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재 활동가/ 서울대학교 장애인권연대사업팀. ⓒ장애인생활신문

글을 쓰기 앞서 필자가 이 글에서 이야기할 경증장애인이라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히자면 장애가 있지만 일시적으로 장애를 숨기거나 얼버무릴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경증장애인, 중증장애인이라는 표현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장애의 정도가 가볍다, 무겁다는 타인에 의해 재단될 수 없는 문제이며 장애가 장애인에게 주는 영향력은 개인만이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증장애인이라는 용어 자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 글에서는 마땅히 대체할 용어를 생각하지 못해 편의상 경증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쓰니 양해 부탁드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고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장애 유무에 상관없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증장애인을 상상한다. 그러나 모든 장애인이 중증장애인은 아니다. 경증장애인이라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들 머리 속에 경증장애인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 보고 들은 장애인은 거의 대부분 중증장애인이기 때문이다. 길가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동정을 받는 장애인도, 거리에서 투쟁하는 장애인도, 장애를 극복해서 영웅이 된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경증장애인이 우리 주위에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수가 중증장애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대다수의 경증장애인의 경우는 자신의 장애를 숨기려 하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경증장애인들은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길 원치 않으며 심지어 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비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길 원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경증장애인들은 왜 장애를 숨기려 하는가? 모든 경증장애인이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과 그밖에 경증장애인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았을 때, 주변 사람들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그릇된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필자의 경우는 다리를 약간 저는데 서로 안지 얼마 안된 사람들은 왜 다리를 저냐고 물어본다. 이 때 대답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는 극과 극이다. “어제 농구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관절이 상했어.”라고 대답했을 경우 사람들은 웃어넘기거나 핀잔을 준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좀 불편해.”라고 대답할 경우 굉장한 실례를 했다느니, 뭐 도와줄 건 없냐느니 태도가 돌변한다. 무엇이 진짜 실례인가 사람들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의 그릇된 편견 탓에 본인도 그랬고 대부분의 경증장애인들이 장애를 숨기고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으로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자면, 장애라고 불리고 있는 육체적(혹은 지적) 한계는 감출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해마다 장애극복의 사례가 미담처럼 흘러나오고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별적인 특별사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미담의 주인공조차 특별한 장애인, 슈퍼 장애인으로 비춰질 뿐이다. 진짜 편견에서 벗어나는 길은 개개인이 장애가 없는 척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어도 편견의 시선을 받지 않고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 사람들이 장애를 편견의 대상이 아니라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해야 하고 그걸 위해서 장애인 스스로가 자신의 장애를 정체성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을 성소수자 운동에서 개념을 빌려와 ‘커밍아웃’이라고 부른다. 많은 장애인은 벽장 안에 숨어 있다. 하지만 벽장 안에 있다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경증장애인은 경증장애인 나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장애인들이 벽장에서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