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애 아들과 비장애 딸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마트에 다녀올 때면 셔틀버스에서 잠든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10키로그램이 넘는 장바구니를 손에 움켜쥐고 걸었다. 놀이터에서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큰 아이를 좇노라면 그 와중에 작은 아이가 그네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했고, 작은 아이를 돌보는 사이 쏜살같이 찻길 쪽으로 사라진 큰 아이를 찾아 헤매야 했다.

간혹 지인들이 집에 들르면 밥상 위를 덮치는 아이를 피해 일어선 채로 물 한 잔 대접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아이의 호기심으로 집안의 모든 전기제품들이 해체되고 벽지와 장판이 찢어진 것을 보고 당황과 동정, 때로는 지적과 비난까지 하는 이웃들을 흔쾌히 맞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밤과 낮을 구분 못해서 새벽에 일어나 쿵쿵거리며 밖으로 나가자고 고집했고, 한 번 시작된 울음은 30분이 넘도록 이어져 뼈마디마다 피멍이 들도록 바닥에 뒹굴고 몸부림치며 진이 다 빠져서야 그쳤다. 대낮에 큰 길 가운데서 울음이 터져 뒹구는 아이를 달래다보면 묶은 머리채가 산발로 헝클어졌고 찻길 쪽으로만 가지 않도록 막고 앉아 울음이 그치기를 망연히 기다려야 했다. 그럴 때 지나가는 행인들의 수군거림, “쯧쯧, 엄마가 애도 안달래고 뭐하나”라는 소리를 들을 때면, 그 순간 지진이 나서 갈라진 땅 속으로 아이와 둘이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바랐다.

남편은 회사에서 한창 바쁠 때였고 집에 오면 흙빛으로 일그러져 있는 아내의 얼굴을 피해 퇴근시간을 점점 더 늦추어갔다. 시부모님은 손자의 장애를 종교적 열심으로 치유하자며 훈계의 짐을 더하셨고, 친정부모님은 자폐증이 무언지도 모르셔서 딸의 힘듦을 엄살로 여기고 더 강한 책임만을 강조하셨다.

나 또한 그런 줄 알았다. 내가 태교를 잘못했던 걸까, 어릴 적부터 군것질을 많이 해서 내 체질이 나빴던 걸까, 술담배도 안했는데 즐겨마시던 커피가 원인이었을까 싶기도 했다. 내가 인성이 모자라서 이렇게 힘들고, 신앙이 약해서 이런 고통을 겪는 건가 자책했다. 그러면서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곤 했고, 길을 걸으면서도 울컥 터지는 눈물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두려웠고, 세상의 비난이 쏟아지는 바깥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 진료 차 다니는 소아정신과에 남편이 시간을 내어 함께 상담을 가게 되었다. 남편은 아이 문제를 이야기하다 지나가는 말처럼 질문했다.

“집사람이 스스로 우울증인 것 같다고 자꾸 말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남들보다 좀 예민한 것 같아요.”

“장애아를 키우는 모든 어머니가 우울증을 겪게 됩니다. 모르셨나요? 아버님께서는 하루에 몇 시간이나 아이를 떼어서 아내를 쉬게 해주십니까?”

의사의 그 한마디에 남편은 충격을 받은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날 남편은 시부모님께 며느리가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상태인지를 알렸고, 정년퇴직 후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시던 두 분은 우리집 가까이 이사를 오셔서 매일 두 세 시간씩 큰 아이를 데려가 돌봐주기 시작하셨다. 시부모님은 아이의 울음을 달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아셨고, 남편은 잠시도 손을 놓을 수 없는 아이를 처음으로 홀로 겪어보게 되었다. 그 이후로 가족들은 내게 어떤 훈계도 조언도 하지 않았다. 오직 쉬라고만, 먼 친구라도 만나서 놀다 오라고만 말씀하셨다.

아들의 그림 '치료실 가는 길'. ⓒ김석주

'쉼'

이제는 청소를 하든 빨래를 하든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시장을 볼 때 천천히 물건을 고를 수 있었고, 일어서지 않고 끝까지 앉아서 밥을 먹고 마음 편히 커피까지 마실 수 있었다. 그저 아이 둘 양손에 이끌려 휘청거리지 않고 홀로 길을 걸을 수 있음이 좋았고, 동네 옷가게를 몇 군데나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좋았다. 누구를 만나거나 특별한 외출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혼자 바람결을 느끼고 햇살 아래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 편안하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힘'

그제서야 아이의 사랑스러움이 다시 생각났다. 긴 울음이 그친 후 마알간 얼굴로 품에 안기던 측은함, 세상의 언어를 이해하지도 말하지도 못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싶은 안타까움, 금지와 복잡한 규칙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영문도 모르고 받는 억압들, 그 고통들이 하나하나 헤아려졌다.

그때부터 틈나는대로 책과 인터넷 정보와 선배부모들과의 교류를 통해 아이의 문제들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강박적 행동을 부드럽게 완화시킬 여력이 생겼고, 낯선 상황에서 나타날 패닉을 예측하고 점차적으로 접근시킬 방법을 알게 되었다. 금지보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영양과 체력관리, 다양한 시도들을 지치지 않고 해낼 수 있었다.

'꿈'

10년 전부터 시행된 활동보조서비스를 통해 아이는 가족을 넘어 다양한 타인과 적응해나갔고, 나는 내 경험을 토대로 다른 장애아와 어머니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홀로 질 때는 탈진하게 되지만, 여러 명이 나눠질 때에는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 됨을 알게 되었다. 즉 장애가 개인의 짐이 아니라 사회적 지원으로 적절히 나눠질 때 구성원 전체를 건강하게 성숙시키는 긍정요인으로 바뀔 수 있음을 경험하였다.

나는 이렇게 가족의 지원과 복지서비스를 통해 쉼을 얻고 살아갈 힘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자녀가 스무 살, 서른 살이 넘어서도 ‘쉼’을 얻지 못한 가정들이 아직도 주변에 남아있다. 주간보호센터에서 거부 당하고 활동보조인도 외면하여, 오갈 데 없이 퇴행하는 성인장애자녀를 감당할 ‘힘’을 내지 못하고, 벼랑 끝에 몰린 가정들이 있다.

단순 지적장애인 위주의 보호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주간보호센터나 의사소통 가능한 신체장애인의 이동을 돕는 수준 정도의 활동보조서비스로는, 정작 가장 열악한 중증발달장애인은 오갈 데 없는 사각지대에 방치될 수 밖에 없다. 개별적 치료와 재활을 병행할 수 있는 전문적 인력이 각 서비스 영역에 동반배치되거나 별도로 구성되어야만 벼랑 끝에서 탈진하는 그들을 일어서게 할 수 있다. 이들의 짐을 나눠지고 함께 걸어가는 건강한 사회를 나는 오늘도 꿈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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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 칼럼니스트 청년이 된 자폐성장애 아들과 비장애 딸을 둔 엄마이고, 음악치료사이자 부모활동가로서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을 만나고 있다. 현장의 문제와 정책제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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