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폐 쟁이(장복의 추억4)
카테고리 : 나의 이야기 | 조회수 : 10532017-04-01 오전 8:01:00

민폐 쟁이(장복의 추억4)/강민호

 

나는 언제라도 말 수 있다. 나의 삶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절은 대학생활을 할 때이었다고 말 수 있다. 대학생활은 내게 많은 어려움들과 맞닥뜨리게 했었다. 그런 어려움들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들을 활용해서 내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경험 쌓을 수 있게 했던 것이 대학생활이었다.

 

나는 지금 고향인 제주도가 아닌 타향인 전주에서 꿋꿋하게 독립생활을 하고 있다. 독립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어려움들 해결하는데 대학생활 때 어려움들을 해결했던 경험들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대학교 때 나의 별명은 민폐 쟁이 강민호씨이었다. 심한뇌성마비인 내가 대학생활하면서 동기, 선후들에게 많이 도움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익숙한 일이었다. 동기, 선후배들도 말로는 민패 쟁이 강민호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대학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게 도와주었다. 내가 주로 도움을 요청하는 동기, 선후배들은 약칭 장복이라고 하는 단체에서 활동했던 동기와 선후배들이었다. 유별하게 그들이 편하기도 했지만 나도 장복에서 활동했던 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2년 전 여름 모처럼 장복 동문회가 있어 완주군에 있는 경천애인농촌사랑학교에 갔었다. 반가운 마음에 경천애인학교에 맨 먼저 도착 나는 누구, 누구 올까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회원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대학시절 때 친하게 지냈던 동기와 선배가 도착했고 우리는 각자의 근황을 이야기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다. 얼마쯤 이야기 했을 때 동기가 내가 숙소에서 편하게 있으려면 수동 휠체어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완주군에서 사는 선배에게 완주군 장애인복지회관에사서 수동 휠체어 하나 밀러 오라고 연락했다. 통화를 끝내고 동기는 내게 강민호씨는 여전히 민폐 쟁이이네 하고 말하며 웃었다. 나도 역시 태어나서 보니까 이렇게 된 것을 나보고 어쩌라고 하면서 웃었다.

 

장난기 많은 여동기에게서 민폐쟁이 강민호씨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 말이 나를 도와주기 귀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편한 동기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 것을 알고 더 편하게 도움을 요청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입학식 때 대학생에 적응을 못 할 것 같았던 대학생활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 할 수 되었다. 내가 학교생활에서 생기는 어려움으로 동기나 선후배에게 도움을 요청 할 때는 원칙이 있었다. 동기나 선후배들의 도움을 받지만 어려움을 해결하는 주체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원칙이 생겨난 것은 일학년 때 펑크 난 휠체어 바퀴를 선배가 바꾸어 주도 바람을 내가 직접 자전거 수리점에 가서 넣고 오라고 했던 선배의 도움 준 방식이 내게 큰 자존감과 독립심을 가지게 하였다. 나는 그 이후로 대학생활에서 생기는 어려움들을 해결할 때 선후배들의 도움을 받지만, 종국적으로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주체는 내가 되면서 자존감과 독립심을 기를 수 있었다.

 

내가 자존감과 독립심을 기를 수 있는 원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장복이란 단체가 있어서 했다. 장복은 우석대학교 장애학생복지연합회의 약칭이다. 장애학생 특례입학제도도 없었던 시절에 처음으로 우석대에 입학한 장애학생들이 주도하여 자원봉사들과 함께 성립한 단체이다. 학업은 물론이고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때 장애학생들의 주도하여 수많은 대학생활의 어려움들을 해결했다. 보조해주는 비장애학생들이 있었지만 장복의 모든 일의 최종 결정을 장애학생에게 있었다. 14대 임원단까지는 장복의 회장과 기획부장은 장애학생만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장애학생들에게 주는 특권이 아니라 본인들의 문제들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주었다.

 

나 역시도 삼학년 때 자원활동부 부장을 받아 장복에 있는 물품관리와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 장애학생들과 대필자들을 연결시켜 주는 일을 책임지고 했다. 그리고 학교에 있는 자판기마다에 점자 부착했고, 학교네 장애편의시설을 조사하여 개선요구를 학교에 요청했다. 고함콘서트 장복단독콘서트, MT. 여를 캡프 개획도 다른 임원들과 함께 세웠다. 물론 비장애인 후배가 차장으로서 나의 일을 보조해주었지만 자원활동부의 일을 내가 주도적으로 처리했고 일이 잘못 된 책임도 내가졌다.

 

자원활동부 부장은 받았던 경험은 나의 심리적인 나이가 많이 성장 할 수 있게 했다. 기껏해야 회원들에게 단체문자 돌릴 수 있고 행사 때 아이디어나 내 수 있을 뿐 몸으로 하는 일을 아애, 못하는 나대신 모든 일들 해야 하는 차장인 후배와 임원들, 회원들에게 늘 미안했다. 그래서 때때로 내가 부장은 맡은 것이 그 후배에게 정말로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 할 때가 있었다. 하루는 자원활동부 부서모임을 마치고 차장과 단둘이 기숙사 매점에서 커피 마시며 이야기 할 때가 있었다. 그때 차장이 내게 오빠 작년보다 많이 소극적으로 생활하는 같다고 했다. 나는 자원활동부 부장으로서 해야 하는 몸으로 하는 일들을 못하니까 너와 임원들 회원들에게 미안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것 내가 자원활동부 받을 때부터 모두 가고 했다고 했다. 자기도 내가 차장 제의 할 때 고생할 생각으로 승낙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처음 봤을 때처럼 언니들과 오빠들이 민폐 쟁이 강민호씨라고 놀려도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생활하던 것 같이 자원활동부 하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버리고 도망가겠다고 하고 농담하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적극적으로 자원활동부의 많은 일들을 주도적으로 처리했고 큰 성취감도 가지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성장하지 않았던 심리적인 나이도 많이 자라나게 했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해서 장복에서 했던 장애학생 O,T 때 만났던 초대 장복회장을 지낸 선배께서 내가 후배님을 여기서 남들보다 더 배고픔을 느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이 내가 장애가 심하니까 대학생활이 어려운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라는 말로 오해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대학생활에서 어려움이 생길 때 동기 선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주체적으로 해결하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민폐 쟁이이라는 놀림을 받아도 그 말씀대로 대학생활을 했고 그 경험이 있어 이렇게 독립생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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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내용 
지난날에 했던 모든 선택들이 행복이었다.
봄은 유혹의 귀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