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민씨는 서울대 캠퍼스를 휠체어로 누비면서 장애인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게 됐다. ⓒ문영민

명문대 입학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믿는 한국 사회에서 높은 서울대 문을 열어젖힌 장애학생들 앞엔 어떤 생활이 펼쳐질까. 서울대 화학과 문영민씨에게 질문지를 넘겼다. 밤늦게 끝난 실험에 남들은 막차를 쫓아달릴 때 택시를 잡아타느라 바닥을 드러내는 용돈. 드넓은 캠퍼스를 휠체어로 헤치고 다니느라 늘어나는 팔뚝 굵기. 목이 쉬도록 외쳐대 장애학생 인권 제자리 찾기를 일궈내고 있는 장애인인권연대사업팀의 박수 받을만한 활약. 이 속에서 장애인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그녀를 만나본다.

- 2003년, 서울대 인터넷신문 ‘스누나우’에 당시 사회학과 김원영씨가 수기를 쓴 것이 관심을 끌었죠. "'장애인+서울대생=일반인'이 될 줄 알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장애인+서울대생=잘난 장애인'이 된 것"이라고 썼는데요. 지금은 스누나우가 문을 닫아 볼 수 없는 게 아쉽네요.

“글 쓰신 분과 친분이 있기도 하고 저도 그 글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었어요. 당시에 엘리트주의에 물든 장애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는데,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해요. 저도 고등학교 시절을 힘들게 보냈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내 장애가 상쇄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어요. 그렇지만 대학교에 와서 넓은 캠퍼스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제 장애는 상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됐죠.

교실에 가만히 앉아 공부만 하던 시절에 비해 넓은 캠퍼스는 얼마나 숨 막히게 내 장애를 드러내던지!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은 어떤 지위에 의해 상쇄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닐 텐데 말이에요. 장애 그 자체를 수용하고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하는 제 나름의 끊임없는 시도가 필요할 텐데 그 문제는 쉽지가 않네요.”

- 서울대 내 장애인 편의시설은 우리나라 최고 대학답지 않다고 들었어요. 이 일로 계속되는 요청 끝에 2003년 정운찬 총장과 면담도 했는데요.

“서울대에 장애인 특별전형이 2002년부터 생겼는데, 정작 특별전형을 만들어놓고 장애학생에 대한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뽑아줬으니 알아서 학교 다녀라? 그래서 장애학생 당사자와 장애 문제에 관심있는 비장애학생들이 모여서 총창님과 면담을 추진했던 거에요. 그 결과로 장애학생의 지원을 총괄하는 ‘서울대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생겼습니다.”

- ‘서울대 장애학생지원센터’는 어떤 일을 하나요?

“그 해 가을에 콜밴이 한 대 도입되어서 지체장애학생의 이동을 돕게 되었는데요.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행되고 있죠. 개별적으로 이동지원도 되고, 필기가 어려운 학생을 위해 대필 보조도 돼요. 2002년까지는 청각장애학생에 대한 지원이 거의 전무했었는데 속기사 1명을 포함해 대필 도우미가 수업 시간에 교수님의 강의를 문자로 통역해주고 있고요. 아무래도 수업 내용을 백 퍼센트 타이핑하는 것은 어려우니 녹취 등으로 보완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시각장애학생을 위해 점자 타이핑과 교재 지원을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 학습 지원이 시작된 점이 큰 성과겠네요. 이 모두가 ‘서울대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이 이뤄낸 성과라고 알고 있어요.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은 2003년 장애문제에 관심있는 여러 자치단위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어요. 2003년 총장님과의 면담을 통해 장애학생지원센터 설립을 이뤄냈고, 접근이 불편한 강의동, 강의실에 엘리베이터나 경사로를 놓는 것부터 청각장애학생의 수업권을 위해 속기사 1명을 배치한 것 등 이런 일들이 모두 장애인권연대사업팀과 학우들의 투쟁으로 일궈낸 거예요. 불편하다고 가만히 있으면 본부에서 알아서 지원해 주진 않으니까요. 직접 우리 목소리를 내서 학교를 변화시켜 나간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2006년부터는 학교의 제도나 시설을 개선하는 데서 방향을 바꾸어 학우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활동을 진행시켰어요. 저도 함께해서 힘들면서도 보람된 시간을 보냈는데요. 영화제나 사진전 등의 문화제도 열고, 팀원들의 글을 모아 문집을 발행하기도 했죠. 예전에 비해 가시적인 성과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활동이 가라앉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학우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는 한 제도와 시설이 아무리 장애인에게 친화적으로 바뀐다고 해도 반쪽짜리 변화일 수 밖에 없으니까 꼭 필요한 활동이겠죠?”

‘휠체어를 탄 곰돌이도 수업을 듣고 싶다’. 2005년, 장애학생의 접근을 막는 계단식 강의실을 풍자한 이 퍼포먼스는 독특한 시도로 눈길을 끌었다. ⓒ문영민

- 흔히 장애여성에 대한 고정 이미지가 있죠. 대학생이라는 것만으로 거기서 벗어나 있는 건데요. 휠체어 탄 모습을 대할 때의 시선과 명문대생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의 시선,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복지관에 가서 학습지도 봉사활동을 하는데요. 가끔 복지관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만날 때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며 제 머리를 쓰다듬고 가실 때가 있어요. 이럴 때 마음이 좋지 않아요. 그 분들 말투나 몸짓에서 이런 게 느껴지거든요. 불쌍한 장애인이 복지관에 어떤 수혜를 받으러 왔구나. 그럴 땐, ‘전 서울대생이고, 여기 봉사활동하러 온 선생님이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하지만 만일 제가 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잘난 장애인으로 여겨지겠죠. 이것 역시 제가 원치 않는 시각이에요.

전 그래서 제가 장애인과 일반인 사이에 끼여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서울대 밖의 장애인 모임에 나가면 지금 말씀하신 장애인의 일반적인 이미지, 가난하고 정규 교육도 못 받았다는 그런 이미지를 공유하지 못하는 입장이고, 평범한 일반인들과 있을 때엔 그것대로 느껴지는 고립감이 있고요. 배부른 고민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서울대생 장애인이라서 갖는 복잡한 고민들이 있는 거죠. 졸업 후 문제만 생각해봐도, 주위의 기대가 커서 선뜻 평범한 삶을 선택해서는 안될 거 같은 그런 부담감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워요.”

- 대학교 등록금이 대폭 인상됐습니다. 장애학생을 위한 장학금 제도는 턱없이 부족한데요.

“이 문제는 제가 장학금과 그리 친하지 않아서 대답하기가 좀 민망한데요. 03년 그러니까 서울대에 장애인 특별전형이 생기기 전에는 입학한 장애학생은 전액 장학금을 받았어요. 그런데 04년부터 장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대신 시설이나 제도를 개선하기로 하고 전액 장학금 제도를 없앴답니다. 그 해 제가 입학했죠.

그래서 지금은 장애학생만을 위해서 서울대 내부적으로 주는 장학금은 없고요. 외부에서 제공되는 장애학생 장학금은 여러 종류가 있다고 알고 있어요. 제 주위 장애인 친구들도 그런 장학금을 받고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IBM에서 3, 4학년 장애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주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제 경우는 장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금은 아직 한 번도 못 받아봤어요. 이것도 성적 제한이 상당하거든요. 하지만 서울대는 타 대학보다 장학제도가 많기 때문에 제 성적이 월등한 것은 아닌데도 일반 장학금은 몇 번인가 탄 적이 있습니다.”

장애학생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실시되었던 2003년 서명전.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서울대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설립되었다. ⓒ문영민

- 전공이 화학이죠. 일반적으로 장애인들이 선호하는 분야가 아닌데요. 실험이 많을 텐데 어려운 점은 없나요?

“입학원서를 쓸 때 고3 담임선생님께서 ‘화학은 앉아서 실험만 하면 되는 것이니 너에게 딱이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전공을 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죠. 하지만 실험을 할 때마다 선생님은 왜 그런 근거 없는 말을 하셨을까 원망을 많이 했더랍니다. 흔히 화학이라고 하면 이런 저런 용액을 몇 개 섞어서 새로운 화합물을 발견하고 유레카! 외치는 모습을 생각하겠지만요, 그 모습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4년 내내 뼈저리게 느꼈어요.

실험실 안에서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해야 할 일들이 많고, 실험대나 환기 후드가 높아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게 힘들어요. 제가 실험에 참여했던 기억을 돌아보면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거나, 비커를 닦거나 한 장면만 떠오르네요. 1학년 때는 실제로 환기 후드나 실험대를 낮춰달라고 건의하기도 했었는데, 사실 저뿐만 아니라 화학을 배우는 학생들 전체가 열악한 환경에서 실험을 하고 있어요. 실험기구들도 낙후되어 있고 발암 가능성이 농후한 유독성 물질에 노출돼 있기도 하고요. 이런 환경에서 장애인에게 친화적인 실험실은 요원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암울하죠.

물론 화학은 여러 분야가 있어서 장애인이 공부하고 연구하기에 이보다 나은 분야도 있습니다. 요즘은 용액을 제조해 집어넣기만 하면 기계가 알아서 분석을 다 해주기도 하고, 실제 실험보다 컴퓨터 프로그램 등을 이용해 연구를 진행하는 분야도 많고요. 다만, 저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서 요즘은 다른 분야들에 기웃기웃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화학이 매우 매력적인 학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요!”

- 장벽 없는 대학 캠퍼스, 어떤 곳일까요?

“인터뷰 의도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서울대가 장애인 복지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기도 하고 사실 제가 입학할 당시보다 엄청나게 장애학생에게 친화적으로 바뀌었어요. 그 변화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고요. 학교 본부나 직원들도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우리들이 불편한 점이 있어 건의를 하면 최대한 개방적으로 받아주거든요.

그렇지만 가끔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장애학생에게 친화적인 캠퍼스가 또 다른 장벽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게 돼요. 예를 들면, 학생회관 식당에 장애인 우선석이 있는데, 서울대 학생 커뮤니티에 ‘장애학생 우선석은 비장애학생들에 대한 역차별이다’라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어요. 예상대로 많은 비장애학생들이 이 의견에 대해 이런 저런 논리로 반박했죠. 그런데 그 반박이라는 것이 ‘당신도 언젠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라는 논리, 또는 ‘두 다리 멀쩡한 정상인들이 자리 하나 양보하는 게 그렇게 힘드냐’는 논리이더라고요.

장애인에게 친화적이 된 캠퍼스에서 나는 ‘배울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비장애인들의 선행과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던가,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죠. 이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것이어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권리에 대해 세세히 밝히기가 그렇더라고요. 우리들 편에 서있는 훈훈한 이들까지 적으로 만들 순 없는 일이잖아요.

이런 장벽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물리적 장애와 같은 이전의 장벽보다 더 높게 쌓여서 장애인들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장벽 없는 캠퍼스란 이전의 장벽뿐만 아니라 장애인을 예전보다 더 치밀하게 옭죄는 이런 장벽마저도 사라진 캠퍼스인데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지금 눈에 보이지 않게 곳곳에 쌓여 있는 이것들이 다 사라지는 것이? 회의적인 생각도 드는 요즘입니다.”

[리플합시다]18대 국회에 장애인 국회의원에 바란다

*예다나 기자는 ‘장애 경력18년’을 자랑하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입니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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