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사람들로 붐비는 서울역 앞에서 여자 친구를 만났다. 이날 우리의 데이트 코스는 수원에 있는 장안공원,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복잡하지 않아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으로는 그만인 곳이다.

"수원이면 지하철 타도 되는데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 다시 내려가려면 더 불편하잖아"

대답 대신 그녀에게 수원행 무궁화호 티켓 두 장을 보여주었다. 지하철을 타고 갈 생각에 좀 더 일찍 나왔는데 덕분에 기차를 타게 생겼다며 좋아하면서도, 열차표를 사지 말고 그 돈을 아껴 두었다가 지칠 때 음료수라도 사먹으라는 가벼운 나무람이 이어졌다.

"고마워! 하지만 내 장애 때문에 네가 스트레스 받는 일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었어"

미안한 마음에 이 말은 직접 그녀에게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켰다.

나 역시 무료료 이용할 수 있는 지하철을 두고 굳이 기차를 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지하철과 기차가 같이 정차하는 역으로 이동할 때는 기차를 선호하게 되었다. 전철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적지 않게 받았던 기억들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은 '실질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운 경로석, 그리고 엘리베이터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빈 자리가 생기면 나에게 먼저 앉으라고 이야기 하곤 했다. "네가 먼저 앉아"라고 여자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기 전 이미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는 일이 적지 않았고,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아 멀리서 빈 자리를 보고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도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던 경우도 상당수 였다.

문제는 '빈 자리를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년층이라는 사실이었다. 한 때 버스 안에 '나는 젊었거늘 서서간들 어떠리' 라는 스티커가 붙여 있었다. 지금도 그 때보다는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형식적인 '경로 우대'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나는 '노인을 두고도 먼저 자리에 앉은 버릇없는 젊은이' 로 인식되기 일쑤였고, 주변에서 나의 장애를 인식한다고 해도 "(서있기 힘들 정도로 장애가 심하면) 뭐하러 밖에 돌아다니느냐"는 말을 보너스로 들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데이트를 할 분위기가 생기겠는가?

그녀에게 건넸던 기차표는 그러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면하기 위한 일종의 면죄부와 같은 것이었다. 기차는 좌석이 지정되어 있고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기에 나이에 관계없이 자리의 주인이 오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켜줘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녀를 사귀었던 때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나고, 이제는 수도권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역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들은 자신보다 힘이 센 노약자 승객에게 밀리고, 휠체어를 탄 사람은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다" 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다른 이동수단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이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늘어나는 노년 인구를 수송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는 얼마나 건설되고 있는가? 언제까지 장애인들은 손가락질을 당하며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만 할까?

늘어나는 노년층과 이 땅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이 편안하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증설은 어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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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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