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 관하여 표지. ©정민권
우리에 관하여 표지. ©정민권

복지관 책장에 있던 책이 눈에 띄었다. 장애와 관련된 에세이가 60편이나 실렸다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장애인의 삶을 다룬 이 책이 도무지 팔릴 것 같지 않겠다 싶으면서도 '우리'라는 유대감이 작동했다.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아무런 공감도 없는 상태에서도 그랬다. 내가 사는 방식과 그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로 설명 가능 할까? 지구 반대편에 살지만 장애를 지니고 산다는 그 결은 같을까 궁금했다.

12쪽 서문. ©정민권
12쪽 서문. ©정민권

어쩌면 누군가는 서문에서 밝히는 주제와 관련해서, '장애인들 대다수는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 기여하고 있으며, 비장애인들이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삶을 통해 주고 받는다.' 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거나 거부감을 표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이곳에서 겪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 그렇기도 하는 데서 오는 조심스러움이랄까.

<들어가며>에서 로즈마리 갈런드-톰슨이 지적하는 하는 것처럼 살면서 열린 경험의 상태인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그 불안정한 경계'를 나 역시 20년을 비장애인으로 34년을 장애인으로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경계에서 살아 오면서 갖게 되는 장애 정체성은 여전히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자주 흔들리기도 해서 이 책의 주제는 예사롭지 않다. 최소한 내게는 더 그렇고.

특히 '사회적 도전'이란 정의와 '어떤 개인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오직 일부만 할 수 있다' 라는 얘기는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하지 않고 누구나 도움은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주지만 장애에 관해서 대부분 양보하지 않는 세상은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익숙해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 낸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은 뉴욕 타임즈, 오피니언 시리즈 <장애 Disability>에 소개된 60편의 에세이를 옮겼다. 미국에서도 장애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주요 언론사가 다룬 첫 사례라는 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당사자로 흥미롭다. 우리와는 어떻게 다를까?

또 서툴지만 당사자의 언어로 장애를 말하고자 2017년에 펴냈던 <행복추구권>이 의미 있는 작업이었음을 인정받은 것 같아 흥분되기도 했다. 얼마 전 두 번째 이야기로 장애 부모의 이야기를 모아 펴낸 <오늘을 견디며 사랑하며> 역시 그렇다.

미국에서조차 '취재와 보도가 필요한 영역'으로 간주되는 장애인 인권 운동이니 대한민국은 오죽하랴 싶다. 요사이 지하철 점거 시워를 하고 있는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전장연)를 바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데 장판을 벗어나면 전장연이 아니라 모든 장애인을 싸잡아 무뢰배 집단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을 자주 목도 한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이 책이 자연스러운 삶 안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장애로만 규정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통해 장애인식이 긍정적인 영향으로 좀 더 확산 되었으면 싶다.

"장애를 찬찬히 음미하며 산 우리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인간이라면 언젠가 마주하게 될 과업으로 안내해 준다." 그리고 "우리의 장애는 전체 삶의 일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기지를 발휘해야 할 순간들과 좌절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장애를 안고 사는 것이 '쟁취'하게 만드는 일들을 수긍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앤드루 솔로몬의 <정신질환은 호러 쇼가 아니다>라는 글은 주목하게 한다. 말미에 "공감의 거부는 독이나 다름 없다. 일부 사람들에게 자신이 인간 이하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도록 하고 자살의 확산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협으로 보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좋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라고 지적한다. 한데 그의 이야기가 비단 정신질환만을 국한하는지 묻고 싶다. 사실 모든 장애를 포함한 이야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 조너선 무늬의 <넌 특별한 아이야, 그런데 좀 유별나게 굴지 않을 순 없니?>에서 장애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가진(have)'가 아닌 다름을 수용하고 포용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경험적(experienced)'로 해석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데 동의 한다. 이 경험은 가족에서도 유효하다.

우리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 아빠를 경험하면서 장애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을 알았다. 보통의 친구들 아빠들처럼 자신들에게 화내고 소리를 치고 공부하라고 윽박지르는 건 매일반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하는 일이 귀찮을지언정 싫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하여 장애는 경험 속에서 정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러한 불능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양 강조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걸어 나가기 위해 목발이 필요한 사남 정도로 정의하는 것 또한 터무니없는 일이다. 나는 존 울트먼이고, 나는 나의 뇌성마비로 정의되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 모두의 상식이 되면, 내가 항상 목발을 쓸지라도 나는 사실상 나의 장애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102쪽, 나는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장애 정체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장애인은, 그것도 '당사자'라는 프레임에 가둬 두고 정의하려는 사회에서는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현실성이 있다 없다 논란되기도 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변호사 우영우 역시도 정체성의 혼란으로 직업을 포기하려 할 정도다. 제목도 이미 그런 우영우의 정체성을 '이상한'으로 정해놓고 시작하지 않은가.

그와 유사하게 나 역시 애니메이터를 거쳐 디자인 강사 그리고 현재는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이 모든 사회적 역할 앞에는 지체 장애나 휠체어 장애인이란 수식어가 내 정체성을 뒤덮는다. 존 울트먼이 그랬던 것처럼 우영우는 우영우이고, 나는 나로 정의되어야 한다. 나는 지체 장애로, 휠체어 선생으로 고작 정의되지 않는다.

118~119쪽,  뚜렛 증후군과 함께한 나의 인생 - 셰인 피스텔. ©정민권
118~119쪽,  뚜렛 증후군과 함께한 나의 인생 - 셰인 피스텔. ©정민권
118~119쪽, 뚜렛 증후군과 함께한 나의 인생 - 셰인 피스텔. ©정민권
118~119쪽, 뚜렛 증후군과 함께한 나의 인생 - 셰인 피스텔. ©정민권

놀라운 사실 하나는 뚜렛이든 정신 질환이든 그들이 복용하는 약에 대한 '이익'을 우리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라는 질문은 아주 놀라운 주제다. 감기나 두통 기타 일상적을 포함한 거의 모든 질병과 질환에 따른 약을 처방받고 복용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다만 앞에 언급한 질환에 대한 복용은 그 이외의 사람들과 섞이기 위한 상호적 반응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정신적 질환을 겪는 사람에게 우린 무의식적으로 약 복용을 했는지를 확인하곤 하는데 그의 안녕보다는 질문자의 안녕을 염려해서 그런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건 억지일까. 그래서 <뚜렛 증후군과 함께한 나의 인생>의 셰인 피스텔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참 머릿속을 뒤엉키게 만들고 한참 생각에 빠지게 한 문장이 있다. 크루존 증후군으로 불가피한 안면 손상으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에리얼 헤리의 말처럼 '끔찍했던 것들이 평범해 지는 순간'은 결국 '우리'는 소외되는 것에 익숙해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차별과 편견 심지어 조롱 같은 것들이 평범해진다는 건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셰리 A. 블로웻의 경험담은 내가 사회복지사가 되기 전 디자인 강사로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반추하게 했다. 담당 강사를 기다리는 학생들 앞으로 느리고 불편한 걸음으로 입장하면서 받았던 시선들과 내 불편함이 수업에는 전혀 지장이 없음을 설명해야 했던 일들이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목이 부러져 몸은 불편 하지만 머리는 괜찮으니 수업은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이 책, 어느 이야기 하나 놓쳐서는 안 된다. 읽다 보면 그럴 리 없겠지만. 그중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4부 <항해>는 이동의 주체가 전혀 주체적이지 못하게 디자인된 사회적에서 파도를 넘나드는 범선처럼 장애를 다룬다.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에서 장애는 이동 약자를 통해 지니는 것보다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뭐 그렇다고 르포나 사회 고발이라기 보다 그들의 삶에서 장애를 재정의 하는 수준으로 그려져서 나는 우아한 그들의 핸들링이 사랑스럽다. 그러다 뉴욕 지하철의 취약한 시스템처럼 나도 신설동 역에서 바퀴가 승강장 사이에 빠져 앞으로 내던져진 일이 생각나서 웃펐다. 웃으면 안 될 일이지만 말이다.

책은 처음 생각했던 보통의 소시민들-아무래도 책의 저자들처럼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 보다는 더 차별적으로 소외되는-의 일상에서 노출되는 소소한 에세이가 아니긴 하다. 하지만 장애가 장애로 느껴지지 않도록 디자인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우리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도 충분히 공감하게 한다. 그건 분명 존재로서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들'이란 장애라는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아닌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들'로 정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각기 다른 60개의 이야기가 결국 하나로 모아지는 지점에 그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있다. 그래서 장애가 있든 없든 모두에게 중요한 이야기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장애는 결함과 동의어가 아니다. 고치거나 되돌리려는 의학적 관점에서 분명히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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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복지사. 책 읽고 글도 쓴다. 그리고 종종 장애인권이나 인식개선을 위한 강연도 한다. 미디어에 비친 장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장애당사자로서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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