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포스터. ⓒ네이버영화

지난해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가 91세로 별세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원작자이다.

영화가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받는 이야기가 된 건 '이누도 잇신'이라는 거장 감독의 해석과 연출도 있었겠지만 원작자의 '사랑을 바라보는 깊은 이해'도 한 부분일 것이다.

1984년 작가의 나이 56세에 쓴 단편소설이 2003년에 영화로 만들어지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는 사랑을 하고, 사랑 때문에 괴롭고 조바심치고 행복해한다.

조제는 바래고 낡아서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놓은 인형같다.

유일한 보호자인 할머니는 조제를 "몸이 불편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쓸모없는 것, 감추어야 할 존재"로 여긴다.

조제는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이다. 뇌성마비라고 말한 의사도 있지만 한 번도 정확한 진단을 받은 적은 없다.

어려서는 시설에서 살았고, 지금은 노쇠한 할머니와 살고 있다. 새벽마다 조제의 성화에 못이겨 유모차에 태워 마을을 산책시킨다.

'꽃과 고양이'를 보고 싶은 조제의 바람을 들어 주기 위한 것이라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손녀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아 새벽에 다닌다.

츠네오는 대학에 다니며 밤에는 마작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퇴근하던 어느 새벽, 손님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의 주인공인 수상한 할머니와 유모차를 보게 됐다.

손님들은 유모차 속에 마약이나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유모차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안에 폭 파묻힐 정도로 갸날픈 여자였다. 여자에겐 쿠미코라는 이름이 있지만 조제라고 불리길 원한다.

조제는 프랑수와즈 사강의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다. 사강, 1970년대 감성적인 글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소설가이다.

그녀의 이름 역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프린세스 드 사강'에서 따온 필명이다.

할머니가 이웃에서 버린 쓰레기더미 속에서 주워 온 책들을 읽는 것이 조제의 유일한 낙이다. 책은 교과서부터 몇 장 풀지 않은 참고서, 기술서, 과학책, 소설, 야한 잡지까지. 덕분에 한 번도 정규 교육을 받아 본 적은 없지만 상식은 매우 풍부하다.

조제의 우주를 담은 작은 다락방에서 마주 잡은 두 손은, 따뜻하고 조금 특별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포스터. ⓒ네이버영화

츠네오는 조제가 평범하지 않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사랑하게 된걸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알수 없는 이끌림으로.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자꾸 그 사람에게 신경이 쓰이면서 이미 사랑은 시작되고 있다.

조제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며, 동물원에 갇혀서도 맹수의 사나움을 간직한 호랑이를 보는 일, 깊은 바다속에서 자유롭게 오가는 물고기들을 만나는 일은 츠네오가 보여준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처럼 사랑도 변했다.

눈물 나도록 설레던 사랑도 하품을 참을 수 없이 졸립게도 된다.

사랑이 삐걱이는 신호들 - 자주 어긋나는 시선, 이유 없는 갑갑함, 물음을 놓치는 대답, 못 지킨 약속에 대한 성의없는 변명들...

우리는 가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 할 때가 있다. 다가올 날에 대한 상상으로 현실을 더 무겁게 느끼며 불안해한다.

조제는 어린시절을 깜깜하고 아무런 소리도, 어떤 움직임도 느낄 수 없는 바닷속 깊은 곳의 적막함으로 기억한다. 그 적막함 속에 조제는 다시 혼자 남겨졌다.

영화는 상영 당시에도 열혈팬이 생길 정도로 일부 사람들에겐 깊은 관심을 받았고, 재개봉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 영화 하면 먼저 거론될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슬픈 사랑 영화로, 사랑의 본질을 표현했다고 평해졌다.

감출 수 없는 건 츠네오의 사랑에 시작엔 세상에 홀로 남겨진 하반신 마비의 여자, 조제가 있었고, 그녀와의 결혼이라는 미래엔 자신이 없어 도망친 남자가 있다.

조제는 말했다.

"더 이상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나는 다시 깊은 바닷속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조개껍데기처럼 홀로 남겨지겠지.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애. 원래 그랬으니까."

오랜도록 슬프고 외로웠던 시간을 견디며 얻어진 굳은살 같은 걸까? 삶에서 자주 혼자 남겨지며 생긴 옹이 박힌 흉터는 힘이 되어주기도 하나보다.

어쩌면 우리 인생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던 일이 있었던 게 더 나은 일인지 모른다.

자주 상처가 쓰라려 눈이 맵겠지만, 그 상처에도 언젠간 딱지가 생기고, 그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은 남을테니까.

정열 많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고 싶었던 조제는, 이제 헝클어지고 낡은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다. 휠체어 타고 혼자 시장도 보고, 자신만을 위한 밥상도 정성껏 차린다.

영화는 다시 보아도 가슴이 아릿하게 아름답다.

예쁘게 반짝이는 사랑은 잊혀졌던 감정, 설레임을 느끼게 해주었고, 사랑이 지나간 자리도 담담하게 우리를 위로한다.

'견디는 사랑'을 잘 표현했기 때문인 것 같다.

떠난 사랑때문에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고, 돌아봐 달라 매달리지 않고, 소리내어 울지 않고 내 몫으로 남겨진 슬픔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조제의 견디는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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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칼럼니스트 별빛영화관에서는 좀 다르게 사는 사람들,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 우리가 몰랐던 영화 일때도 있고, 이름을 떨쳤지만 비장애인의 눈으로 읽혔던 영화들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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