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는 미소가 닮았다. 언니 혜진씨(왼쪽)는 청주에, 동생 은진씨는 독일 일메나우에 살고 있다. ⓒ김은진

“후회는 언제나 그런 때였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던 그 때. 최소한의 조건이 주어졌을 때가 가장 최적의 조건. 최악의 조건이야말로 우리에겐 최상의 조건이 될 수 있다.”

독일 중부 도시 일메나우에 사는 김은진씨는 그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여행 일정표를 꼼꼼히 짰다. 무엇보다 장애인용 객실이 있는 숙소를 잡는 데 신경을 썼다. 체코 프라하 2일, 독일 에르푸르트 2일, 드레스덴 2일, 일메나우 3일. 휠체어를 타는 언니와 동행한 열흘간은 그들이 돌아볼 여행지의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정보를 채집하고 몸으로 확인해 보는 기회가 됐다.

자발적으로 보내온 은진씨의 이메일을 통해 그들의 행복했던 여정을 따라가보자.

- 얼마 전 뜻 깊은 유럽여행을 하셨다고요.

“네. 언니를 독일로 초대해서 독일과 체코 프라하 지역으로 열흘 동안 여행을 다녀왔어요. 휠체어를 끌고 하는 여행이라 아주 각별한 경험이었지요. 언니는 6년 전 자전거 추락 사고로 경추를 다쳐서 중도 장애인이 되었어요. 경추 3, 4, 5번을 다쳤는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희 언니의 경우는 불완전 마비이긴 하지만 전신마비 상태라서 혼자 할 수 있는 건 사실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3년 전, 희망 재활원에 들어간 후 후원 담당하는 일을 맡아서 열심히 컴퓨터 좌판도 두드리고, 전화도 받고, 봉사자들을 상대하는 등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는 듯 해요.

전 언니를 3년 동안 만나질 못해서 그 동안 많이 보고 싶어했는데요. 그래서 언니와 도우미로 같이 와 줄 주희씨를 독일로 초대했답니다. 처음 생각엔 제가 사는 곳에 며칠 머물다 가면 좋겠다 싶었지만 이왕 온 건데, 함께 여행을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열흘 동안 빡빡한 일정으로 그야말로 휠체어 강행군을 시도했지요.”

- 언니가 장애가 심한 편에 속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물론 있었죠. 중증 장애인이 떠나는 여행이 쉬웠을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여행이란 부딪히면서 해야 매력이 있기 때문에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대신 신중할 필요는 있죠. 언니와 제가 제일 걱정했던 건 언니의 몸이 과연 12시간의 비행을 견뎌줄까 하는 거였습니다.

청주에서 새벽에 출발해서 독일에 도착하는 데 장장 20시간 가량을 휠체어에 앉아서 와야 하니까 저희는 욕창이 정말 걱정이 되었거든요. 만에 하나 이번 여행으로 욕창이 생긴다면 후유증이 감당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어요. 장시간의 비행으로 욕창만 걸리지 않는다면 다른 어려움은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고 믿었고요. 저희는 그 동안 언니가 아직 한 번도 욕창에 걸린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만 믿었죠. 제 경험상 여행에서 겪는 다른 어려움들은 오히려 여행 이후 추억거리가 될 수가 있거든요.”

은진씨가 살고 있는 튜링에야 숲속을 함께 산책하는 두 사람. 휠체어를 끌고 가는 숲길엔 이두박근이 필수품! ⓒ김은진

- 결국 욕창은 안 걸린 거죠?

“네, 다행히 아무 문제 없었어요.”

- 일정을 짤 때 고려한 점들은 어떤 건가요?

“어떤 여행이든 가장 고려할 점은 딱 세 가지 입니다. 돈, 건강, 시간! 이 세 가지가 어떤 식으로 주어지냐에 따라 여행은 전혀 다른 색깔을 띠게 되지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우선에 둬야 할 것은 건강이었습니다. 보통 때는 돈이었는데 말이죠. 하하. 평소 욕창과 예고 없는 설사의 공포에 시달리는 언니인지라 만약의 경우에 빠르게 대응하려면 숙소가 관광지와 최대한 가까워야 했어요. 물론 숙소 또한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방을 잡아야 했죠. 여행지와 여행지 사이의 이동 구간을 비교적 짧게 잡았고, 기차와 지하철의 리프트 이용 방법, 장애인석 예약 등을 미리 알아보는 등 저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어요.

전 사실 무대포식의 배낭여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 보고 느끼고 만나면서 악조건이야말로 최적의 조건이라고 여기는 배낭족. 그게 제 스타일이죠. 60대인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 그리고 남편 이렇게 넷이서 6주 동안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난 적도 있어요. 그때 전 아무 것도 고려하지 않았어요. 배낭여행이니까 배낭여행 식으로 해야 한다고 믿었고 정말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행군을 하며 여행을 시켜 드렸죠. 하하.

독일사람인 남편 쪽과 한국 토박이인 우리 어머니랑 저. 언어도 음식도 장벽이 될 수도 있었지만 여행의 재미로 알고 제 스타일대로 밀어붙였죠. 두 분 어머니 모두 어느 때는 극단의 한계를 느끼셨고 폭발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여행 이후에는 두 분 모두 그보다 좋은 여행은 없었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천만 다행이었죠. 하지만 이번 여행은 제가 배려를 많이 했어요. 중증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제가 인간이 아니죠. 하하.”

- 그러면 예정대로 일정이 착착 진행되었나요?

“네, 독일의 경우 대체로 예상한 대로 진행이 되었어요. 독일 사회가 대체로 철저하게 계획대로 움직이는 곳이라 사전 계획만 잘 짜면 휠체어 여행에 큰 문제는 없거든요. 기차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장애인석이 따로 있어 예약을 해두면 되고, 기차 리프트도 미리 신청을 하면 역무원들이 대기해서 기다렸다가 태워주고 내려줍니다. 대신 새벽 기차와 밤 기차를 이용할 때는 리프트가 운영이 되지 않더라고요. 급하면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휠체어를 덜렁 들어올리면 되기 때문에 그것도 큰 문제거리는 될 게 없었어요.

문제는 동유럽인 체코의 프라하로 향하는 기차에서 일어났어요. 저희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프라하로 들어갔는데 장애인석을 미리 예약할 수가 없었어요. 드레스덴 현지에 가면 예약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드레스덴 기차역으로 무작정 떠났지요. 도착해서 알아본 결과, 프라하로 향하는 기차가 독일 기차가 아니라면 장애인석이 아예 없다는 거였어요. 기차를 타긴 타야겠는데 휠체어가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다니 난감하더군요. 그러다 그 기차 내부를 잘 아는 역무원 한 분이 통로에 휠체어가 들어갈 자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라도 달라고 했죠. 그래서 올라타보니 냄새 꼬리꼬리하게 나는 화장실 바로 앞의 통로였지요. 그래도 다행이었죠. 기차에 올라탈 수 있었으니까요.”

20시간 비행 끝에 독일 도착, 곧바로 동생와 합류해 떠난 체코행에서 언니 혜진씨와 주희씨(오른쪽)는 시차적응은 남의 일이란 듯 씩씩하기만 했다. 프라하의 시계탑 앞에서. ⓒ김은진

- 동유럽 지역은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돼 있지 않다고들 하던데요. 독일과 비교해서 어떤가요?

“저희는 동유럽 중 프라하만 갔다 왔으니 체코 프라하 쪽만 얘기해 드릴께요. 독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장애인 편의시설이 낙후되어 있는 건 사실이에요. 체코 기차역에는 리프트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고, 지하철의 경우엔 몇 곳에 리프트 시설이 되어 있다고는 하는데 현지 장애인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어요. 독일 대부분의 주요 관광지에 최신 리프트 시설이 되어 있는 반면, 프라하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호텔의 경우도 휠체어가 들어가긴 했지만 장애인 전용으로 만들어진 방은 아니었어요. 독일엔 장애인 전용으로 화장실과 욕실 등 부대시설이 되어 있는 방이 다 따로 있거든요. 또 독일엔 작거나 크거나 큰 도시마다 ‘유겐드 헤르 베르거’라고 하는 유스호스텔 형식의 저렴한 숙소가 있어요. 보통 정부의 보조를 받아서 운영을 하는데요. 대부분의 유겐드 헤르 베르거에는 장애인용 숙소가 있더라고요. 제가 사는 도시는 인구 3만 명의 작은 동네인데도 대부분의 큰 호텔과 유겐드 헤르 베르거에 휠체어용 방이 따로 있어서 저도 놀랐어요. 역시 잘 되어있군, 하면서요.

하지만 프라하의 경우도 그렇게 낙후되었다고 볼 순 없는데요. 휠체어가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적어도 도로의 턱은 다 깎여져 있거든요. 한국에서 휠체어를 끌고 다닐 적마다 도로의 턱 때문에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 저는 그런 것들이 눈에 띄던걸요. 참, 프라하 도로가 모자이크식으로 울퉁불퉁해서 휠체어가 엄청나게 덜컥거리긴 했어요.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장 운동이 안 되어 고생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우리 언니도 하루 종일 덜컥거리면서 다니다 보니 대신 뭐 장 운동 하나는 기가 막히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엔 이런 것도 좋은 점이 있다면서 웃어넘기게 됐죠.

독일 호텔은 다 좋은데, 장애인용 객실의 문제점을 꼽자면 화장실이 다리가 덜렁 들릴 정도로 높다는 것 정도랄까요. 숏다리인 한국인이 사용하기엔 불편했어요. 하하. 욕실도 모두 의자식으로 되어 있어 침대식에 익숙한 언니가 사용하기에 불편하기도 했고요. 그러고 보면 뭐든 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것 같아요.”

프라하의 길은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이 깔려 있지만 가장자리가 깍여 있어 휠체어가 오르내리기에 불편하지 않다. 사방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고풍스런 풍경들. 휠체어 승차감은 나쁘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쯤이야! ⓒ

- 깜짝 놀랄 만큼 편의시설이 감동스러웠던 곳들 좀 소개해 주세요.

“깜짝 놀랄 만한 시설이라… 음, 독일 드레스덴이 기억나네요. 렘브란트와 라파엘로 등 옛 거장들의 그림을 보려고 드레스덴미술관(Gemldegalerie Alte Meister)에 들어갈 때였어요. 리프트가 있다는 곳엘 가보니 아무리 눈을 뜨고 봐도 리프트가 보이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재차 확인해보니 아니 글쎄, 담당자가 버튼을 누르니까 리프트가 땅속에서 서서히 솟아올라오는 거 있죠.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고 리프트를 그렇게 설치했더군요. 전시장 내부에 계단이 있을 경우엔 작은 리프트 시설이 따로 되어 있어서 휠체어 사용자라도 어느 전시관이든 구경할 수 있게 해놓은 것도 감동적이었고요. 드레스덴 관광 안내소에서 휠체어 사용자용 팜플렛을 따로 받았는데, 거기엔 장애인용 주차장, 호텔 그리고 관광지의 리프트와 화장실 사용 여부 등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어서 인상적이었어요.

참,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 있는 화장실도 특이했어요. 기차역 선로 바로 옆에 장애인용 화장실이 하나 있었는데 벨을 누르니 사람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열어 줄 테니 들어가라길래, 전 그 안에서 사람이 지키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나 보다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벨 소리를 듣고 다른 곳에서 화장실 문을 자동으로 열어주게 되어 있는 거였어요. 선로 옆이라 화장실이 있을 자리가 아니었는데, 일반 화장실은 없어도 장애인용 화장실은 있는 걸 보고 독일인들 특유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을 좀 먹었지요.” (계속)

드레스덴미술관의 비밀! 장애인용 리프트는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게 땅에 묻혀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솟아오른다. 유쾌하고 신기해서 일행은 리프트 안에서 마주보고 웃었다. ⓒ김은진

*예다나 기자는 ‘장애 경력 18년’을 자랑하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입니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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