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학 작품은 유사한 점들이 있다. 이야기가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다 보니 비슷한 사연들이 있어 그럴 수도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구비문학 시대에는 이야기꾼의 재주에 따라 변형되거나 첨가되어 이야기는 다양한 줄거리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들은 특정한 유형이 있어 그 유형의 원형을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원형과 역사적 연관성 등을 연구하는 문학비평을 신화비평이라고 한다.

사실 모든 문학작품의 줄거리가 그리스 신화에 원형이 있고, 우리의 신화에도 원형이 있다. 사고와 정서의 원형이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 세계를 창조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문학이 독창적인 작품이라 하더라도 계모가 아이를 구박하는 이야기라든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라든가, 그 이야기의 패턴은 유사성을 가진 카테고리를 형성한다.

감동은 원형으로부터 유전되며, 이것이 서로 연결될 때에 우리는 카타르시스의 종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장애인의 재활모델과 자립모델처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의료적, 장애라는 개인적, 신체적 조건을 따지고 그것을 치료하거나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재활모델과 장애를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제약으로 보고 사회·환경적 제약을 해결함으로써 해결하려는 목표를 가진 자립모델, 또는 사회적 모델이 그것이다.

언론의 보도 형태도 재활모델을 가진 기자의 눈에는 장애인이 소풍을 가도 “장애를 극복하고 나들이하다”, 장애인이 대학에 입학해도 “장애를 이기고 대학에 입학한 장애인 열심히 공부하여 다른 장애인 돕고 싶어요”, 장애인을 돕는 미담사레에서도 “장애인 돕는 아름다운 손길”, 장애 예방을 위한 치료에도 “어둠에 빛을 준 천사의 얼굴” 등으로 제목을 만들고 미담이나 장애극복, 치료나 복지 등을 주요 기사로 다룬다.

이에 반해 사회적 모델을 알고 있는 기자의 눈에는 “장애를 억압하는 사회제도 개선”,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 제시”, “장애인의 권리 외면하는 시설” 등으로 표현된다.

최근 사극 드라마가 매우 많이 방영됐다. 한 드라마가 끝나면 다시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는가 하면, 한 방송사에서 역사 드라마를 방영하면 다른 방송사에서도 이에 경쟁하듯 사극을 내보낸다.

최근의 드라마들을 보면, ‘대장금’, ‘이산’, ‘해를 품은 달’ 등에서 임금을 등장시키고 한 여인을 등장시킨다. 임금은 절대권력이고, 여인은 시혜자가 된다. 여인들은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되고 다른 여인으로부터 시기를 받는다.

이러한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임금들은 취향에 따라 예술을 하는 여인, 음식을 하는 여인, 길거리를 걷는 여인, 어느 천민의 여인, 어느 양반의 여인 등 참으로 다양한 여인들을 사랑했다고 생각된다.

작가들은 임금과 한 여인을 연결시켜 사랑만 만들고, 거기에 역사적 배경만 갖다 붙이면 드라마가 되는가 싶을 정도이다.

이러한 드라마들은 대부분 시대의 억압을 느끼기는 하지만 절대권력자는 선량하며, 그 것을 참고 이겨내 결국은 극복하고 행복했다는 것으로, 재활모델을 닮고 있다.

이에 반해 ‘만적이’, ‘임꺽정’, ‘다모’, ‘홍길동전’ 등에서는 세상을 변화시여 모순된 제도를 고치고, 저항하며 집단적 연대행위를 보인다. 문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이 문제이며, 자신의 권리가 침해됨을 절감하고 변화를 강구하지만 결국은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이것이 사회적, 자립적 모델을 제시하는 형태이다.

현대극 드라마도 이와 유사한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나, 기업에서의 신분상승이나 자신의 능력 인정에 대한 드라마들도 시대에 편승하여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느냐, 모순에 저항하며 권리를 찾는 여정을 가지느냐의 문제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재활모델의 드라마에서는 사실은 주인공은 보석과 같은 존엄성이 있으나 권리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희생이 아름다움으로 표현돼 국민들에게 재활모델적 사고를 깊이 새기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나 하는 우려가 생긴다.

또한 자립모델은 대부분 비극을 가져오고, 모든 것을 사회의 탓으로 여기는 망나니로 표현돼 자립모델의 패러다임이 폄하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장애인 인식이 교육이나 체험 프로그램으로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지역사회에서, 문화나 제도 속에서 세뇌되어 뼛속 깊이 젖어 있는 이미지는 한 번의 교육만으로는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

장애인의 성폭력 문제, 장애인 경시풍조, 장애인의 정당한 편의제공 요구를 특혜라든가, 역차별이라고 여기는 자세 등은 우리 생활 속에 억압 구조가 팽배하기 때문이 아닐까?

굳어버린 이러한 재활모델이 문제 근절이 되지 않고 근절 약속만 반복하게 한다.

장애는 극복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개인의 잘못이며, 장애인은 무능하고, 약자로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 장애를 비정상으로 보고 치료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거나 선을 행하는 마음으로 돌보아야 하며, 이에 대해 장애인은 감사해야 하는 사회에서 장애는 하층이고 비장애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이 된다.

장애인이 배제된 보편성, 그것은 오염된 보편성이며, 객관성을 잃은 비학문적 태도이며, 일부만을 가지고 전체처럼 여기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장애문제를 숨기고 은밀히 처리하는 시설이 아니라 드러내 놓고 이슈화하고 장애에 눈 높이를 맞추어 보편성을 추구할 때 비로소 전체를 보는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 복지를 보장하는 사회가 문화와 제도, 생활과 예술 등에 골고루 스며들어 이 사회가 진정으로 변화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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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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