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내 아우가 보고 싶어 어둔 밤 먼 길을 달려 소록도를 찾았다. 그 곳에는 벌써 봄이 와 있었고, 싱그러움이 섬 안에 가득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밤이 너무 늦으면 고흥이나 녹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첫 배로 소록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요새는 바다 위로 다리가 놓여져 오밤중에도 아우의 집을 편하게 찾을 수 있다.

새벽 한 시가 되도록 잠을 안 자고 기다리던 내 아우가 오랜만에 보는 나를 무척 반색하며 맞아 주었으나, 왠지 그 가슴에는 외로움의 넓이가 더 커진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있었다. CBS라디오 르뽀 '이것이 인생이다.' 취재 구성을 위해 여러 날 소록도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가 운전하는 승합차 신세를 자주 지면서 우리는 매우 자연스럽게 의형제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내 아우는 20대 초반에 느닷없이 찾아온 한센병으로 좋다는 약은 모두 써 보고 이름난 병원 여러 곳을 발이 부르트도록 다니다가 결국 그 질병의 파구를 넘지 못하고 소록도 주민이 되었다. 몸속에 흐르는 피의 온도가 가장 높은 시기에 모든 꿈을 접고 내 아우는 그렇게 이 섬에서 인생의 닻을 내렸으며 벌써 8년째 살고 있었다.

우리가 의형제의 연을 맺던 1995년 당시만 해도 소록도에는 간호조무사 양성기관이 있었다. 생기발랄하고 마음 따뜻한 숙녀들이 그 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그 중 몇몇은 '국립소록도병원'에 취업을 하기도 했다.

마을과 병원, 그리고 손가락과 입술이 부자유스러움에도 하모니카를 매우 잘 부시던 한센 어르신을 취재하던 내게 천사처럼 고운 A가 다가왔다. 내가 만일 미혼이었다면 당장에라도 청혼할 만큼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는 곧바로 내 아우와 A를 연인으로 만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고, 다행이도 그 둘은 점점 사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한 나는 열흘이 멀다 않고 소록도를 드나들었고, 때로는 내 아우와 A를 서울로 초대하기도 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의 꿈이 이뤄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 다다라 서로에 대한 열정이 멈추는 듯 했고 작은 그늘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마도 A가 부담을 느끼고 있을까 염려되어 살짝 마음을 떠 보았으나 그의 가슴은 여전히 사랑의 꽃이 만발해 있었다. 문제는 내 아우였다.

자신이 한센인이라는 점, 아직도 세상바람이 차갑다는 사실, A의 가족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없다는 위축된 감정으로 인해 내 아우는 남모르게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북돋아 주고 등을 떠밀어도 내 아우는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고, 결혼에 대한 자신감의 농도는 점점 흐려져만 갔다. 그 가슴은 용광로처럼 뜨거우면서도…….

한편, A는 내 아우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결혼하자."는 약속을 받고 싶어서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A 스스로가 먼저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행여 내 아우가 연민의 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염려와 자칫 상처를 크게 남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저 내 아우의 입모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과정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아우를 강하게 부추길 수밖에 없었으며, 슬그머니 A의 눈치만 살피는 정도였다. 내 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 갔고 애간장이 다 녹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동안 발 없는 말은 부정한 소문이 되어 섬 전체로 퍼져 나갔으며, 그 내용은 악성으로 비약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A는 소록도를 떠나야 했으며, 내 아우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수렁에 빠져 꾀나 긴 시간 마음고생을 하였다.

일찍 피어난 매화가 소록도의 봄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석영

이 아픈 추억은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나와 내 아우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내 아우가 딱 한 걸음만 자신 있게 A에게 다가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2016년 5월 17일이면 소록도가 한센인을 품은 지 정확히 백 년이 된다. 지금은 그림처럼 풍광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지만 그 역사의 시작은 참으로 비극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한센인들을 강제로 소록도에 가두고 혹독한 부역과 비인간적인 통치를 계속하며 많은 한센인들을 아프게 했다.

육지와 불과 7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섬이었지만, 그 생활의 형태는 사람의 상식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나쁜 수준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후, 광복을 맞이하며 한국전쟁을 겪고 여러 정권이 바뀌며 700미터 밖의 육지에는 민주주의가 범람했지만, 소록도 한센인들의 삶 가운데에는 여전히 자유가 인색하게 주어져 왔다.

700미터 떨어진 녹동항에서 바라다 보이는 하얀 탑. ⓒ유석영

소록도에 다리가 놓여진 시기는 지난 2009년 3월 2일이다. 90년이 넘도록 육지와 멀게 지내다가 어찌어찌하여 이 섬에 다리가 건설되었다. 700미터 거리가 너무 멀었던 탓에 그토록 시간이 오래 걸렸단 말인가, 아니라면 돈이 부족했던가, 그도 아니라면 다리 놓는 기술자가 없어서 그랬단 말인가!

우리나라는 이미 1992년에 한센병에 대해 국제적으로 종결 선언을 했다. 국민 1만 명 중 2명 이하로, 그 질병 발생률이 떨어지면 종결 선언을 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에 우리나라는 한센병에서 안전지대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육지와 소록도 사이에는 바닷길 700미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세상과의 극심한 삶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록 내 아우가 한센인이었지만, 안타까운 바닷길 700미터가 없었더라면 매우 당당하게 A에게 "사랑한다. 우리 결혼하자."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단절이 착한 내 아우를 몹시 아프게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 소록도에는 약 600명의 한센인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평균 연령은 80세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곳 주민들의 젊은 날은 외로움과 아픔, 그리고 불편함 투성이었다. 그래도 이 분들은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지려는 노력보다는, 나누려는 더 아름다운 몸짓을 가졌다.

지금의 소록도 풍경은 뒤늦게 주민들의 집을 고쳐 주는 일, 일반 관광객들이 중앙공원에 많이 찾아오는 현상, 큼직한 체육관이 지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록도 주민들이 한 살이라도 젊고 건강할 때 이 모든 서비스가 이루어졌더라면 참 좋았을 거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50대 중반에 접어드는 내 아우의 가슴에 외로움의 넓이가 더해가는 모습을 보노라니 내 마음이 짠하고 착찹해져만 간다.

돈과 권력을 엉뚱한 분야에 쏟아 붓는 사람들에게 소록도의 봄을 마음으로 읽어 달라 부탁하며, 부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고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며 행복한 노래를 부르도록 따뜻하게 보살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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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영 칼럼니스트
사회적협동조합 구두만드는풍경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장애인복지 향상, 선한 가치의 창출과 나눔을 이념으로 청각장애인들이 가진 고도의 집중력과 세밀한 손작업 능력을 바탕으로 질좋은 맞춤형 수제 구두를 생산하며, 장애 특성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여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고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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