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0년 전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하며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뒤 복지관, 건보공단 취업준비를 했다. 하지만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서류시험 및 필기시험 불합격 등으로 복지관, 건보공단 취업이 잘 안 됐다. 그러다 큰누나 소개로 알게 된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2~3개월 동안의 수습기간을 거쳐 2011년 10월에 입사해 4년 2개월 동안 연구소를 다녔다. 연구소에서 정책연구팀 간사로 4년 2개월 동안 일했다. 일하면서 좋았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지만 필자에게는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구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필자는 직업이 발달장애인인 나에게 주는 의미를 나누고 싶다.

먼저 직업이란 필자에게 존재감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장이었다. 연구소에서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 제작활동을 하며, 뜻에 맞는 쉬운 조문을 만드는 것이 가치 있기도 했지만 어렵기도 했다.

발달장애인, 지원자와 같이 하는 작업이라 생소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함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같이 작업하는 발달장애인이 경험이 쌓여가며 어려운 권리협약 조문을 알기 쉽게 바꾸는 모습을 보니 내 안에 있던 발달장애인에 대한 남은 편견을 깨뜨리는 경험들을 여러 번 가지게 되어 더욱 가치가 있었다.

무엇보다 4년 전 미국 워싱턴 DC에서 Inclusion International(유엔 산하의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을 위한 단체)와 The Arc(미국의 발달장애인 권리옹호를 위한 지역사회 기반 단체) 공동주최로 컨퍼런스가 열렸을 때 한국 발달장애인의 알기 쉬운 권리협약 제작활동을 알리러 미국으로 갔던 때가 생각난다. 그 때 당시 그 활동을 영어로 알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한 후 잘 했다는 칭찬이 이어졌다.

발달장애인과 같이 하는 일로 인해 칭찬을 받았던 것도 좋았지만 한국의 발달장애인을 전 세계에 알린 것 자체야말로 나로서는 자부심을 가지기 충분했다. 나의 존재감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2012년 10월 Inclusion International과 The Arc 주최로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발달장애 컨퍼런스 때 컨퍼런스 참석자들과 단체 사진(좌측), 발달장애인들과 2년 반 동안 제작에 참여한 끝에 완성된 누구나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 ‘나 여기 있어’ 책 표지(우측) ⓒInclusion Japan,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워싱턴을 갔다 온 이후 그 해 11월에는 권리협약 NGO보고서 작성교육이 있었다. 권리협약 조문에 대한 탄생배경도 알려준다고 하기에 이 교육을 받으면 알기 쉬운 권리협약을 제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소장님과 상의한 다음 교육을 들었다.

그 교육은 정말 도움이 되었다. 이후 2013년 3월 말에 보고서 작성교육을 한 유엔인권정책센터에서 권리협약 NGO보고서연대여부를 묻는 공문을 우리 연구소를 포함한 여러 장애계 단체에 이메일로 보냈다.

필자는 대학원 때 좋은 논문을 만들려고 했다 졸업할 때 별로 좋지 않은 내용의 논문이 나왔다는 실패감이 있었다. 그래서 권리협약 NGO보고서연대에 연대해 보고서 작성을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패의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소장님이 한 번 해보라고 얘기했고 유엔인권정책센터의 신혜수 상임대표도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없다며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넸다. 결국에는 NGO보고서연대에 연대해 보고서 작성을 4월부터 여러 장애계 단체들과 같이 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25조 건강분야를 맡았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장애인 권리현실을 알린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자료를 찾으며 발표하고 좋았다. 하지만 12월 권리협약 보고서 중간평가에서 28조의 내용을 25조에 썼다고 IDA(국제장애연맹)의 인권담당관인 Victoria Lee의 조언을 받았다. 또 다시 잘못된 보고서를 쓰며 망신을 당하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마음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는 싫었다. 다시 한 번 조문의 뜻을 보며 보고서 내용을 새로 작성했고 소장님과 팀장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틀린 내용은 없는지 점검하는 작업을 거쳐 갔다. 힘들었지만 이 일이 장애인 권리향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힘든 것도 조금씩 없어져갔다.

NGO보고서연대의 워킹그룹에 같이 있었던 동료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도 필자를 격려했고 휴일마다 보고서에 신경을 쓰며 보고서에서 틀린 부분을 점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힘든 줄을 몰랐다.

2년 전 9월에는 제네바로 갔었고, 장애인권리위원회의 국가보고서 심의가 있기 전 사이드이벤트(시민단체, 비영리단체들이 장애인 권리현실에 대해 1시간 동안 고발하는 자리)때는 필자가 한국 장애인의 고용과 소득보장 현실을 알리기도 했다. 이외에도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인가족지원제도 부실, 발달장애인 정보접근성이 열악한 것 등의 여러 현실을 알렸다.

장애인권리위원회의 최종 권고가 나왔을 때는 장애인가족지원제도를 강화하고 방송에 알기 쉬운 내용을 넣으라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발달장애인 인권침해에 대한 내용은 없어 아쉬웠지만, 이것을 빼놓으면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연구소를 대표해 NGO보고서연대에서 활동했을 때, 발달장애인과 함께 알기 쉬운 권리협약 제작활동을 했을 때를 생각하면 필자로선 이 활동들이 나라는 존재의 존재감을 찾을 수 있어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 더 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장애인권리협약은 나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던 하나의 무기였던 셈이다. 이 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다시 돌아가고 싶다.

2014년 9월 중순, 제네바에서 열린 장애인권리협약 국가보고서 심의 당시 첫날 오프닝 회의 장면(좌측),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 전 사이드이벤트 때 필자가 장애인의 고용과 소득보장에 대한 현실을 발표하는 모습 ⓒ유엔인권정책센터,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2014년 9월 중순, 권리협약 국가보고서 심의가 끝난 직후 NGO대표단 단체사진(좌측), 제네바 한국대표부 오찬 장면(우측) ⓒ유엔인권정책센터,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하지만 존재감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장만이었던 것은 아니다. 직업은 나로선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장이기도 했다.

때로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실패와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직장 내에서 해야 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당당해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 하기 싫은 일 중 해야 할 것들을 해야 될 때가 상당히 많았다. 소장님이 필요한 자료를 조사하는 것부터 프로포절 쓰는 것, 연구소 소식지 만드는 것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공모사업 발표사실을 알려주어 직원들이 프로포절 잘 작성하도록 지원하는 게 필자 임무이기도 했는데, 알려주지 않은 관계로 임무를 다 하지 않아 필자가 잘 못하는 프로포절을 작성하는 식으로 책임져야 할 순간도 있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해 혼날 때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순간들은 내가 당당해질 수 있는 과정이었음을 말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것들 중에서 하고 싶은 것으로 바뀐 것들이 몇몇 있었다. 소식지 제작이 그랬다.

각 사업별로 소식지 취합해서 얻는 것, 소식지 수정, 소식지를 적합한 시일 내에 보내는 것, 2015년 연구소 소식지 개편 등 소식지와 관련해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연구소 소식지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조금씩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소식지 작성 일을 맡으라고 하면 ‘내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단체마다 고민하는 것이 다들 있을 것이다.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중점적으로 다루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소식지를 작성하라고 하면 예전에는 머뭇거렸지만 이제는 주저 없이 맡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만 누군가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필자에게 주는 직업의 의미란 서로가 소중함을 몸소 배우는 장이었다는 것이다. 서로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 어떤 직원에게 닥칠 때 그 직원을 지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필자가 어떤 직원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지 않거나 알게 모르게 무시한다면, 관계에서 힘들어짐은 물론 지원해달라고 할 때도 지원받는 것이 상당히 쉽지 않음을 경험했었다. 말을 반복하고 직원들에게 재촉하는 식으로 상대방을 대할 때도, 직원들은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말을 필자에게 자주 했다. 쉽지 않았지만 필자도 조금씩 노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장님이나 다른 직원들, 타인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말이나 실제 행위로도 감사하는 표현을 해야 함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배워야 했었다. 이 모두가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우리 모두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반드시 기억하라는 것임을.

요즘에는 필자랑 같이 일했던 직장동료들을 만날 때면 반가워 수다를 떨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해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알기 쉬운 장차법 ‘우리 모두 소중해’ 책 표지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한국장애인재단, 법무법인 지평

이와 같이 발달장애인에게 직업이란 자신의 존재감을 찾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서로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계기를 만드는 장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곳 이상의 의미이다.

발달장애인도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일하고 싶고 직장 내에서의 존재감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찾고 인정받고 싶다. 발달장애의 특성에 맞는 근로지원도 제대로 받고 싶다.

그러기에 발달장애인 포함한 장애인의 일반고용시장 전이실태와 발달장애인 근로지원 실태 등에 대한 전국적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발달장애 등 모든 장애에 대한 섬세한 내용의 교육이 근로지원인에게 이루어지고 이것이 법으로 의무화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발달장애인 등의 장애인도 근로지원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함도 말하고 싶다.

발달장애인 등의 장애인 고용지원 예산에 관해서는 쌓인 고용부담금보다는 고용보험기금과 국가의 일반회계를 통해 지원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전체 장애인 고용률은 34.8%인 것에 반해 지적장애인은 22.6%, 자폐성장애인은 14.5% 등 발달장애인 고용률이 상당히 낮은 싸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발달장애인 당사자, 지원인, 전문가, 정부 등이 합심하길 필자는 진심으로 바란다.

이를 통해 발달장애인이 직업을 가져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찾고 사회에서 책임을 다했으면 한다. 발달장애인은 남의 도움만 받는 불쌍한 존재로 전락되는 것은 정말로 싫다. 이제는 직업을 통해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의 역할을 담당해 생활이 어려운 사람도 지원하는 멋진 모습이 많아졌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다음의 말에 담긴 바람이 현실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우리도 당당히 세금을 내는 발달장애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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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팝송 감상, 월드컵 등을 즐기고 건강정보에 관심이 많은 반백년 청년이자, 자폐성장애인 자조모임 estas 회원이다. 전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정책연구팀 간사였으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을 위해 민간대표단의 일원으로 2번 심의를 참관한 경험이 있다. 칼럼에서는 자폐인으로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장애인권리협약, 장차법과 관련해 지적장애인, 자폐성장애인과 그 가족이 처한 현실, 장애인의 건강권과 교육권, 접근권 등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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