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고등학교 때 간혹 언론에서 장애인의 성공 사례가 방송되곤 하였다. 당시에는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고 명문대학에 입학했거나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들이 장애인 성공 사례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한 이야기를 보고 여러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으며 많은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필자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장면 중에 하나는 어느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 어렵게 유명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장애아들을 대학 4년 내내 업고 다닌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봉사정신에 대해서 함께 보도되었다.

이렇게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장애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필자 역시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직접 찾기가 어려워 언제나 어머니랑 같이 가서 찾곤 하였다. 대학 때는 전자파일 교재가 없어 어머니가 일일이 다 음성으로 녹음한 적도 많았다. 그래서 필자 역시 어머니와 함께 대학 4년을 같이 공부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2003년에 필자가 혼자 미국 유학을 선택했을 때 낮선 장소에 대한 불안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염려가 많았다. 하지만 필자보다는 어머니의 염려나 걱정이 훨씬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는 우선 혼자서 미국 대학에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을지 몰라 주위 가족들이 많은 걱정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크더라도 영어로 된 자료를 읽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1-2학기가 지나면서 사라졌다. 우선 미국 대학은 장애 대학생을 위한 고등교육지원이 잘되어 있어서 모든 교육관련 자료, 학습지원 등을 학교에서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사실 영어라는 언어적 장벽 말고는 책이 없거나 지원이 부족해서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미국에서는 장애 학생의 부모가 장애 학생을 교육시키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학교가 책임지고 학생을 위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한다.

즉 장애인의 가족이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거나 시간을 투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이 직장에 출퇴근하고 일하는 경우 가족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직장 혹은 고용관련 기관에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렇듯 미국에서는 장애인의 문제를 장애인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사회 전반적인 문제로 인식하여 사회에서 장애인이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서비스를 정부 차원에서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장애에 대한 사회적 패러다임은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보편화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도 가족의 도움에서 벗어나 이제는 활동보조인, 근로지원인의 조력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 부양의무제이다.

부양의무제란 수급자의 배우자, 직계존비속 등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부양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가족이 책임지고 노동능력이 없는 가족을 맡아야 하는 제도이다.

언뜻 보면 별 문제가 없는 제도로 보이지만 사회 공동의 책임을 수급자 가족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맹점을 내포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부양의무제라는 개념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사회가 개인주의에 기초하고 있고 성인이 되면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문화여서 부양의무제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관점은 장애인은 가족이 돕는 것이 아니며 장애의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전체 사회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장애인이 주정부 재활기관을 방문하여 재활 서비스를 요구할 때 그 장애인 가족의 수입이나 재산 정도를 파악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장애인 중에 가족이 부유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장애인의 문제를 가족에게 전가하지는 않는다.

사실 재활 서비스 중 고가의 비용이 투여되는 것들이 있기는 하다. 차량개조나 주택개조 등은 많은 비용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서비스가 필요한 장애인이 경제적으로 수입이 없거나 재산이 없는 경우라면 전액 무료로 제공된다.

하지만 장애인의 수입 정도에 따라 자부담은 발생되기도 한다. 부양의무제가 없기 때문에 가족의 수입으로 장애인의 자부담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장애인 자신의 수입이 있는 경우라면 자부담을 요구하기도 한다.

필자의 경우 대학원 시절 100여만원의 매달 수입이 있어서 자격증 시험 응시 비용의 1/3정도를 자부담한 적이 있다. 수입이 없었다면 전액 무료였겠으나 수입이 있어 자부담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에서 장애인에게 자부담을 요구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다.

첫째는 재활 과정 중 장애인 당사자를 적극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장애인의 재활을 위해서 장애인은 단순히 서비스를 받는 수혜자의 역할이 아니라 재활의 주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일부 자부담을 지불함으로써 본인의 재활 주체는 본인임을 상기시키고 적극적으로 재활 과정에 참여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둘째는 제공받은 서비스에 대해 공적인 서비스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자부담을 통해 서비스의 재원이 공공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알고 낭비없이 사용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필자 역시 일부 자격증 비용을 자부담함으로써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여 자격증을 획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낭비하는 시간을 줄여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미국의 사례를 보면 장애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함에 있어 장애인 가족과 장애인을 분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장애인이 수입이 발생하는 경우라면 자부담을 통해 재활의 주체의식과 참여도를 높이며, 서비스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부담이 단순히 장애인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초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공의 서비스를 더욱 더 책임감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단순히 자부담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며, 다만 적절한 자부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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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선 칼럼리스트
재활복지전문인력양성센터 센터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장애인 재활·복지 분야의 제도 및 정책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미국의 장애인 재활서비스와 관련된 올바른 정보와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특히 현재 장애계의 주요 이슈인 장애 등급제 폐지, 재활서비스 대상자 판정, 개별서비스 제공 방식과 서비스의 종류, 원스톱 서비스 체계의 구축 등과 관련해 미국에서 얻은 실무경력을 토대로 정책적인 의견을 내비칠 예정이다. 미국 주정부 재활기관에서의 재활상담사로서 실제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얻은 지식과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선진 장애인 재활서비스 제공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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