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들었던 단 한마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듣게 된 것인지는 잊어버리더라도 그 말 한마디는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아 기억된다.

어느 날 여자친구의 어머니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미 나의 장애에 대해 그녀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 온 것이다. 이전부터 "나중에 우리 엄마를 한번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애기를 몇 번 들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여자친구 어머니의 호출은 나와 우리 식구들 모두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약속일이 다가올수록 일터에서도 식사 시간에도 온통 "며칠 후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하는 고민으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약속 이틀 전 여자친구가 "나도 같이 그 자리에 있고 싶지만 몇 번을 부탁드려도 혼자 만나시겠다는 뜻을 꺾지 않았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왔기에 이 만남으로 우리 사이가 정리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더욱 불안하고 초조했다.

약속 당일 아침, 우리 가족들은 "여자친구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 아무 말 하지 말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라"며 안타까워하는 분위기에서 나를 보냈고, 나 역시 특별히 할 말은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잠시 기다리니 여자친구가 어머니와 함께 나타났다.

"아 조금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만나는 걸까?"라는 기대도 잠시, 그녀는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끝내 자리를 떴다. 드디어 둘만 남은 것이다.

"우리 애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여자친구 어머니의 첫 질문이었다. 결코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이었지만 약속 장소에 왔기에 더 이상 속일 것도 없었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관계가 진전이 된다면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도 우리 애 귀하게 키웠습니다. 내 딸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나요?

이 질문을 기점으로 약 두시간 동안 여러 가지의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가정 환경, 장애 상태, 치료가능 여부 등 주로 나의 장애와 여자친구의 성향이나 장, 단점 등에 관련된 질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그녀의 어머니는 이제 다른 약속이 있어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만 가봐야 한다"는 말 이후에 나오는 단어들이 끝내느냐 마느냐를 결정지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 남자친구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나한테 말했을때 그 애가 한 말이 '엄마 혜어지라고 하지만 말아줘'였습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좀 더 지켜볼께요. 하지만 만약 끝내게 되면 내 딸에게 상처주지 말고 마무리해 주세요."

'끝내라고만 하지 말아달라'는 그녀의 부탁이 통한 것이었다. 여자친구의 어머니가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간 이후, 오랜 동안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피곤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말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일주일간의 긴장은 절반의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긴장이 되어 물을 자주 마셨으면서도 화장실에 가지 못한 탓에 힘들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는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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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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