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국회 편의시설 체험. 현근식 팀장은 장애인 당사자의 시각으로 국회 구석 구석을 살폈다. ⓒ여의도통신 한승호기자

그들은 국회 회의록을 빠짐없이 들춰본다. 장애인이 제일 많이 산다는 노원구는 물론이고 땅끝마을 해남군까지, 전국 방방곡곡 의정 회의록을 샅샅이 훑는다. 장애인들과 관련된 발언들은 이 과정에서 걸러진다. 그렇게 엑셀 파일에 일일이 옮겨다 붙여 센터 홈페이지에 올리면, 본부에선 모니터 단원들이 취합한 의원들의 발언들을 엄격한 세부 기준에 따라 평가한다.

장애인정책 모니터링. 현근식 팀장은 모니터 단원으로 시작해 직원으로 이 일에 매진하고 있다. 그에게 모니터 활동은 잠재력 200배를 발휘하게 해준 보람된 일이었다. 장애인이란 이유로 취업에 고배를 마셨던 그가 모니터 활동으로 새로운 눈 뜸을 체험하게 된 이야기를 들어보자.

- ‘한국장애인인권포럼’은 매년 모니터링 단원을 모집한다는 모집광고를 내죠. 어떤 일을 하는 건가요?

“제가 이해하는 ‘모니터링’이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같이하면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그 대상이 저에게는 장애인을 위한 정책이었고, 더 나아가 방송에서의 장애인 이미지, 손이 불편하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든 홈페이지 환경, 웹 접근성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때는 저도 장애인 문제에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제 자신이 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 문제는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셈이죠. 그러던 중 2005년에 우연히 에이블뉴스에서 ‘의정활동 모니터단 모집’ 기사를 보고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는 나름대로 두 가지 소망이 있어서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려던 해였습니다. 첫 번째가 대학시절 전공했던 문학에 대한 꿈을 살리기 위해 용기내어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의 문에 도전해 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폐쇄적인 나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 작은 봉사활동을 하거나 사회문제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도전에 해당되었던 것이 장애인 문제였던 것이죠.

그 해 국정감사 모니터링은 무척 뜻깊었습니다. 오프라인 모니터링이라 직접 국회의사당을 찾아가 방청석에서 지켜봤는데요. 장애인을 위한 정책이 얼마나 논의되었고 각 국회의원들이 장애인 정책에 대해 얼마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심도 있게 의정활동에 임하나 주의 깊게 살폈지요. 저는 보건복지위원회와 과기정통위원회 모니터링을 맡았는데요. 정말 장애인에 대한 모든 질문과 주제가 저에게는 새로웠습니다. 그만큼 장애인 문제에 대해 생각 없이 살아왔었다는 반증이었죠.

그리고 드디어 12월 우수 국회의원 시상식을 하던 날,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제가 작업했던 장애인 의정활동 보고서를 국회의원 여러분들께서 소중하게 받아 읽고, 장애인 당사자가 수여하는 상패를 받아들고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시상식 당일의 하이라이트는 유승희 의원의 눈물이었습니다. 장애인 개그맨 박대운씨가 전달하는 상패를 받아 쥐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유승희 국회의원의 얼굴을 제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제가 살아온 생애에서, 장애인에게 선물을 받고 저렇게 좋아하던 분은 부모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 저는 제 장애를 다시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졌습니다. 한 가지의 도전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것입니다.”

2005년 장애인 모니터링단이 뽑은 우수 국회의원 시상식. 열린우리당 유승희 국회의원(왼쪽)은 개그맨 박대운씨로부터 감사패를 건네 받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

- 장애인들이 참여하는 모니터링 활동이 왜 필요할까요?

“장애인에 관한 정책이나 서비스들이 일방적으로 공무원이나 사회복지 전문가들의 판단 및 결정으로 행해지는 경우,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차량용 LPG 할인제도나 장애인 고용촉진에 관한 제도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런 저런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만, 과연 이 제도가 정말로 장애가 있는 저의 필요에 맞춰 만들어져 있는가를 반문해 보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처럼 장애인복지 정책에 사업비 투입 대비 만족도가 낮은 것은, 장애인 당사자를 정책 결정에 참여시키지 않은 결과라고 봅니다. 간혹 일부 장애인을 참여시킨다해도 결국 들러리에 불과한 수준으로 멈춰 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권포럼 안에서도 제가 총괄을 맡고 있는 ‘장애인정책 모터링센터’ 활동의 특징은 장애인 당사자의 시각으로 장애인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실제 장애인 당사자 참여율도 높습니다. 올해 모니터단원이 40명인데, 그중 장애인 당사자가 85% 이상을 차지합니다. 일종의 재택근무라 할까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고, 모니터 활동에 소정의 활동비를 지급하기에 장애인에게 직무를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참여 확대의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정책 제안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장애인 의정활동 모니터링’은 그 독보적인 활동과 주목할만한 성과로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지원을 받아냈습니다. 저희는 이를 더욱더 발전시키기 위하여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하는 장애인복지예산 감시 및 예산 참여 활동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의 핵심적인 활동 중에 하나가 예산 감시 활동일 것입니다. 장애인계에서 이 예산 감시 및 참여운동을 하는 곳이 아직까지는 없는데요. 모니터링센터가 지금부터라도 뛰어들어야 할 분야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올 4월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저촉되는 ‘차별사례 모니터링’에 대한 사업을 기획해서 정부에 제안서를 제출했던 것도 의미 있는 것이었는데요. 아쉽게도, 보건복지가족부에서 대대적인 모니터링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가 맡아서 진행할 수는 없었는데요. 내년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장애인 당사자의 시각에 의한 장차법 모니터링에 대해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 현근식 팀장님은 특히 모니터 활동을 하다가 직원이 된 걸로 아는데요.

“네. 2005년에는 의정활동 오프라인 모니터단으로, 2006년에는 웹 접근성 모니터단 활동을 하며 여의도 사무실을 드나들다가 코가 뀄죠. 특히 웹 접근성 모니터 활동은 정말 어렵게 진행했었습니다. 담당한 간사님이 웹에 대해 잘 몰라서 세부적인 사안들은 거의 제가 만들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도 웹 마스터 관련 업무만 해온 터라 웹 접근성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죠. 결국 많은 시행착오 끝에 모니터링 사업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웹 접근성 보고서를 거의 제가 도맡아 썼는데요. 대표님과 직원들이 그것을 좋게 봐준 것 같습니다. 연말 즈음에 대표님께서 같이 일해보자고 하셔서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생의 시작이었죠! 후후후.”

2007년 유니버설 디자인 공모전 시상식. 이범재 대표(뒷줄 오른쪽)과 양원태 이사(앞줄 오른쪽)가 축하해 주고 있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

- 장애인은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되기가 어렵죠.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을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대학에서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전공 자체가 취업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과였고 더군다나 사회생활에 치명적인 약간의 언어장애와 상지장애 등이 있는 저를 받아주는 직장은 없었습니다. 전화통화를 하거나 문서작업을 할 때 비장애인들보다는 능력이 많이 떨어질 것이라는 통념 때문이었죠.

그런 장벽에 가로막히자 저는 머리를 써서 하는 일을 찾자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방송작가협회에서 운영하는 방송작가 교육원도 1년간 다니고 나름대로 영화에 대한 교양강좌도 많이 들었습니다. 비록 방송작가의 길은 가지 못했지만, 강좌를 들으면서 알게 된 프로덕션 직원의 권유에 따라 기업 홍보영상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죠. 3년 정도 활동했는데 제 생애 처음으로 1, 2백만원을 벌어본 거라서 기분이 너무 좋더군요.

그러나 그 일도 1년에 많아야 2건 정도 맡게 되는 불안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프로덕션이 IMF덕에 부도를 내버렸어요. 그 덕에 저도 2년 정도 신나게 놀다가 거의 독학으로 컴퓨터를 익혀서 IT업계의 재택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대학에서 컴퓨터를 배우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뒤늦게 필요에 의해 독학하게 된 거죠. 한 9년 정도를 집에서 일했습니다. 행운이었죠. 중증장애인이고 언어장애까지 있는 제가 월급은 친구들보다 훨씬 적다 해도 10년 넘게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게 운이 좋았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 전동휠체어랑 지팡이를 때에 따라 바꿔가며 사용하시죠. 본인의 장애는 중증에 속할까요?

“전동휠체어는 인권포럼에 들어와서 대표님 것을 빌려타면서 처음 타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진 관공서에 가서나 수동휠체어를 한두 번 타본 적이 있었지, 거의 휠체어를 타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오래 타다보니 걷는 것이 더 서툴러지더군요. 서른살 넘어서까지 아무런 보장구 없이 어디든 대중교통을 이용해 걸어 다녔고, 한 십여년 전부터 지팡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동휠체어를 주로 타지만 턱이나 장애물이 있어 못갈 형편일 때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기도 한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사무실 직원들은 ‘하루 한 번씩 기적을 행하는 팀장님’이라고 놀리기도 하죠. 하하하.

보장구 없이 걷거나 지팡이만 사용할 때는 중증장애인이라는 자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는 장애인, 그것도 ‘여러 면에서 상당히 불편한 중증장애인’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각이 든 직접적인 이유는 이 자리에서는 밝히기 싫은데요. 극심한 차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전 중증장애인이라고 확신합니다. 특히 말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작년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 인터뷰 요청이 있어 나갔는데 엄청나게 버벅댔나 봅니다. 그 이후로는 그 라디오방송 전체에서 저의 인터뷰를 꺼리더군요. 모니터링에 걸려 방송심의위원회에서 싫어한다나요. 암튼 그런 이유로라도 저는 중증장애인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신 있는 분야를 말할 때도 제 육체적 한계 때문에 걸림돌이 있으니까요. 그 사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앞의 에피소드에 비춰보면 저의 경우엔 의학적 사회적으로 장애 정도가 아주 심한 거죠.”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모니터단은 교육 과정이 힘들기로 유명하다. 단원들은 규정된 지침에 따라 국회와 지방의회, 방송, 웹에 대해 철저히 점검한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

-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엔 쟁쟁한 이사님들이 계시죠. 곁에서 뵌 이범재 대표님, 양원태 이사님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쟁쟁한 이사님’이라는 표현이 좀 생소한데요. 이범재 대표님과 양원태 이사님 모두 저희와 똑같은 장애인입니다. 저는 두 분을 처음 뵐 때 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만났습니다. 처음 만남에서 그 분들은 저와 같은 장애인이고 장애인 문제에 저보다 먼저 눈뜬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을 뿐,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두 분이 쟁쟁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같은 장애를 가진 분들이라 거리감보다는 공감대가 훨씬 커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만나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 분들이 갖고 계신 저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두 분 모두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몸을 던지셨다는 이력도 그렇지만, 장애인 문제를 대할 때 항상 자신의 문제로 품어안는 그 분들의 사유 방식은 제가 아직도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아직 장애인 문제를 대할 때 이 분들과 같은 방식으로 고민하는 분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범재 대표님은 청년시절부터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을 가슴 속에 마그마처럼 품어온 분이세요. 굽이굽이 인생 역정을 거쳐 그것들을 장애인 문제로 천착시키신 것 같습니다. 그런 대표님의 인생역정이 오롯이 투영된 결실이 제가 속한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라고 생각합니다. 양원태 이사님은 87년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실 텐데요. 그 해 직선 투표의 개표과정 중 구로개표소의 부정시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죠. 그 때 옥상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서울대학생이라면 동시대 사람들은 많이 기억하실 겁니다. 양이사님 또한 국회의원 보좌관, 출판사 대표 등으로 일하며 사회적인 운동에 많은 노력을 부어넣으신 분입니다. 저희 단체에 상임이사를 맡으신 것도 사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장애인운동을 시도해 보고 싶어 흔쾌히 수락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한국장애인인권포럼’의 올해 추진사업이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는 일들 말고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올해는 ‘웹 접근성 실무단’을 선발해서 웹 접근성 향상을 유도하고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웹 모니터링에서 좀 더 강화된 내용인데요. 각계 전문가로 인증위원회를 구성하여 웹 접근성 인증마크를 발급하고 인증제도의 공신력을 높일 겁니다.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손이 불편하거나 인터넷에 서툰 사람들도 어느 사이트든지 찾아가 정보를 쉽게 찾아보고 이용할 수 있도록 웹 환경을 변화시키는 게 저희의 목표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직접 은행을 찾아가기도 힘든데 인터넷뱅킹조차 접근하기가 어렵거든요. 이미지파일에 이 분들도 알아볼 수 있게 대체 텍스트를 넣어주고 웹 기준에 맞춰 몇 가지만 지켜준다면 모두가 편리한 인터넷 환경을 만들 수 있을 텐데, 해야 할 일을 공공기관이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

저희 인권포럼에서 개최하는 ‘유니버설 디자인 공모전’ 기억하십니까. 올해로 제3회를 맞이했는데요. 얼마 전 대상 500만원이고, 작품 접수는 11월까지로 공고를 나갔죠. 장애인과 비장애인, 어린이와 고령자의 ‘소통과 생활’에 대해 보다 의미 있고 다양한 표현들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올해는 영상디자인 부문이 신설이 되었는데요. 어떤 작품들이 들어올 지, 또 전시회는 어떤 이벤트로 장식될 지 기대됩니다.

특히 8월에는 새로운 사업이 시작됩니다. 장애인방송국 ‘J-NET TV’를 개국하여 인터넷방송으로 첫 출발을 할 예정입니다. 지금 스튜디오 시설을 공사 중인데요. 저희 인권포럼은 이를 위해 여의도에서 신길동으로 사무실을 옮겼습니다. 우리 방송국은 장애인 당사자 분들이 직접 참여하는 ‘방송실무단’을 결성해서 장애인들의 시각을 보여줄 독특하고 새로운 영상물을 제작해 나갈 계획이죠. 물론 방송국 안에는 전문적으로 방송제작을 담당하는 피디와 작가, 촬영과 편집팀이 있어서 방송을 재밌게 만드는 기술적인 부분들을 도와주실 겁니다. 현재 개국식을 준비 중인데요! 장애인계에서 의미있고 좋은 또 하나의 시작인 만큼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장애인방송국의 첫 걸음을 축하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초대합니다.”

*예다나 기자는 ‘장애 경력 18년’을 자랑하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입니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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