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본부에 나부끼는 유엔 깃발 ⓒPixabay

2006년 12월 13일, 장애인권리협약이 유엔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지 2년 만에 우리나라는 권리협약을 비준했다. 하지만 선택의정서는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선택의정서에는 개인진정제도와 직권조사 제도가 기술돼 있다.

개인진정제도는 장애인이 권리침해를 당해 국내의 모든 법적, 행정적 절차를 거쳤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경우, 유엔에 진정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직권조사는 진정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조직적이고 구조적이고 중대하면서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었음을 장애인권리위원회가 인지했을 경우 위원회가 인권침해가 있는 나라에 가서 조사하는 제도를 말한다. 직권조사 시 당사국과의 협조는 있어야 한다.

2014년 10월, 장애인권리위원회의 최종권고가 있었지만, 강제력이 없는 데다 정부가 장애 인식이 낮아 권고를 지금까지 잘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장차법의 경우, 전과 비교해, 악의적 차별 요건이 조금 완화되긴 했으나 여전히 엄격하긴 마찬가지다. 시정명령 요건도 엄격해 최종권고 이후 단 한 차례의 시정명령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협약이행을 통해 국내 장애인 인권 증진에 도움이 되는 선택의정서는 권리협약 25조 마호 생명보험 관련 유보조항으로 인해 비준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국내에서 인권침해 미해결 시, 유엔에 진정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것이다.

선택의정서 비준하면 유엔에 진정할 수 있게 되고, 결국 국내의 법, 정책 등의 개선에 도움 되는 계기를 만드는 거다. 선택의정서 비준한 나라의 경우, 정부에서 국가보고서 작성할 시 진정사건의 해결 과정과 이에 대한 정보 등을 보고서에 반드시 명시할 것을 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장애계는 12년 동안 선택의정서 비준을 요구했었지만, 정부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비준을 유보했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선택의정서를 비준하겠다고 보건복지부에서 얘기가 나왔지만 이후 1년 동안 비준에 관한 논의는 없었다. 그 이면에는 선택의정서를 비준하면 개인 진정이 많아질 것을 우려해서일 것이라 본다.

그리고 장애인 당사자의 선택의정서 비준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 그래서 장애인 당사자가 선택의정서 비준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정부가 비준으로 갈 수 있는 동기를 얻도록, 장총련과 NGO연대, 약자의 눈, 이종성, 최혜영 의원 등이 선택의정서 비준 필요성에 대한 논의의 장을 비대면으로 2번 마련하게 되었다.

발리더티 재단의 Steven Allen 공동대표가 선택의정서 상의 직권조사를 활용한 헝가리에서의 인권침해 조사 사례에 대해 'UN CRPD선택의정서 비준 촉구 및 실효성 강화 국제포럼'에서 발표하는 모습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이에 필자는 유투브를 통해 시청하며 여러 내용을 듣게 되었고, 그중에서 관심을 가지며 들은 것은 시설 인권침해로 인해 선택의정서에 기반한 직권조사를 헝가리가 활용한 사례였다. 조금 길어질 수 있으니 양해 바란다.

3년 전, 국제 비영리 기구인 발리더티가 수도 부다페스트 외곽에 있는 토파즈 복지시설에 거주하는 성인, 아동 장애인 220명이 고문, 학대를 당했다는 내용을 폭로했고, 관련 상황의 심각성이 국내외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헤드라인을 장식했단다. 이 단체는 토파즈 시설이 EU 구조투자기금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추가로 밝혔단다.

결국, 정부 전략이 권리협약 정신에 어긋남을 알게 된 발리더티는 선택의정서 하에 수립된 직권조사제도를 통한 장애인권리위원회의 개입을 요구하게 되었고, 위원회는 실제로 2019년 초, 헝가리에 위원들을 파견해 정부 당국자, 시설 거주 장애인 당사자와 시민단체, 민간법률 단체 등을 만나며 인권침해 증거를 수집했단다.

그 와중에 발리더티는 헝가리 법, 정책, 관행 안에 사법제도, 노동시장 접근, 일반 공공 서비스의 이용 가능성 등 다양한 공공생활 영역에서 구조적 차별이 조직화되는 다양한 차별적 조항을 담고 있다는 점, 부실한 장애인 가족지원 공공정책 프레임워크 등을 지적했다고 한다. 지역사회에 이용 가능한 자원 부족으로 가족지원이 부실하고, 이는 장애아동을 시설에 위탁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거다.

게다가 후견인 제도가 조력의사결정 시스템으로 바뀌는 대신, 후견 대상이 되는 장애인 수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고, 장애인은 의료적 판단에 따라 지속적으로 후견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말했다.

발리더티의 권익옹호활동과 유럽 자립생활 네트워크, 헝가리 시민자유연맹의 활동, 그리고 장애인권리위원회의 직권조사까지 함께 했다. 결국, 장애인권리위원회는 헝가리에서의 후견인 제도와 시설화는 정신적 장애인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장애인에게 불리하게 영향 미치는 법, 정책, 관행 등에서 유래된 조직적 권리침해의 면이 헝가리에 존재한다는 점 등을 지적하기에 이른다.

이에 장애인권리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것을 헝가리 정부에 권고했단다.

1) 후견인 제도 철폐와 후견인 보호의 대상인 모든 개인의 법적 권한 회복을 요청하기 위한 헝가리 민법의 개정 필요성이 담긴 행동계획 제시

2) 시설 자금 지원 중단, 지역사회 기반 및 직접 지원 형태의 예산 재배정 등 정부가 진정으로 조력과 활동 보조인 제도의 수립 및 시행에 우선순위를 둘 것

3) 그룹홈 등 신규 소규모 시설 건립 등에 유럽구조투자기금 재정지원 중단 등 장애인의 분리와 고립을 유지‧확산시키는 정책을 철폐할 것

지난 6월 경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의 3개 단체에서 포항 소재 A 공동생활가정에 거주하는 장애아동 감금·학대한 사건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모습. ⓒ에이블뉴스DB

이런 내용을 들으며, 우리나라에도 헝가리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일단 2017년부터 3년 동안 시설에 지원된 예산이 +2.7%의 증가율을 보였고, 중증장애인과 지적장애인 시설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고 있다.

그룹홈 등 소규모 시설 정책을 추진한다지만, 포항 그룹홈에서 장애아동을 학대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룹홈이라 해도, 개인의 선택권이 박탈되는 환경 속에 시설 특성이 나타난다면 장애아동 학대가 발생할 수 있음을 포항 그룹홈의 경우에서 알 수 있었던 거다. 그룹홈이라는 신규 소규모 시설에 재정지원이 있었기에 이런 일까지 가게 되지 않았을까?

가족지원도 장애아동을 원 가정에서 양육하는 것보다 입양했을 때의 지원 양이 훨씬 많은 등 가족지원체계는 부실하다. 이 때문에, 장애아동을 시설에다 내다 버리는 부모들이 많아지고 있다. 정부가 부모들을 몹쓸게 만들고 있다. 부양의무제가 전면적으로 폐지되지 않음으로 인해 장애인과 그 가족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조력의사결정제도가 부재하고 성년후견이 후견 유형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실 또한, 장애인의 법적 권한이 부정당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정부에선 피후견인 의사 반영해야 한다는 법조문을 들어 성년후견제도가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피후견인의 의사를 확인하기 어렵단 이유로 무시하기 일쑤다. 구체적인 피후견인 의사 확인 절차마저도 없다.

이렇게 정부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게 법과 정책, 관행 속에 구조적으로 뿌리박혀 있고, 조직적이며, 심지어 심각하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도 가족지원은 부실하며, 조력의사결정제도는 부재하며, 장애인 거주시설 인권침해 실태조사는 정기적이지도 않고 종합적이면서도 체계적이지도 않다.

이렇게 조직적이면서도 심각하고 구조적인 차별이면 선택의정서 상에 있는 직권조사제도 대상이지 않은가?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장차법까지 실효성이 거의 없는 마당이니 선택의정서 비준의 정당성은 우리나라의 현실만 봐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선택의정서 비준 시 개인진정은 인정하지만, 장애인권리위원회의 직권조사는 회피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있다. 그렇게 되면 시설 인권침해와 같이 조직적, 구조적이면서 중대하고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선 정부가 회피하는 경우 위원회에서 조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증장애인과 정신적 장애인 삶의 피폐한 상태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지난 9월 24일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 선택의정서 비준 촉구 및 이행 강화 방안 마련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한 모습 ⓒ복지TV 유투브 캡처

직권조사 없는 선택의정서 비준은 대한민국이 인권 이사국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오히려 선택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보통은 직권조사까지 포함해 선택의정서를 하는 나라들이 많다.

자기옹호가 많이 필요한 중증장애인과 정신적 장애인의 인권까지 증진하는 거라면 직권조사까지 인정한 선택의정서 비준 입장을 장애계와 장애인 당사자, 시민단체, 장애인 비례대표 등은 반드시 고수해야 한다. 그런 선택의정서 비준을 위해 이들은 이해당사자인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심지어는 성년후견제를 찬성하는 부모들 등과 앞으로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고 본다.

언론과 우리 사회에도 선택의정서 비준에 대한 이유와 당위성을 알리도록 장애계와 시민단체 등에서 효과적인 전략으로 나서야 함은 물론이다.

아울러, 권리협약 이행과 관련된 체계적 모니터링이 부재한 현실에서 벗어나 정부가 독립적 모니터링 체계를 가져야 한다. 장애인권모니터링센터를 별도의 독립적 기구를 포함한 체계로 두고 장애인이 주체가 되어 모니터링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이의 한 일환이 될 것이다. 또한, 모니터링은 정기적으로 해야 한다.

1주 전, 논의가 끝나가는 무렵, 보건복지부에서는 선택의정서 비준을 서두르겠다는 말을 했다. 고무적이긴 하나, 이 말이 허언으로 끝나지 않도록 앞으로 보건복지부의 행보를 주의 깊게 지켜보겠다.

헝가리의 경우처럼 우리나라도 직권조사 있는 선택의정서 비준 후 독립적 모니터링과 직권조사를 통해 장애인을 차별하는 법, 제도, 정책, 관행들이 인권기반으로 꾸준히 변화하는 게 현실이 될 수 있도록. 그것이 결국엔 정부에게도 인권 이사국이라는 위치에 걸맞게 되는 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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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팝송 감상, 월드컵 등을 즐기고 건강정보에 관심이 많은 반백년 청년이자, 자폐성장애인 자조모임 estas 회원이다. 전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정책연구팀 간사였으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을 위해 민간대표단의 일원으로 2번 심의를 참관한 경험이 있다. 칼럼에서는 자폐인으로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장애인권리협약, 장차법과 관련해 지적장애인, 자폐성장애인과 그 가족이 처한 현실, 장애인의 건강권과 교육권, 접근권 등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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