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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믿음에는 왕도(王道)가 없다 (롬 10:5-18)
카테고리 : ╁'성경강해 | 조회수 : 322021-09-10 오후 1:21:00

 

62강. 믿음에는 왕도(王道)가 없다 (롬 10:5-18)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의가 나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두 길이 있습니다.

즉 구원의 길이 둘이란 말입니다.

율법적 구원이 있고 은혜 구원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는 구원이 있고, 하나님이 거저 주는 구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구원을 율법으로 얻는 구원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거저 주는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죄인이라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미하여서 의인이라야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틀린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여기에 순순히 응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종교성은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고 합니다.

이게 바벨탑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벨탑이 뭔가요?

인간의 힘으로 하늘을 침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허무셨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누구인가요?

목이 곧은 백성이잖아요.

하지 말라고 해서 예~! 하고 안하는 족속들이 아니에요.

끝까지 반항합니다.

 

그 반항이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종교의 궁극을 구원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사상이 있습니다.



헬레니즘 사상과 히브리즘 사상입니다.

헬레니즘 사상은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고!

히브리즘 사상은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헬레니즘 사상은 인간이 신앙의 주체가 되어서 행사를 합니다.

이렇게 내가 주체가 되어서 신앙을 행사하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즘 사상은 하나님이 신앙의 주체가 되어서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신앙을 행사하게 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법에는 내 노력이 첨가가 되지만!

은혜에는 내 노력이 첨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내 노력이 첨가 되는 순간 은혜는 날아가 버립니다.

 

헬레니즘 사상과 히브리즘 사상에서 두 종교가 나옵니다.

하나는 신 중심의 기독교와 다른 하나는 인간 중심의 비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고 비 기독교는 행함의 종교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교가 있습니다.



자력으로 구원을 따내는 행위 종교와, 타력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 종교가 있습니다.

행위 종교란?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고.

은혜 종교란? 하나님께서 구원을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은혜 종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가 행위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데 반하여 이방 종교는 인간의 착함과 열심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이방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식의 율법 신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교회를 이방종교로 전락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열심만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엘리야 시대처럼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인데 말이죠.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나요.



어떻게 하나님을 바알로 둔갑을 시킬 수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백성들은 왜? 바알을 하나님으로 알고 따를까요?

이는 바알이 땅에 풍요를 주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땅에 복을 주는 신이고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신이십니다.

 

인간들이 관심사는 떡이지 언약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여호와는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은 언약의 민족입니다.

언약이 그들의 신앙 속에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위하여 선택을 입은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언약이 우선인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언약이 우선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보여 주셨어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 하실 때 제일 먼저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합니다.

그 시험이 광야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광야는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사십일을 주린 예수에게 마귀가 찾아옵니다.

 

찾아 와서 하는 말이 떡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나를 영웅 만들기 위함도 아니고 내가 사는 목적은 떡을 먹고 배불리 함도 아니다!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란? 창세전 언약으로 맺은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삶의 존재 목적을 자기가 사는 것에 두지 않고 언약을 이루는데 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신앙입니다.

우린 이 길을 가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물론 구약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지 않았어요.

언약 보다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의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바알 하나님을 섬겨야 떡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가 하면 열심히 충성해서 복을 받자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을 따내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고 있어요.

마치 군중들이 떡 주는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언약으로 생겨나고 언약으로 맺어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시대처럼 언약의 하나님은 사라지고 내 열심과 충성으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따 내는 식으로 신앙이 전도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아니고 절간입니다.

 

왜? 은혜를 증거하여야 할 교회가 행함을 강조할까요.

이는 이방 종교들처럼 행함을 가르쳐야 열심과 충성과 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열심과 충성과 돈을 쏟아내야 교회라는 조직이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포장만 교회이지 실상은 절간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당시의 유대교가 되고 말았어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이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자라면서 철이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철이 들면서 부모의 고마움을 마음속에 새겨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은혜는 사라지고 자기 자랑만 훈장처럼 쌓여가고 있으니 이를 어찌 하여야 할까요?

왜? 이런 현상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까요?

 

이는 인간의 욕망만 꿈틀거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처럼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교회의 터이고 교회를 유지하는 기둥인데 그 언약을 버리고 행함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조폭 세계와 같이 힘으로 다스려져가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왜? 교인들의 신앙이 이방 종교화 되어 갈까요?

 

이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이방 종교가 훨씬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능성을 부여하고 인간의 가치를 챙겨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있어요.

세상 종교는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요.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예전에 감리교 신학대학장을 지낸 변00이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구원을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으로 비유하면서 구원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겁니다.

마치 백두산을 올라가는데 중국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고 북한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듯이 구원을 받는 데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독선적으로 기독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건 너무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가 구원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기독교 이외도 구원의 길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종교 다원주의를 외치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인정을 해 주자는 겁니다.

다른 종교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넓은 아량으로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종교가 상생을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 좋은 말이지요.

스님들이 들으면 엄청 좋아할 말이에요.

성경을 덮고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면 충분히 그럴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 아담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열면 이러한 사고를 일언지하에 거부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마귀적 사고라고 합니다.

악이고 저주 받을 사고에요.



기독교는 독선적이에요.

예수 이외는 구원이 없다고 해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독교만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것입니다.

이건 당연한 것이에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이 이 욕을 안 먹으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타 종교도 인정하지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 다원주의로 나타나고 종교 통합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는 혼합을 부추겨요.

마치 포도주에 물을 섞어서 맛을 잃게 하듯이 해요.

진리를 훼손시킨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구원을 분리로 말하고 타락을 혼합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 5장을 보면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나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으로 번성을 하고 셋의 후손들은 별 볼일 없는 모습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힘이 너무도 부럽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누리는 땅에 일락이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이 땅의 백성과 하나가 되고 만 것입니다.

 

혼합입니다.

이걸 바벨이라고 합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면서 바벨론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궁창 아랫 물과 궁창 윗 물로 분리해 놓은 것을 섞어 버리는 심판을 단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름하여 노아 홍수 심판입니다.

 

이 때의 상황을 여호와의 신이 떠나 육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죄인의 본성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자기 삶을 도모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타락이고 저주입니다.

 

그러한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저주 받은 땅에서 수고롭게 사는 자기 백성들을 안위하고자 노아를 보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노아를 일컬어 안위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장차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안위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안위하는가 하면 한 사람을 보내서 하십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그 아들 안으로 자기 백성들을 끌어 들이게 하였습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구원을 해 내십니다.

이러한 것을 잃어버린 양을 목자가 찾는다고 합니다.

우린 잃어버려진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잃어버려진 줄을 모르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의 품 속으로 끌어 들이십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구원을 얻었어요.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은혜에 속한 자와 법에 속한 자 두 부류가 있습니다.

은혜에 속한 자는 은혜로 살고 법에 속한 자는 법으로 삽니다.

은혜는 긍휼을 입는 것이고 법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은혜에 속한 자를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은혜에 속한 자를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니 변00 목사처럼 구원의 길을 여러 가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단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구원 받는 길은 오직 하나의 길 뿐이라고 합니다.

“only way” 오직 예수입니다.

 

사도행전 4장을 봅니다.

 

행 4:10-12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을 입고 유대인들에게 증거합니다.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구원의 모퉁이 돌을 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에게 구원 얻을 이름은 오직 예수 밖에 주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 이외는 길이 없다고 합니다.

 

이 길 저 길이 아니고 오직 한 길 뿐입니다.

“only way” 입니다.

예수 이외는 없어요.

 

오직 한 길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로 말미암아서입니다.

하늘로서 온 자 이외는 하늘로 갈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 14: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길이고!

예수님만이 진리이고!

예수님만이 생명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는 은혜를 증거하고!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행위를 자랑합니다.

그 사람이 내어 놓는 패(牌)를 보면 그 사람의 소속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라는 패를 주었습니다.

은혜라는 패를 받은 자는 은혜의 패를 내어 놓습니다.

받았기 때문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의가 나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모세가 말하였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바울의 증거는 레위기에서 말하는 모세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는다고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8장을 봅시다.

 

레위기 18: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3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4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산다고 알려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희가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온전히 지키면 산다로 알려 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온전히 지켜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안 됩니다.

 

모세의 말은 도리어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지키지도 못할 자들에게 지키라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너희는 못 지키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율법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걸 자기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 의가 하나님의 의와 충돌을 합니다.

자기 의를 지키고자 하나님의 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발생 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죽였다고,,,

 

율법은 죄 없는 자만이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죄 없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범죄한 한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에요.

뭘 딱히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고 본질상 죄인으로 출생을 했어요.

그러므로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여도 그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죄인이 내어 놓은 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의인에게서만 나와요.

아담 안에서 나온 자들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에요.

아담 안에서는 의인이 나오지 않아요.

나 올 수가 없어요.

 

의인은 아담 바깥에서 오셔야 합니다.

즉 하늘에서 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 하늘에서 오신 예수가 바로 의인인 것입니다.

그 예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야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쉬운 말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아담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이듯이,

하늘에서 오신 의인이신 예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의가 되어요.

그러니까 의는 우리 인간들 하고는 상관이 없는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이걸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깨닫고 내가 죄악 중에 출생을 했다고 고백했어요.

내 모친이 죄악 중에 나를 출생하였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기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선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적으로 살인죄를 안 저지르고 간음죄를 안 지으면 죄인이 아닌 줄 알았어요.

그래서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기 전에는 의인처럼 살았어요.

죄인 주제에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너는 죄인이라는 것을 발가벗기는 작업을 하십니다.

여기에 밧세바가 동원이 되고 우리야의 죽음이 동원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난 후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냅니다.

 

나단 선지자가 네가 무슨 잘잘못을 해서 죄인이 아니고 너 자체가 죄인이라고 알려 줍니다.

밧세바와 간음하지 않아도 죄인이고, 우리야를 죽이지 않아도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에 다윗은 비로서 자기 실존을 알고 상한 심령이 일어납니다.

 

아! 나 자체가 죄인이구나!

나에겐 희망이 없구나!

그리고 주여 나를 긍휼히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곤 하나님께 자기 죄 때문에 애꿎게 죽은 우리야의 죽음을 근거로 용서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겠다고 합니다.

 

제사란? 율법지킴의 행함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지킴이라는 제사를 바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율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통회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기를 바라십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길은 없다는 것이 됩니다.

 

구원 받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도” 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만” 입니다.

 

“도”와 “만”을 잊지 마세요.

글자 하나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요.

“믿음으로도” 는 여러가지 구원 받는 길 중에 믿음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가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적인 말이지만, “믿음으로만” 은 오직 하나 믿음뿐이란 유일신론(唯一神論)적인 말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위하여서는 우리가 노력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애쓴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십니다.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시켜 놓은 자들에게만 공짜로 주십니다.

 

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신명기 30장의 말씀은 인용하고 있어요.

 

신명기 30장을 봅시다.

 

신명기 30:1-14절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 너의 쫓겨 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로 임하게 하시리니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모세는 지금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나타날 이스라엘의 앞 날을 바라보고서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만일 가나안에 들어가서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 가나안에서 쫓겨나서 이방의 객이 되어 사는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가 언약 때문이라는 겁니다.

언약 속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 받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징벌을 당한다고 하여도 다 언약을 시행하는 것이므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쫓겨난 무리들을 다 고토(故土)로 불러 들여서 번성케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게 하고 순종케 하신다고 합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이건 장차 성령이 오시면 일어날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불러 들여요.

그럼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져요.

이 새 언약이 믿어지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거나 먼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들리게 한다든가!

바다 밖에 건너가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이걸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서 얻어 내거나 땅 속에 들어가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와서 말씀을 들을까 걱정하지 말고 또한 누가 저 깊은 땅 속까지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올려서 말씀을 들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씀은 이미 주어졌으니 그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말씀을 우리 안에 넣어 주신다고 합니다.

자기 백성에게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받아 내는 것도 아니고,

땅 속으로 들어가서 받아내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저절로 믿어져요.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시니 믿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은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라는 방법론을 좀 알려 달라고 합니다.

목사님은 잘 알 것이 아니냐? 라는 말입니다.

목사님의 글이나 말씀을 들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가는데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믿을 수가 있는지 도와 달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과거에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연민이 들어요.

과거 제가 율법 아래 있을 때 그랬거든요.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동원 된 것이 열심과 충성이었어요.

 

열심히 충성하면 믿어지겠지 라고!

모두가 내 정성이 부족해서 그래! 라고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법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믿지 못했습니다.

안 믿어지는 걸 어쩝니까!

 

봉사를 열심히 하라고 하면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라고 하면 읽겠고!

기도를 많이 하라고 하면 하겠는데!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안 믿어지니까요?

 

그래서 자살을 하고자 한 적이 있어요.

도저히 못 살겠는 거에요.

그래서 에라이~ 콱 죽어버리자!

하나님과 담판을 짓자는 식으로 오기를 부렸어요.

 

그런데 죽는 것도 맘대로 안 됩디다.

자살도 하나님이 허락해야지 하지 아무나 하지 못해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는 법이 없는데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맘대로 목숨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자살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만난 하나님은 그런 분이에요.

사도들이 수없이 죽고 싶은 고난에 처할 때가 있었어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말하면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 의뢰 했다고 합니다.  

이건 죽고 싶은데 죽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쪽 팔리는 인생을 살았고!

개망신 당하는 삶을 살았고!

죽을 고생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만물의 찌끼 같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살았다고 하잖아요.

이건 자존심으로 사는 인간에게는 죽기보다 더 싫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에요.

죽음으로서 쪽 팔림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쪽 팔리는 것이고, 개 고생하는 것이고, 개 망신 당하는 일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고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삶을 사셨어요.

저는 복음 때문에 누구에게 욕을 먹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한마디로 쪽 팔리는 일이 생기면 예수님의 모습이 떠 올라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자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고초당하는 모습들이 제가 지금 당하는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요.

물론 예수님이 당하신 것과는 잽이 안 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예수님은 침 밷음을 당하고!

따귀에게 얻어맞고!

말할 수 없는 조롱과 조소를 받았어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도살할 양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일에 몸을 맡기고 당하셨습니다.

이게 십가가의 길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목사님은 어떻게 그 조롱과 조소들을 이겨 낼 수 있었습니까?

그 세월을 어떻게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까? 라고 묻더군요.  

자기는 자기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방과 조소들을 견뎌 내지 못하겠다고 너무 힘들다고 고백하는 걸 들었습니다.



자신은 이걸 이길 힘이 없다고 하면서 너무 지쳤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어야지 그걸 어떻게 이겨 낼 수가 있느냐!

그냥 이것도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라 생각하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다윗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구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빼앗기고 피접을 떠 날 때 웬~ 거지 발싸개 같은 빌어먹을 시므이라고 하는 놈이 따라 오면서 조롱을 할 때 신하들이 그 모습을 참지 못하고 전하 내가 저 놈을 당장 가서 모가지를 따 오겠습니다! 라고 하자,,

 

다윗은 아니다!

참으라!

이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신하들을 다독거린 일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 목사님이 복음 때문에 당하는 일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 사건의 배후에는 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참으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싸우는 자가 아니라 싸움을 당하는 자이고!

때리는 자가 아니고 맞는 자이고!

욕을 하는 자가 아니라 욕을 먹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참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그 길이라고 하면서 위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너무도 감상적으로 생각해요.

우리는 흔히 복음을 전하면 천사들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찬하고 영광이 돌아온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 반대에요.

욕이 돌아오고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어요.  

저도 처음엔 이런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나서 분을 삭히지 못하여서 잠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럴 때마다 에이! 복음이고 뭐고 다 때려 치워야 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엄청 많았어요.

 

그 때마다 하나님을 엄청 원망하고 욕하면서 울었어요.

한참 울다가 보면 하나님이 곁에 서서 다 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제 실컷 울었냐!

그래 울고 나니 속이 후련 하느냐!

그리곤 하나님이 내가 네 마음 다 안다고 하세요.

그러면서 다독거려 주심을 느껴요.

 

그 때 “아시지요” 라는 노래를 엄청 불렀어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실컷 원망하고 울고 나면!

그래 내가 가는 길이 이 길이지!

예수님도 이 길을 가셨지! 라고 스스로 위로를 삼게 되어요.

지나고 나면 아무 일 없었듯이 또 살게 되어요.

 

그래서 저는 누가 힘들고 고난당하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덤비라고 합니다.

야곱처럼 하나님 바짓가랑이 붙잡고 싸우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해결이 된다고 합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해요.

 

제가 지금 여기까지 오면서 하나님께 배운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신세에요.

병아리들만 노는 곳에 오리가 끼어서 괙 괙 하면 쫓겨나지요.

다 삐약 삐약 하는데 혼자서 괙 괙 해 보세요.

병아리들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어 좇아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편 가르기를 합니다.

교인들은 신앙의 색깔 맞추기를 해요.

자기하고 맞는 자들과만 교제를 해요.

자기하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핑계로 쫓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조직이나 집단에 붙어 있으려면 그들과 같은 말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쫓겨나요.

인간은 외로우면 못살아요.

그래서 끼리 끼리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법에 속한 사람은 법에 속한 사람들끼리 모여야 편해요.

이런 자들은 복음조차도 법으로 사용해요.

이들은 만나면 남을 헐뜯고 정죄하거 비판하고 심판하는 일을 즐겨요.

자기들만 옳다고 해요.

저는 이런 자들을 영적 깡패라고 합니다.

 

조폭은 조폭들과 있어야 편해요.

조폭은 조폭들이 쓰는 언어와 행동을 하여야지 모범생이 하는 말을 하고 모범생이 하는 짓거리를 하면 불편해서 못 살아요.

조직 안에 마음이 착한 놈이 있으면 그 놈 때문에 자기 악함이 드러나니까 불편해요.

그래서 찝쩍거리고 결국에는 떠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조폭생활 하다가 청산하고 포장마차라도 하면서 성실하게 살려고 하면 옛날에 같이 있던 놈들이 찾아와서 깽판을 치지요.

왜? 깽판을 칩니까?

자기들은 여전히 조폭인데 그 사람은 다르게 사니까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너만 착해야 하는데!

우린 뭐냐!

그러면서 자기 안에 분풀이를 착한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다가 복음을 깨닫고 그들에게 복음을 말해 보세요.

수긍하는 것이 아니고 욕을 하면서 짜증을 내요.

그래서 끼워 주지 않아요.

 

복음을 알면 구박덩어리로 전락해요.

하나님은 구박덩어리들은 한군데 모아요.

유유상종으로 모이게 하세요.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 15:17-2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럽니다.

얘들아!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 할 터인데!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랍니다.

세상이 내가 미워서 나와 함께 하는 너희들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다 나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겨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왜? 예수님을 미워합니까?이는 예수님이 세상을 악하다고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뭔 줄 아세요.

먼저 너는 틀렸다고 고발을 해요.

그럼 고발당하는 자가 가만히 있느냐!

아니에요.

길길이 날 뜁니다.

 

너만 잘났느냐!

너만 복음 아느냐!

혼자 예수 다 믿는 척 한다고!

 

아니 정답을 말하는데!

그게 그렇게 욕 먹을 일입니까?그런데 욕 먹어요.

그것도 바가지로 먹어요.

 

제가 성화주의자들을 향하여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하면!

돌아오는 메아리가 이단이에요.

야! 정낙원이 너 이단이지!

그렇게 돌아와요.

 

이 쪽에서 복음!

그러면 저 쪽에서 이단! 이라는 메아리가 돌아와요.

이게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실이에요.

 

결국 복음이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고 만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죄를 끄집어내는 미끼에요.

하나님이 악을 고발하는데 성도를 미끼로 사용하세요.

그래서 우리는 종일 도살할 양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을 이리 가운데 파송한다고 하셨잖아요.

이건 미끼로 준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죄를 고발하려고 예수를 미끼로 보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죄가 드러나고 그 반대급부로 고난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연합이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그것을 우리도 그대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걸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감사하라고 했어요.

 

산상보훈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마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하거든!

즉 복음 전하다가 욕을 먹거든 기뻐하라고 합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도 다 그 길을 갔다고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천국 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옛 적에 선지자들이 다 그 길을 따라서 천국에 갔다고 하잖아요.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 가신 길이에요.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에게 속하여서 복음을 전하면 욕먹고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샛길로 갔는데,,,

다시 본문을 살펴봅시다.

 

아까 뭐라고 했나요?

예수를 믿는 데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지요.

오늘 본문 제목이 “믿음에는 왕도(王道)가 없다” 이잖아요.

 

이건 우리 쪽에서 해결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잘 믿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이성이나 노력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영적인 일입니다.

영적이란? 세상 바깥에 일이란 뜻입니다.

세상 바깥에 일을 세상 방식으로는 접근 불가입니다.

 

이 세상을 일컬어 역사라고 하고 이 세상 바깥을 묵시라고 합니다.

역사에 속한 일들은 인간의 이성이나 노력과 열심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묵시에 속한 영적인 일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도 따낼 수가 없습니다.

 

복이니!

은혜니!

믿음이니!

구원이니!

천국이니!

영생이니!

은사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묵시에 속한 영적인 것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입니다.

 

이렇게 하늘에 속한 것들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공짜로 주어지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법의 나라입니다.

 

법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조건으로 주어집니다.

내가 한 것만큼 얻어집니다.

내 노력과 열심으로 얻어 낼 수가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많이 얻고 적게 노력하면 적게 얻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나라에서는 무조건이에요.

하나님 맘 대로에요.

하나님이 은혜 줄 자에게는 은혜를 주고 강퍅케 할 자는 강퍅케 하세요.

하나님 쪽에서 결정을 해요.

 

우린 그저 하나님 손만 바라볼 뿐입니다.

주시겠지 하는 믿음으로,,,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겠지! 라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서 예수를 모셔 내려 올 수가 없으며, 무덤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모셔 올라 올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를 믿음으로 보세요.

의나 믿음이나 동의어에요.

 

바울은 하나님 말씀 속에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 지금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전파하는 그 복음 속에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멀리 가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주어진다고 합니다.

 

믿음은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분들은 능력 있는 목사에게 가면 믿음이 생기는 줄 알아요.

아니에요.

 

목사는 믿음 주는 자가 아니에요.

목사는 그냥 복음만 전하면 되어요.

그 복음이 마음으로 깨달아지게 하는 것은 주님이세요.

하나님이 깨달아지게 해 주시면 깨달아지는 것이고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깨달을 수가 없어요.

 

복음이 들려지고 깨달아지고 믿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귀를 주셨고 믿어지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 비밀을 말씀 하시면서 너희 귀를 들음으로 복이 있고 너희 눈은 봄으로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건 너희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내 말이 들려지고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걸 지금 식으로 말하면 내가 지금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마음으로 믿어지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시인이 되면 그 사람은 믿음으로 난 의를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세요.

 

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요.

이를 정설(定說)로 이해하시면 안 되어요.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럼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니까 구원이 주어진다는 행함이 되어요.

구원은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을 역설(逆說)로 이해하여야 해요.

역설로 해석하면 어찌 되나요.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전도란? 자기 백성 찾기에요.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뭐라고 했나요.

미련한 것이라고 했지요.

 

전도란? 십자가 도를 전하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 자체가 미련한 것이에요.

왜? 미련 하느냐 하면 인간 쪽에서 할 것이라고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간 쪽에서 할 것이 없다고 하면 그딴거 왜 전하느냐고 해요.

어차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을 하여서 구원을 할 자라고 한다면 집구석에 있어도 구원 해 줄 것이 아니냐!

술 집에 있어도 택한 백성이라고 한다면 예수 믿게 해 줄 것이 아니냐!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 전도 할 것이 없네! 라고 해요.

이게 믿음을 받지 못한 자들이 하는 말이에요.


14-15절에 뭐라고 하는가요?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 못한 자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하리요! 라고 하지요.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왜? 보냈나요?

자기 백성을 구원 하라고 보냈지요.

 

구원을 어떻게 주어지나요?

예수님의 십자기 피로 주어지지요.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나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 갑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너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그리곤 부활 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어요.

성령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 갑니다.

그리곤 예수의 죽음을 믿어지게 해 줍니다.

 

그러니 15절 14절을 역순(逆順)으로 읽어보세요.

그럼 쉬워요.

 

보내심을 받지요!

그리고 전하지요!

전하니 듣지요!

들으니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누가 했다고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누구에게요?

자기 백성들에게 하셨어요.

 

그래서 복음을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믿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역이지만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한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 홀로 하시는 일이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그 구원이 은혜로 남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는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하셨어요.

요한복음 4장을 봅시다.

정리 하면 길어서 안 읽으니까 읽기 쉽도록 장(章) 절(節)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둘게요.

 

요 4장

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하루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 라는 동네에 갑니다.

거기에 보면 야곱이 옛 날에 양들에게 물을 주던 우물이 있어요.

가니까 여인이 물을 긷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면서 접근을 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놀라면서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 사마리아인 나에게 말을 겁니까?

누굴 희롱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내가 물을 얻어먹고자 함이 아니고 내가 당신에게 줄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겠다고 합니다.

이에 여인이 그 생수는 우물 깊이 있는데 그 깊은 물을 길을 그릇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주시고자 하는 물을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 여인에게 왜 갔을까요?

자기 백성 구원 하러 갔어요.

복음 전하러 가셨어요.

 

원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 라고 생각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상종도 하지 않는 그 사마리아에 예수님이 가셨어요.

그것도 여자를 만나러 말입니다.

 

왜? 갔느냐!

그 여자에게 구원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마리아 여자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가 갈 그 시간에 그 여인을 우물가로 나오게 하셨어요.

그 여인은 창기에요.

세상 적으로 소망이 없는 여인입니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서 아무도 없는 낮 12시에 물 길러 왔어요.

 

제가 과거 중동 지역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그 쪽 날씨를 잘 알아요.

그러니 말 할 수 있어요

느낌 아니까!

 

낮 12시면 무더위가 피치를 올리는 때에요.

11시가 되면서 햇살이 따가워요.

그리고 2시까지 가요.

약 3 시간 동안 엄청 뜨거워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간에는 외출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 쉬어요.

장사하는 사람도 다 문 닫고 쉬어요.

그런데 이 낮 12시에 한 여인이 물 길러 왔어요.

그것도 들에 있는 우물에 말이에요.

 

왜? 남들이 다 오침(午寢) 하는 그 시간에 들에 있는 우물에 물 길러 왔나요?

이는 사람들을 만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눈치 없이 찾아 가십니다.

찾아가서 하시는 말씀이 그 여자의 과거를 적나라하게 까발립니다.

 

그러자 여자가 화들짝 놀라면서 당신은 선지자 아니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 같은 여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어디로 가서 드려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자기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심 산에 가서 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 가서 드려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오는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성령이 오시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아니 그것은 메시야가 와야 되지 않느냐!

이에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 메시야라고 합니다.

여인이 너무 반갑고 놀라서 물동이를 내 팽개치고 동네에 들어가서 나 메시야 만났다고 소리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동내 사람들이 우르르 우물가로 몰려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여인에게 이제 우리가 예수를 만났으니 니가 이야기 하지 않아도 우리가 다 안다고 합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이 먼저 찾아 가지요.

그리고 전하지요.

전하니까 듣지요.

들으니 믿어지지요.

믿어지니까 또 전하러 가잖아요.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이 사실이 잘 나와 있어요.

 

요 20: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 하셔서 제자들을 찾아 갑니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를 이 세상에 왜? 보냈나요?

자기 백성들에게 죄사함을 주려고 보냈어요.

그런데 이 일을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고 있어요.

너희들도 가서 내가 한 것처럼 하라고 합니다.

 

죄 사함의 복음을 증거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이는 죄사함의 능력이 여기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걸 전하라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제자들이 메뚜기처럼 뛰어 다니면서 이 사실을 증거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복음을 전합니다.

그럼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그 말을 들어요.

 

들으니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지니 더 이상 제자들에게 매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제 자기 안에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고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반복적인 역사로 지금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반드시 예수가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세요.

이게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주겠다고 하는 생수는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로운 예배가 일어나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예배가 이루어져요.

 

지금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고정된 장소에 가서 안식일이라는 정한 시간에 가서 예배를 드렸어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그 사람 자체가 성전이 되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젠 성령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예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늘에 올라가거나 땅 속에 들어가거나 할 것이 없이 하나님의 약속에 말씀을 믿음으로 예배가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가능성으로 나아오는 것은 전부가 율법에 의한 예배에요.

반면에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나아오는 것은 믿음으로 드려지는 예배에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진 자는 자기 의로 살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진 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산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자기 것으로 사느냐!

아니면 예수의 것으로 사느냐! 입니다.

자기 것으로 사는 자는 항상 자기가 뭔가 행하여야 합니다.

반면에 예수의 것으로 사는 자는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살아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율법에 마침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를 믿는 자들은 율법으로 나아올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이 되니까 이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오면 되어요.

이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에 말씀이 지금 우리 마음에 있고 우리 입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자는 아멘이라고 시인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으로 감사하며 사세요.

 

부디 여러분의 귀에 복음이 들려지고 마음속에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람입니까! 예수가 믿어지고 복음이 들려진다는 것이! 이 은혜를 감사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 눈 앞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 예수님만 보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 예수 밖에 없다는 고백이 우리의 신앙 고백으로만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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