로 보내야 한다는 한 주민의 말에 직원은 같이 가 보자고 하면서 ‘다음엔 할머니가 갈 곳이니까요.’라고 하여 무마했다는 말은 인상적이다.

자율성이란 행동의 자율성과 주인으로서의 자율성이 있다. 누구에게는 혼자의 공간이 자율이고, 누구에게는 ‘엉망으로 돌아가는 세상 꼴을 구경하기 위해 TV 뉴스보기’가 자율이다.

제6장 ‘내려놓기’에서는 건강보험 통계를 언급한다. 건강보험의 지출 20%를 죽기 1년 전 불치병 치료에 의료비로 환자 5% 인구가 사용한다. 이는 한국의 장애인의 보험 사용과 유사하다. 의학 발전의 실험이나 의학 우상모델에 의한 비효율적 소비보다 그 비용을 삶을 보다 행복하게 보내는 데 사용하는 것도 제안한다.

인간에게는 충성심의 철학이 있는데, 이것이 사회적 관계를 행복으로 느끼게 한다고 하버드 대학 조지아 로이스는 주장한다. 빌 토머스는 이를 에덴 올티너티브라고 하였다.

2008년 ‘암에 대처하기’ 프로젝트는 말기 암 환자가 인공호흡기, 심장압박 치료, 심폐소생술 등을 통해 중환자실에 들어가 집중 치료를 받은 환자와 그런 개입을 받지 않은 환자의 생의 마지막 일주일 삶의 질에 대한 비교 연구에서 의료적 처치가 삶을 더 나쁘게 했다고 기술한다.

1415년에 라틴어로 출간된 ‘죽는 기술(아르스 모리엔디)’는 죽음 이전에 회개하고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나 현대에서는 의학적 기술로 투쟁하면서 생을 마감하게 한다.

가망이 없다고 하면 의사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호스피스는 항암 화학 물질에 취하지 않고 고통을 줄이면서 일상을 통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돕는다.

폭스 보험사는 입증되지 않은 암 말기 치료에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하였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그리고 소송에서 패한 후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에트나 보험사는 호스피스 비용을 인정하면서 선택하도록 했다.

이러한 동반 케어 프로그램은 이용률 26%에서 70%가 되도록 증가시켰다. 이러한 선택을 한 경우 남은 가족들도 우울증을 겪을 확률이 줄었다. 그리고 환자들도 오히려 더 오래 살았다. 항암 화학물질이 오히려 효과가 없으면서 부작용으로 고통에 시달리게도 한다. 그리고 실패의 경험이 오래도록 우울하게 만든다.

제7장 ‘어려운 대화’에서는 두렵지만 나누어야 하는 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명윤리학자 에제케엘 엠마누엘 교수에 의하면 의사의 태도는 가부장적 태도와 정보 전달자로서의 태도가 있으며, 환자가 원하는 것을 해석하는 태도가 있다고 하였다.

의사의 기술에 희망을 가지면 의사에게 분노를 느끼는 시기도 온다. 환자가 원하는 나머지 시간의 사용에 대해 의사는 해석하고 의학적으로 돕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치료법의 나열을 하여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궁금해 하는 앞으로의 상황을 설명하고,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수술은 성공 확률로 말한다. 남은 생명도 평균을 말하지만 실제 생명의 분포는 대개 작지만 긴 꼬리처럼 우측에 길게 빈도수가 남아 있기 마련이고, 환자들은 그것이 자신이기를 도박한다. 그러나 그 꼬리는 치료를 하지 않아도 있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종착지에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기보다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

제8장 ‘용기’에서는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은 시간의 초시계가 작동되면 반응은 두려움과 지푸라기라도 잡는 희망이다. 마지막 행동에 대한 선택이 요구된다.

데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논문에서는 고통은 기간이나 강도들의 평균이 아니라 정점과 종점의 평균이라는 규칙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모든 통증의 평균이 아닌 정점과 마지막 통증의 평균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부작용으로 고통을 요구하는 치료에만 매달릴 수 없다는 말이다. 완화치료를 통해 일상을 최대한 연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락사는 고통을 연장하는 실수와 생명을 단축하는 실수의 문제이다. 암 선고를 받게 되면 현 상태와 하고 싶은 목적,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당사자와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사의 업무가 생명보장이 아닌 행복보장이어야 한다.

장애인의 삶도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의학적 모델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주체적 존재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의학은 건강을 위해 필요하고 사서 고생하지 않고 의료 기술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한 기술일 때 가치가 있다.

이 책을 통해 장애인이 점점 노화가 되어 가고 고령화로 인해 장애 노인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지금, 노인을 위한 거주시설은 그래도 요양원처럼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노인 시설 역시 서구 국가의 예에서처럼 탈시설을 통한 서비스가 제공되는 지역사회 자립이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한 삶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 장애노인의 서비스와 프로그램 개발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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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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