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최유림이 사는 세상(최유림 지음/ 둥지 펴냄). 이 책은 어린시절과 맹학교, 대학시절, 임용고시 준비 과정에서 겪은 21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둥지출판사

눈을 감는다. 그대로 걸어본다. 세 발짝쯤 떼고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캄캄한 눈 앞으로 거리의 소음이 달려든다. 가로수나 알 수 없는 무엇에 부딪혀 쾅 고꾸라질 듯한 두려움에 눈을 뜨고야 만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그들에게 다가가고팠던 시도는 이렇게 번번이 짧고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그런데 저 앞에 키가 크고 네모난 무언가가 휘황한 빛을 뿜으며 서 있었다. 나는 너무나 이상해서 그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빛을 내며 빙긋이 웃는 표정으로 서 있는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 크기와 빛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온몸으로 환한 빛을 내뿜으며 서 있는 기둥은 바로 음료수 자판기였다! 나는 자판기에 흠뻑 빠졌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시력 때문에 집 근처 유치원을 떠나 멀리 떨어진 시각장애아 유치원을 다녀야 했던 꼬맹이. 두려울 법한 나 홀로 지하철 통학을 지하철 탐험으로 바꿔버린 아이의 시선은 경쾌하다. 이 아이가 커나가며 겪는 일상들을 쫓아가다 보면, 눈으로 보는 사람은 너무 볼 것이 많아 흘려보냈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굳이 이 책의 부제를 달아보자면, 요즘 십대들 유행어를 써서 ‘최유림의 열공기’쯤이 어울릴까. 입시생이 아니라도 하버드대 합격기 류의 서적은 두루두루 독자층 넓은 서점가 인기물. 그렇다고 두 눈 성성한 독자들에게 시각장애인이 털어놓는 공부 비법 따위가 먹히겠느냐, 면박을 주는 이도 있을 법 하지만 지레 속단은 금물. 교과서만 팠다는 둥의 내숭 한 자락 깔지 않을 테니 책장이나 펼치시라.

손 글씨로 풀이 과정을 써내려갈 수 없어서 암산왕이 되어야 했던 수학. 어린시절, 어린이 회화 테이프에 재미를 붙인 이래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되어버린 영어. 실업계 고등학교와 비슷한 맹학교 체제에서 안마 실습 하랴, 대입 준비하랴 두 마리 토끼몰이를 해나가던 악전고투의 과정. 제한된 시험 시간, 들려주는 지문의 요점을 최대한 빨리 파악하려고 2배속, 4배속 듣기 연습을 거듭해 듣기 달인이 됐던 일.

물리지 않고 반복하는 끈기도 대단하지만 그만의 공부 방법이 기발하다. 그러나 정작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꿈꾸던 영어가 아니라 특수교육. 이 대목에서, 결과만 놓고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는 말자. 에둘러 돌아간 길, 부전공으로 택했던 영어가 전공을 제치게 된 것은 그의 의지가 낳은 행운이니까.

최유림씨는 천안두정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새내기 영어교사이다. ⓒ둥지출판사

진부한 말이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타 과의 학생을 영어과 임용캠프에 흔쾌히 넣어준 열린 사고의 스승을 두 사람이나 만난 것. 때맞춰 장애교사 의무고용이 시행되어 가장 먼저 신체검사의 철벽을 뛰어넘게 된 것. 이 모든 것은 준비된 그였기에 기회가 손을 내밀었던 것이고, 영어교사의 꿈을 접어야 했을 때도 그 꿈으로 향하던 노력까진 거두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얼굴 가득 돋은 빨간 여드름으로, 언뜻 어리숙해 보이는 최유림. 이 청년의 뚝심과 열정은 전염성이 있다. 만화책 넘기듯 훌훌 읽었는데 건설적인 도전 의식이 일어났다. 밀쳐놨던 영어공부를 시작해볼까. 그의 공부 방법을 흉내내면 뭔가 이뤄낼 것 같은 긍정적인 낙관. 나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전염될 것 같다. 시작해 보자. 할 수 있다. 활활 타는 의지의 불, 꺼지지 않는 끈기의 불로.

*예다나 기자는 ‘장애 경력 18년’을 최고의 자산으로, ‘장애인들의 생활과 문화’에 초점을 맞춰 정감 있는 기사 쓰기에 주력하고 있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입니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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