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라디오를 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우리 집 라디오는 CD플레이어가 있는 구식이지만 아직 쓸 만합니다.

요즘은 USB로 음악을 저장하고 듣고 한다면서요?

옛날 사람 티내느라 ‘동시YO’ 출판하시는 꿈휴 작곡가 선생님에게 CD제작을 아주 잘난 체하며 건의했다가 “요즘 누가 CD로 음악 듣습니까?” 한마디에 새삼 세상 돌아가는 속도를 깨우쳤습니다.

아직도 나에겐 CD플레이어는 신기하기만 한 신문물인데 말이죠...

각설하고, 우리 집에서 라디오 애청의 시작은 단순히 규재의 언어연습을 위해서였습니다. 자폐인들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유난히 시각적 전달을 통한 학습이 빠른 규재는 같은 단어나 문장을 사물이 보이는 상황에서는 수용이 되었는데, 시각적 정보나 단서 없이는 알고 있는 단어나 문장도 금방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일부러 앉혀놓고 듣기 연습을 훈련하는 것도 규재나 엄마나 참 괴로운 일이 될 것은 뻔하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라디오 듣기’였습니다. 자폐인들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닌 추상적인 단어나 상황을 연상하는 능력이 많이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시각적 정보에 의지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라디오를 늘 틀어놓고 일상생활을 했습니다. 밥 먹을 때도, 그림 그릴 때도, 컴퓨터 게임 허용 시간에도 그냥 무작정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규재가 좋아하는 물건의 단어나 노래가 나오면 그 단어로 끝말잇기를 하거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아는 단어들이 들릴 때마다 무엇인가 놀이로 연결시켜 잠시 함께 놀다가 다시 하던 일을 각자 하는...

그러다 보니 언어 확장이 되기는 되는 듯 억양도 자연스러워지고, 아는 단어도 많아지고, 시각적으로 의지하던 정보들을 귀로만 듣고 인지하는 학습효과도 있었습니다. 단, 광고 문구나 노래가 입에 붙어 시도 때도 없이 무한 반복되는 부작용도 생기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10년 넘게 일상생활 속에서 무작정 ‘라디오 듣기’는 만족할만한 효과가 있었다며 나름 뿌듯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자꾸 다른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다른 생각은......,

규재의 동물 사랑은 스무 살이 된 지금도 여전합니다. 전국 각지에 있는 동물원을 검색해서 백만돌이 파워, 무한반복 떠버리 신공으로 엄마를 들들들들들들...조르고 볶아서, 결국 따라나서길 몇 번...

이젠 대전의 ‘땡월드’만 다녀오면 전국 동물원은 거의 다 가 본 듯합니다.

그런데 동물원에 갈 때마다 신기한 일을 겪게 됩니다.

지방에 있는 동물원은 당연히 초행길이니 낯설고, 동물들의 위치도 안내 표지판를 보고 찾아야 하는데 규재는 동물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원숭이한테 가야지~” “조류관에 가야지~” 이러고 방향을 잡아 혼자 내달립니다.

몇 번은 무심코 그냥 따라 다녔는데, 가만 보니 희한하게도 규재가 잡은 방향이 그 동물이 있는 위치가 정확하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언젠가 전주동물원에 갔을 때는 동물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먼저 규재에게 선수 쳐서 제안했습니다.

‘규재야, 부엉이 보러 가자!’

규재는 잠깐 걸음을 멈추는 듯하더니 “부엉이느은~ 야행동물이니까아~~ 지그므~은~~ 낮이니까아~~ 잠자요오~ 소리가 안 들려요오~” 그러더니 “앗! 원숭이 소리!” 외치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원숭이 소리라고?’ 동물원 입구에서 무슨! 원숭이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규재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며 확인했습니다. 분명히 들린다고 대답했습니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도사, ‘천리이’?

내가 자폐인의 생체 신경학적인 학식은 무지하지만, 가끔 자폐인들의 특별한 능력 아닌 능력을 목격하는바 먼 거리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청력도 가능하겠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먼 거리의 원숭이 소리는 들으면서 그보다 더 가까이서 울리는 자동차 빵빵 소리는 못 듣더라는 거지요.

게다가 생각해 보니 외출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피자 레스토랑 간판은 저 멀리 있어도 한눈에 알아보는데, 내가 제시하는 가게는 찾지 못하는 일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참 편리한 감각이지요. 본인이 관심 있는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으니까요.

앞서 얘기한 ‘라디오 듣기’ 효과에 대한, 그 다른 생각은......, 시각적 정보에 의지해서 단어를 못 알아들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단어나 상황을 파악할 ‘필요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무작정 단어 뜻만을 주입하려 라디오를 주구장창 들을 것이 아니라, 좋아하고 관심 있는 ‘욕구’를 자극하면, ‘동기’가 생겨 자발적으로 필요에 의해 움직이게 하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라디오 무작정 듣기 10년은 말짱 헛농사라고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서 남편에게 지나가는 말로 하소연했습니다.

‘우리 규재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나 봐’

그때, 거실에서 “네에~ 이규재는 듣!듣!보!보! 입니다아~”

어디서 주워들은 요즘 유행하는 줄임말 공식을 제멋대로 적용해서 마구 남발하는 규재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구야! 이 방에서 조용히 나눈 얘기가 들렸나? 아니 듣고 싶었나?’

좌우지간 이규재는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맞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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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칼럼니스트 발달장애화가 이규재의 어머니이고, 교육학자로 국제교육학회에서 활동 중이다. 본능적인 감각의 자유로움으로부터 표현되는 발달장애예술인의 미술이나 음악이 우리 모두를 위한 사회적 가치로 빛나고 있음을 여러 매체에 글로 소개하여,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며 장애인의 예술세계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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