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진 시인은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후로 시인으로서의 삶을 개척해나갔다. ⓒ김옥진

깊은 장애를 껴안고 살아온 이들에게 김옥진 시인의 존재는 등불이 되어 주었다. “조금 아프면 울지만/많이 아프면 울지 못합니다/조금 아프면 죽음도 생각하지만/많이 아프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시 ‘조금만 아팠으면’ 중에서)” 홀로 흘리는 눈물도 시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에 그녀의 시를 외며 습작을 하는 장애인들이 늘어났다.

간간히 시집과 동시집을 내는 외에 침묵하며 지내온 탓인지 작년에 그녀는 표절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어느 대학교수가 그녀의 시 ‘기도’를 고쳐 자신의 시로 발표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애송되고 있는 그녀의 시보다도 더 씩씩하게, 열심히 살아온 김옥진 시인. 좀처럼 소식이 알려지지 않은 그녀에게 전자메일을 통해 안부를 물었다.

-‘산골소녀 옥진이’ 시집은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10년쯤 흘렀나요?

“시집이 나온 게 1987년이니까 20년이 지났네요. 몇 부 팔렸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100만부 쯤 팔렸을 거라고들 합디다. 지금은 제가 살아있는지 조차 모를 만큼 잊혀진 일이 되었나 봅니다. 이렇게 잘 살아있는데 말에요. 작품 활동도 왕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시집도 8권이나 발간했으니까요. 열심히 바르게 사는 것이 사실 더 중요하지요.”

-시집 덕분에 늘 산골소녀라는 풋풋한 이미지로 기억되거든요. 고창에 사셨던 걸로 아는데요.

“그 당시 바로 상경했으니 서울생활도 20년이네요. 부모님과 세 식구가 서로 기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산골소녀가 아닌 김옥진 시인으로 인정받고 싶지요.”

-여고 2학년 때 고창 성벽 밟기를 하다가 낙상했다고 소개되었는데요.

"학교 캠퍼스가 성곽이다 보니 늘 접하는 곳이라서… 실족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사진찍다가… 모양성은 사적지입니다. 모양성에 대한 거부라든지 기억하고 싶지 않다든지 그런 것은 없고 아름다운 모교의 캠퍼스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텔레비전에서 재연 드라마로 소개된 것을 봤거든요. 시골집 창호지문을 열고 엎드린 채 방밖을 내다보는데 빗줄기를 뚫고 집배원이 편지를 한아름 배달해 주는 장면. 아직도 선한데요.

“시골 정취가 다 그렇지요. 아기자기한 목가적인 풍경이지요. 하지만 가난도 동반하여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특히 식구가 많으면 더 그렇고요. 꽃을 좋아해서 부모님이 집 주변에 꽃을 많이 심어서 꽃과 동무삼아 살았지요. 가난도 지나고 나니 추억이 됩니다.”

첫 시집 ‘산골소녀 옥진이’는 94년 2집까지 발간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사사연

-장애문인들이 꼽은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장애문인 중 한 분인데요. 글 쓸 때 펜을 쥐는 자세라든가, 어디서 시의 소재를 얻는지 이런 소소한 정보 좀 나눠 주세요.

“경추 5, 6번 신경마비(척수장애)로 손가락도 부자유스러워 볼펜사용은 못하고 사인펜으로, 젓가락 대신 포크를 사용한답니다. 컴퓨터 자판 두드릴 땐 검지에 원통모양을 끼워서 독수리 타법으로 씁니다. 생활은 주로 침대에 누워서 하고요. 최선을 버린 게 아니라 차선을 최선으로 뒤집은 거죠. 절망이 없었던 게 아니라 절망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거죠.

중도장애인들은 절망의 시간이 길거나 그대로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일어서야 한다는 겁니다. 일어서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니까요. 쓴맛 없는 단맛이 어디 있습니까.

20세 때 다쳤으니 20년은 활동적으로 살았고, 지금은 시인은 삶을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라 한계를 느끼지 못해요. 어떤 소재도 끌어다 쓰면 시가 되는 것입니다. 육체는 정신을 뛰어 넘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까요.”

-8권이나 되는 시집과 동시집 속에 담으려고 하는 것은 어떤 걸까요? 20여년 작품을 써오면서 작품 세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라고 말하고 싶고, 어렵고 힘들고 벅차더라도 살아있는 까닭이니 받아들이고 함께 가자고 외치고 싶습니다.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에게… 끝 날까지 삶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작년에 표절 사건으로 맘고생을 하셨죠.

"지난 일이니 잊고 싶네요.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 되뇌고 싶지 않습니다. 그 분도 용서를 빌었기에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사랑 가꾸기’라는 모임을 만들어 나누는 삶을 사신다고 하던데요.

"18년 전에 몇몇이 함께 시작했는데 지금은 거의 혼자 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회원들이 없으면 못하는 일이지요. 처음엔 소년소녀 가장 돕기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정부 손길이 닿지 않고 자식들도 외면한 독고노인을 비롯해 어려운 불우이웃으로 문을 넓혔습니다. 후원회원들이 매월 1천 원 이상 송금해 주시면 그걸로 현재 35세대를 매월 7~10만원씩 지원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도 3세대 있습니다. (추천만 받습니다.)"

-시인이 되고픈 장애인들이 참 많아요. 어떻게 해야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누구나 말하는 한마디를 나도 해야겠네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보고, 항상 사물을 관찰자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사다리 없이 하늘의 별을 따오는 법을 알아야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하고 싶네요. 시를 사랑하고, 시에 대한 열정이 시를 쓰게 되고 시는 살게 되는 겁니다. 시에 목숨 걸 필요는 없습니다. 생활의 일부로 삼으면 되니까요."

-더 많은 장애인들이 활발히 창작활동을 하기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첫째는 본인의 열정과 끼라고 할 수 있고 나머지는 정부지원도 필요합니다. 본인들도 쉼 없이 문을 두드려 멈추지 않는 흐름의 물꼬를 터야하는 일, 자기 자신의 몫인 것입니다. 자기 삶이니까요. 문학을 하고자 하는 장애인들은 문학이 세상으로 나가는 디딤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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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합시다]장애인들은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에게 이것을 바란다

*예다나 기자는 지난해 에이블뉴스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올해부터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장애인당사자입니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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