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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푸른 소나무처럼 살고 싶어라
지체장애 1급 최영주 씨의 삶-①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9-02-22 15:07:04
‘하얀 겨울이 찾아왔다고
바람은 가지 끝에 시린 손 저어
비장한 세월을 노래하고 있다.

나무여, 뿌리 곧게 내린 후
꿈을 묻고, 청춘을 묻고
하나의 사랑을 위하여
흔들리지 않는 삶의 주춧돌
한 겹 한 겹 쌓아가고 있느니,

하늘을 향해 열린 너의 자리
살을 에이는 비수 휘몰아쳐도
꺾일 듯 휘어지지 않는
여린 몸매 위에
사무치는 고통 비켜가고 있구나.
사무치는 눈물 비켜가고 있구나.

바람이여, 불어오라
잠들지 않는 눈물을 딛고
마지막 남은 고통마저 꺼진 자리
곱게 열리는 새날을 위하여
푸른 사랑 더욱 푸르게
바람이여, 불어오라.’


이 시는 권영민 시인의 ‘겨울 소나무’다. 사시사철 늘푸른 소나무에게 봄이 따로 있고 겨울이 따로 있겠는가마는 소나무는 하얀 눈 속에서도 꿋꿋하게 비장한 세월을 노래하고 있다.

소나무의 기상은 사철 푸른빛을 잃지 않는 것에 있다. 여름의 더위에도 겨울의 추위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살을 에는 찬바람 속에서도 고통과 눈물이 비켜가듯 당당하게 하늘을 향해 푸름을 자랑하듯 바람을 맞고 있다.

최영주 씨. ⓒ이복남
▲최영주 씨. ⓒ이복남
최영주 씨는 특히 소나무를 좋아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보낸 학교의 교목이 소나무이기도 했지만, 학교 운동장가에 꿋꿋하게 사철 푸름을 뽐내는 소나무를 보면서 소나무를 흠모하며 닮고 싶었지만 그는 소나무하고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꿈도 못 꾸랴.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애국가 가사처럼 소나무는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민족혼이자 어쩌면 오늘의 그를 지탱해 준 뿌리이기도 했다.

최영주(1985년생) 씨는 부산 서대신동에서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7살의 아버지는 가구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23살의 신부를 아내로 맞았다. 가난한 신혼부부였다. 아내는 임신을 했고 첫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여느 아이들하고는 좀 달랐고 발목이 위로 약간 젖혀져 있었다. 소아마비나 뇌성마비인가 했으나 의사들도 정확한 병명은 잘 모른다고 했다.

발목이 위로 젖혀져 있었다면 왜 수술을 하지 않았을까.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아이의 수술비가 없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는데 그래도 돈이 없으니까 돈을 벌려고 선원이 되어 라스팔라스로 가셨답니다.”

최영주 씨의 어린시절. ⓒ이복남
▲최영주 씨의 어린시절. ⓒ이복남
어머니는 확실한 병명도 잘 모르는 선천성 장애아를 안고 울며불며 아이를 키웠다. 아이는 백일이 지나고 돌이 지나도 일어서지도 못했고 팔과 무릎을 이용해서 겨우 방안을 기어 다닐 뿐이었다.

“보통 애기들이 기어 다닐 때는 양팔을 쭉 뻗어서 한 팔 또 한 팔로 기어 다니는 것에 비해 저는 팔에 힘이 없으니까 양팔을 펴지 않고 팔꿈치를 땅에 붙여서 기었다고 합니다.”

그는 부산근육장애인협회 회장이 되고 나서 자신의 장애가 어디서 연유하는지 그 원인을 찾아보았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근육병은 유전이 되기도 하는데 그는 조부모 등 윗대나 사촌들 가운데서도 근육병이 없는 돌연변이였다고 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어머니가 임신인 줄 모르고 감기약을 먹었답니다.”

필자가 최영주 씨의 어머니하고 통화를 했다. 어렸을 때 병원을 가도 의사도 근육병이라는 것을 잘 몰랐으므로 고개만 갸웃거렸을 뿐이라고 했다.

“애 아빠는 이런 애도 밉고 이런 애를 낳은 저도 미웠는지 모른 체 무심했습니다.”

어머니는 애 때문에 울고 무심한 남편 때문에 더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애를 낫게 해보려고 좋다는 병원이나 약방에도 다녀보고 다리는 두 번이나 수술을 했다.

“시어머니가 우리 애 때문에 백방으로 알아보시며 애써 주시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남편은 무심했지만 그래도 시어머니가 함께 해주셔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는데 그러던 중 시어머니가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자고 했다.

“구인사에서 관세음보살 기도를 했는데 스님께서 생강을 먹여보라고 하던데 애가 생강을 먹으려고 해야 말이지요.”

그 후 시어머니는 손자를 위해서 김해 한림면에 절집을 하나 구해서 불철주야 기도를 했다.

코스모스 들녘에서. ⓒ이복남
▲코스모스 들녘에서. ⓒ이복남
할머니와 어머니의 지극정성인지, 4살쯤에 양다리로 서있을 수는 있었지만 걷지는 못했다. 유모차는 너무 비쌌고 유아용 휠체어도 없을 때였으므로 어머니는 세발자전거에 아이를 태우고 다녔다.

6살 때쯤 목발을 짚고 다녔다. 보통 목발을 짚는 사람들은 양팔을 쭉 뻗어서 힘으로 체중을 지탱하는데 그는 겨드랑이에 또는 어깨에 걸친 체 의지했다. 그러다보니 힘이 없어서 옆에서 누가 건드리기도 하면 그대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턱을 다쳐서 스무 바늘 정도 꿰매기도 했다. 그리고 한 번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나지 못했다.

“내동초등학교 1학년 땐가 학교에는 어머니가 자전거에 태워서 다녔는데 방과 후에 화장실에서 넘어졌는데 못 일어나서 몇 시간이나 울고불고 몸부림치면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에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서 학교에 데려다 놓고 공부가 끝날 때쯤 다시 데리러 왔는데 하루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가 교문 밖을 나오지 않더란다. 아이에게는 오랜 시간이겠지만 몇 시간은 아니고 한 시간 남짓이라는데 기다려도 아이가 나오지 않아서 교실로 갔는데 교실에도 아이는 없었다.

“얼굴이 노래져서 아이를 찾아 다녔는데 화장실에 쓰러져 울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이를 보자 눈물부터 나왔다고 했다. 선생에게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면 우리 아이만 불이익을 당할까봐 그러지도 못했단다.

“그 후부터는 집에 안가고 학교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내동에 있는 주공아파트를 신청해서 분양받았다. 아파트는 5층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지금이야 장애인이 입주하면 1층으로 해주겠지만 그 때는 그런 것도 없어서 3층에 살았다.

가끔 아파트 대청소를 하게 되면 계단에 물이 있어서 미끄러웠다. 그가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오르내리면 미끄러울까봐 어머니는 1층부터 3층까지 마른걸레로 닦아주었다.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그 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올라가기 싫어서 목발에 있는 나사 부품을 몰래 빼서 하수구에 버리고는 1층에서 어머니를 불러 됐습니다.

어머니와 꽃밭에서. ⓒ이복남
▲어머니와 꽃밭에서. ⓒ이복남
그러면 어머니가 그를 업고 3층까지 올라갔다. 한번은 어머니가 몸살이 걸려서 누워 계신지를 모르고 또 그 짓을 했다. 어머니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결국에는 아버지가 대신 내려와서 업고 올라가셨는데, 집에 가서 낚싯대로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가끔은 아파트 1층에서 놀고 있으면 이웃집 아저씨들이 업어서 3층까지 올려주곤 했다.

“그 때는 그 짓이 얼마나 꿀맛같이 달콤하고 좋았던지 간혹 잔꾀를 부렸습니다.”

필자가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어머니는 울먹이면서 몰랐다고 했다.

“아이가 팔에 힘이 없어서 계단을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은 모른 채 단지 게을러서 어리광을 부리는 거라고 아버지에게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9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살던 한림면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파트랑은 너무 많이 달랐다. 아파트야 내려와서 아이들과 놀 수 있었지만 할머니가 살던 집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자갈마당에 시멘트를 발라서 마당 쪽으로 휠체어를 타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예전에는 마당도 자갈밭이라 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할머니 집으로 이사를 온 이후로는 매일 집구석에만 있다시피 했다. 그나마 어린 여동생이 있어 유일한 친구이자 말상대였다.

아파트에 살 때나 한림에서 살 때도 누군가 친구들이 오면 보내기가 싫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놀러오면 몰래 그 친구 물건을 숨겨놓곤 했다. 그 때는 친구 물건을 숨기면 집으로 못가거나 나중에 다시 찾으려고 올 때 한 번 더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친구가 1명이 아니라 2명이 왔다.

사람 셋이 모이면 싸움이 난다고 했던가. 늘 1:1로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3명이 있다 보면 2명이 편을 먹고 한 명을 따돌렸다. 아무래도 비장애인 친구들은 신체적인 공통점이 더 크기 때문에 그가 따돌림을 당했다.

“혼자 따돌림을 당해서 막 울어대니까 어머니께서 다음부터는 친구 한 명만 집에 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한림에서의 어린 시절은 끝나고 말았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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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기자 (gktk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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