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8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 공모전 결과 박관찬씨의 ‘청년은 오늘도 첼로를 연주합니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세 번째는 최우수상 수상작인 길창인 씨의 ‘달려라 펭귄맨’이다.

달려라 펭귄맨

길창인

초등학생 나의 별명은 펭귄맨이었다. 배트맨과 대적하는 고담시 빌런 펭귄맨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랬다면 좋아했을 것이다. 악당은 멋있어 보였으니까. 내가 달리기를 할 때, 그 모습이 꼭 펭귄 같다 하여 친구들은 날 펭귄맨이라 불렀다.

펭귄맨이라 불리기보다 더 어렸던 4~5살의 나는 달리기를 할 때면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줄곧 혼이 났다. 발뒤꿈치를 들고 뛰면 안 된다 했다. 나는 항상 까치발을 하고 다녔고,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유년기 나쁜 습관으로 여겨 어른들은 내가 까치발을 하고 다니면 혼을 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의식하고 뛰어도 자연스레 뒷발이 올라갔다. 이것이 병이라는 사실을 초등학교 3학년 때 알았다.

어머니는 날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데려가셨다. 처음 가본 그곳은 너무나 크고 화려했다. 커다란 회전문 입구를 통해 들어간 홀은 마치 콜로세움처럼 웅장했다. 시간에 바랜 날이어도 당시 느꼈던 압도감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어머니가 구슬프게 우셨던 기억과 함께.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발의 변형이 심했고, 아킬레스건이 남들보다 짧다고 했다. 수술을 받기엔 어려 2년 후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지금껏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내가 남들과 다르단 사실을 공식적으로 진단받았다. 일반적이지 않음을 알고 병원을 찾은 것이겠지만 어머니는 내게 연신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엄마 울지 말라며 따라 울었다. 이날 뒷발을 들고 까치발을 하고 다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릴 적 친구들은 원초적으로 별명을 지었다. 활발한 여자아이에게는 ‘조폭 마누라’, 덩치가 조금 크면 ‘뚱땡이’ 같은 식이었다. 언젠가 삼양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신호를 건너려 친구들과 함께 뛴 적이 있다. 뒤에 있던 친구들이 날 보고 웃음을 터트렸고, 그들은 ‘펭귄이래요’라며 놀렸다. 그 이후 뒤뚱뒤뚱 뛰는 나는 ‘펭귄맨’이 되었다. 이상이 있다는 사실도, 친구들의 놀림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수치스러웠다. 펭귄맨이란 별명이 생기고, 더는 달리지 않았다.

13살과 14살 때 두 번의 수술 받았다. 왼발 한 번, 오른발 한 번. 6개월 정도 입원을 했고, 2년 가까이 목발을 짚었다. 펭귄맨은 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뛰지 못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펭귄맨이란 별명도 사라졌다. 수술한 이후로 비가 내리면 수술한 부위가 아리고 시렸다. 당시 날 가장 이해해 준 것은 할머니였다. 아픔을 감추려 해도 먼저 알아보셨다. 마치 자신이 아팠던 것 마냥. 너무 고통스러운 날에는 발을 붙잡고 누에고치처럼 몸을 말아 울었다. 소리 삼킨 울음에도 할머니는 어김없이 찾아와 날 안아주셨다.

18살의 여름, 정형외과 의사는 내게 세브란스 병원이 아닌, 이대 목동 병원으로 가보라 하였다. 그곳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과 선생님이 있다며. 새로운 병원을 향한 그날은 참으로 무더웠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어머니와 나는 낯선 길을 헤매며 이대 목동 병원 신경과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불치병 판정을 받았다.

병명은 ‘CMT(샤르코-마리-투스병)’, 하퇴의 근육 위축과 감각 장애가 일어나는 유전성 신경장애. 처음 본 의사는 내가 CMT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말했다. 어려운 병명은 외우지 못했고 오직 불치병이라는 단어만 뇌리에 남았다. 아킬레스건이 짧아 까치발을 하던 이유도, 발의 변형이 와 수술을 한 이유도 사실 선천성 유전병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도 그렇지 않았기에 난 유전자 돌연변이였다. 어머니는 그날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남들과 다르단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 나는 웃었다. 어머니의 등을 토닥거리며 ‘불치병이라니, 드라마 주인공 같다. 그치?’라며 웃었다.

의사에게 그럼 죽는 것이냐 물었다. 의사는 불치병이라고 죽는 것은 아니라 답했다. 그저 치료할 수 없는 병을 불치병이라고 하며, 손발의 근육이 조금씩 빠져나가다가 ‘나이가 들면서 온몸에 근육이 사라져 고통 속에 죽을 것’이라 말했다. 이런 말을 환자에게 했을 리는 없지만, 실제 했던 말은 아무리 더듬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냉라면을 먹었다. 빙수처럼 얼음이 듬뿍 올라간 라면이었다. 그걸 먹고 어머니도 조금은 진정이 되었을까. 아니면 넘기지 못했을까. 어머니는 다시 일터인 식당으로 돌아갔고, 나는 집으로 가 그제야 맘 놓고 울었다. 며칠이 지나고 복지카드를 받았다. 그곳에는 지체 장애 5급이라 쓰여 있었다. 부모님의 식당을 가면 등급이 매겨진 정육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마치 제일 낮은 등급의 죽은 쇠고기가 된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조금씩 우울증 증상이 발현됐다. 불치병은 오직 드라마에서만 접하는 단어였고, 아는 것은 암과 백혈병뿐이었다. 그리고 불치병 환자는 모두 일찍 생을 마감했다. 자연스레 나의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사춘기 고등학생에겐 벅찬 상상이었다. 날 펭귄맨이라 놀리는 친구들은 이제 없었지만, 우울은 내가 가장 싫어했던 펭귄맨으로 형상화돼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았다. 펭귄맨은 내가 행복할 때 어릴 적 수치감을 떠올리게 했고, 무슨 일을 시도하면 실패할 거라며 막았다. 우울한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지만,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감췄던 것처럼 내 안의 펭귄맨을 감추고 또 감췄다.

재활을 마치고 남들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강도 높은 운동은 못 했지만,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하게 걸을 수 있었다. 삶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 계기였을까. 특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술한 지 근 20년이 되었지만, 제대로 뛰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이겨보려 마라톤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날 가두고 있는 것을 깨고, 감추어둔 펭귄맨과 헤어지고 싶었다. 그날 바로 1월 1일에 열리는 5km 단거리 마라톤을 찾아 겁 없이 예약했다.

연습은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했다. 혹시 누가 볼까 두려워 아무도 없는 시간을 찾아 밤 10시 이후에 연습했다. 누군가 보면 또다시 펭귄맨이라 부를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빠르게 걷는 정도로 뛰었다. 혹시나 수술한 부위가 아플까 아기새가 첫 비행을 하듯 아주 조심스럽게 뛰었다. 걱정했던 것만큼 발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기라 부르기 민망할 속도에도 5km는커녕 100m도 달리기 힘들었다. 도전에 의의를 두자고 생각하며 매일 저녁에 나와서 걷고 뛰었다.

생각보다 실력이 빨리 늘었다. 100m를 뛰고 지쳤던 것이 150m가 되었고, 200m가 되었다. 속도에는 연연하지 않고 쉬지 않고 얼마나 오래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마라톤 참가 자체에 의의를 두고 시작했지만, 목표는 어느새 쉬지 않고 완주하기로 바뀌었다. 연습을 이어갈수록 실력은 눈에 띄게 나아졌다. 한편으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도전에도, 장애라는 핑계 뒤에 숨어 살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단 비겁하게 피한 일들이 달리기뿐이었을까. 당연히 못 한다 여긴 것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1월 1일 아침이 되었다.

마라톤 장소에는 많은 사람이 설레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들 중 나 혼자 비장했다. 시작 신호와 함께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더라도 한 번도 쉬지 않고 완주하는 것만을 목표로 천천히 달렸다. 5km를 뛰기는 쉽지 않았다. 지쳐서 걷고 싶었다. 불치병에 걸린 장애인이라 핑계 대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포기하고 싶었다. 매번 그랬으니까. 그때 잊고 살던 펭귄맨이 나타났다. 펭귄맨은 내 옆에서 뒤뚱뒤뚱 함께 달려주었다. 가장 싫어한 별명인 펭귄맨이 이제 와 날 응원해주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5km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어 완주에 성공했다.

지금껏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은 장애가 아닌 남들의 시선이었지만, 불가능하다고 억누른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장애로 인한 남과 다름은 새로운 마음의 장애를 낳았고, 그것은 등급 없이 괴로웠다. 하지만 마음의 장애는 이겨낼 수 있다.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도전하고, 하나씩 성취해나가면 언젠가 마음의 장애는 없어진다. 세상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나를 바꾸면 나의 세상은 바뀐다. 평생 피하고 감추고 살았지만 펭귄맨이 나를 응원해 준 시점부터 나의 세상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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