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식을 때려서 숨지게 하고 은폐하는 사건들이 크게 보도되고 있다.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들이다. 그리고 뭇사람들은 계모나 친부 등 한 개인의 인성문제로 원인을 축소하여 분노하고 있다. 과연 한 개인, 한 가정의 문제일까?

계모가 들어왔고, 아이들과 갈등이 있었고, 친부는 야단쳤고, 아이들은 삐뚤어졌고, 갈등은 더욱 커져서 친척들 집으로 전전하며 매 맞고, 무서워서 도망 나온 아이를 이웃들은 부모의 마음이라며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리고 친부는 더욱 강한 ‘사랑의 매’로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갈등의 내용과 과정이 어떠하든 간에 계모와, 친부와, 친척과, 이웃들 간에 공통되는 하나의 인간관이 있다. ‘말 안 듣는 아이는 때려도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잘잘못은 일단 접어두고,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자. 말 안 듣는 아이에게 들었던 매가 과연 사랑이었는가? 고집 피우는 네 살, 욕심 부리는 일곱 살, 거짓말하는 열 살, 반항하는 열세 살, 질풍노도 열다섯 살, 따지고 덤비는 열일곱 살, 매를 들지 않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때가 언제일까? 그것은 아이의 나이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단 하나의 경우에 시도된다. 부모가 ‘사랑의 매’라는 관습 아래, 말로 가르칠만한 지혜를 가지지 못했을 때.

잠시 나의 가정을 이야기해보겠다. 내 아들은 타인의 감정도, 사회적 규칙도, 위험도, 더러움도 알지 못하는 중증의 자폐아였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아들은 가전제품의 전기선들을 자르곤 했다. 전화선, 선풍기선, 보일러 선까지 숨겨둔 가위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잘랐는데, 다행히 손잡이가 플라스틱이라 가윗날만 펑펑 터져서 날아갔었다. 한 정신과 의사에게 그 문제를 상담하니, 나쁜 행동을 할 때마다 손을 묶고 강하게 야단치라고 했다. 그 대처법을 미심쩍어 하면서도 나는 전문가의 의견이니 믿고 아이의 손을 묶어 강하게 통제하였다. 그러나 그 후 아이는 수건이나 끈만 보이면 자신의 손을 묶으며 혼란스런 정서를 보였다. 게다가 전기선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휴대용 오디오를 다 분해하고 남은 납땜 판을 콘센트에 꽂다가 손바닥에 작은 화상을 입었다. 아들은 그제야 벽 속에 뜨거운 불이 있고, 선을 통해서 이어진다는 설명을 알아들었다. 그 후부터는 코드를 뺀 후 선을 자르고 작동이 되지 않음을 확인했고, 구리껍질을 벗겨내고 검정테이프를 감아 다시 연결한 후에 불의 힘으로 작동된다는 원리를 이해했다. 아들의 행동은 나쁜 것이 아니라, 단지 전기의 원리를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었다.

그 외에도 아들은 차가 무서운 줄 모르고 찻길에 뛰어들기 일쑤였고, 밤낮을 몰라 한밤중에 깨어나 물놀이를 하고 밖에 놀러나가자고 고집했고, 쓰레기통에 대변을 보기도 했고, 거실의 벽지와 장판을 찢어서 자신이 원하는 모양들을 만들곤 했다. 이 모든 행동들에 매를 들거나 억압해서 고쳐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신체 나이는 열 살이라도 언어이해력과 사회성이 한 살 수준이면 그에 맞게 오감의 경험으로 위험과 더러움과 때와 장소와 규칙들을 백 번, 천 번 반복하며 인지시킬 수밖에 없다.

마트에서 유아완구 놀이를 즐기는 스무 살 아들. ⓒ김석주

이번엔 내가 치료하는 장애 아이들의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나는 지난 8년간 음악치료사로서 매일 다양한 유형의 발달장애 아이들을 만나오고 있다. 대소변 실수를 하는 고등학생도 있고, 감각결핍으로 자해를 하여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앉은 학생도 있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 물건을 던지는 아이도 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큰 키와 육중한 체구로 여자들의 상체를 툭툭 치고 다니는 남학생이 있었다. 첫수업을 하기 전에 그의 어머니는 “만만해보이면 자꾸 건드릴 수 있으니, 처음부터 무섭게 혼을 내주세요.”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그 날 나는 어리석게도 원활한 수업을 핑계로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줘버렸다. 수업 중 학생은 마주앉은 나의 가슴쪽을 순식간에 툭 쳤고, 나는 책상을 세게 쾅 두드리며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선생님을 치면 안 돼!” 그 순간 학생은 눈을 반짝 빛내더니 내 얼굴에 침을 뱉았다. 아뿔싸, 그제야 나의 무지한 대처가 그를 자극하였음을 깨달았다.

그 학생이 그동안 배운 것은 교육이 아니라 싸움이었다. 더 무섭고 더 센 사람만이 이기는 싸움. 학생이 건드리고, 상대방은 소리치고, 다시 학생은 침을 뱉고, 상대방은 멱살을 잡거나 더 강한 억압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싸움.

그래서 나는 곧 상황을 진정시켰다.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냉정하고 침착하게 자리를 옮겨 음악을 틀고 악기소리를 들려주며 새로운 상황을 제시했다. 학생은 기대와 다른 반응이 나오자, 갸우뚱하며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탬버린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학생의 팔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움직이며 수업을 이어나갔고, 열기가 가신 후 학생에게 악수를 제안하고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유쾌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손등을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며, 정확하고 다이나믹하게 “착한 손”이라고 칭찬 강화하였다.

그 후 3회기 만에 그 친구의 치는 버릇은 내 앞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적절한 강도로 악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손만으로 충분히 유쾌한 보상을 얻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타인을 건드리면 놀라고 아프다는 설명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불특정다수에게 공개되는 칼럼에서 발달장애인의 과민반응행동들을 적으려니 다소 고민이 되었다. 우리 나라 대다수 성인들이 발달장애인과 분리된 성장환경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학교와 직장, 문화시설 속에서 드물게 만나는 발달장애인들을 이상하고 위험하거나 또는 불쌍히 여기는 정도의 인식 수준이므로 혹시라도 나의 사랑스런 아이들이 또 다른 오해를 받을까 싶은 염려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가 말하랴. 집에서는 자폐 아들과, 직장에서는 수십 명의 발달장애 아이들과 종일을 보내는 내가 위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과 이웃과 사회로부터 무시와 억압과 폭력을 당하는 진짜 피해자는 이들임을 누가 대신 말해줄 수 있으랴.

지난 시간들 동안 수많은 발달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열 살, 스무 살이 넘어도 두세 살 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어떤 문제라도 억압과 분노로 개선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눈 앞에서는 잠시 공포심에 얌전해 보일지 모르지만, 납득되지 않은 모든 통제는 억울함과 혼란스러움으로 엉뚱하게 터져버릴 뿐이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너 그러면 매 맞는다.”라고 배운 아이들은 자신이 매 맞아도 되는 존재인 줄 안다. 그리고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때려도 되는 것으로 배운다. 아이들에게 신과 같은 무한신뢰의 존재인 부모와 교사들이 자신들의 무지와 비겁함을 감추려고 ‘사랑의 매’를 가장하는 순간, 이 사회의 폭력과 살인은 언제 어디서든 재현될 수 있는 악순환 속에 갇히게 된다.

‘사랑의 매’는 없다. 장애아이든 비장애아이든 바르고 건강하게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의 고백’ 뿐이다. 아이가 사고 칠 때마다, 아이가 고집 부릴 때마다, 그리고 거짓말하고 반항할 때마다 이렇게 고백하자.

“나는 네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두렵다. 그리고 너와 소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하지만 알고 싶다. 나는 말로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해하는 너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혼란스러워 하는 네가 보내주는 모든 힌트들을 찾아낼 것이다. 내가 끝까지 참아내어 너와 함께 문제를 푸는 순간, 그 때에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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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 칼럼니스트 청년이 된 자폐성장애 아들과 비장애 딸을 둔 엄마이고, 음악치료사이자 부모활동가로서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을 만나고 있다. 현장의 문제와 정책제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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