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7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86편 접수됐다. 이중 김효진씨의 ‘성준이가 왜 그럴까?’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 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경유미씨의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길’이다.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길

경유미

평범한 가족이었다. 엄마, 아빠, 시끄러운 딸 둘과 아들 하나. 평범한 우리 가족이었지만 우리들 인생은 몇 년 전 예상하지 못한 새 챕터로 접어들었다.

엄마의 뇌출혈. 생각보다 흔한 병인지 모를 만큼 우리는 병에 무지했고 엄마가 훌훌 털고 일어날 거란 생각으로 겁 없이 가족 간병을 시작했다. 막내아들은 군대에 가고 아빠와 언니는 생계를 책임지는 동안 둘째 딸인 내가 전담해서 엄마를 맡았다. 엄마는 고혈압성 뇌출혈로 좌뇌에 탁구공만 한 상처가 남았고 실어증을 비롯한 편마비가 지독히도 엄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오른쪽 팔다리는 감각도 없이 덜렁덜렁 거렸고 콧줄로 밥을 먹었다. 응, 아니 밖에 말하지 못하는 57세 우리 엄마는 이제 누가 없으면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는 법적으로 아직 장애인이 아니었다. 뇌병변 장애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병이 발병한 뒤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이제까지 받은 치료 내역을 모두 뽑아들고 전문의의 소견이 담긴 소견서와 함께 신청을 해야 했다.

나는 엄마가 장애인으로 판정받기 전 6개월이 가장 힘들었다.

가장 무서웠던 건 외래진료를 가는 날이다. 나는 면허가 없다. 친구들이 면허를 한참 따던 19살 그 시기에 친구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다. 수능 끝나고 강릉으로 놀러 가던 친구네 가족은 크게 다쳤고 친구도 다리 한쪽을 절단해야만 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면허를 딸 생각도 하지 않았고 여유가 없던 우리 집은 차마저 없었다.

여기서 질문. 장애등급이 나오지 않은 환자가 자동차 없이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애인콜택시요? 경기도 사시나요? 그럼 교통약자로 의사 소견서를 제출하면 교통약자 이동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이 서울이라 지금 서울에 계시다고요? 서울엔 장애인콜택시가 있는데, 장애등급이 있는 분들만 사용 가능하세요. 지금은 장애인이 아니셔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허허. 그럼 어떻게 했냐고?

1번. 사설 구급차. 병원에 문의하니 명함을 하나 줬다. 천사 구급차였던가, 뭐 비슷한 이름의 업체. 전화를 하니 썩 친절한 목소리가 응대를 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구급차를 불렀는데 세상 그런 난리가 없었다. 어설픈 이송요원 한 명과 일이 밀렸는지 급해 보이는 요원 한 명이 엄마를 높고 좁은 구급차용 침대로 후루룩 올렸다. 엄마 오른팔은 어깨 탈구가 있기에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가볍게 잊으신 모양이다. 침대로 올라가면서 팔이 덜렁거리며 엄마를 아프게 했고 이송요원은 사람 좋은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했지만 엄마는 이미 겁을 먹었다. 출발 전부터 겁먹은 엄마를 걱정했지만 의외로 '누워서 차를 탄다'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다. 차가 달리는 동안 평소 강직이 없던 엄마 몸이 점점 뻣뻣해지고 조금이라도 덜컹거리면 누워서 온몸으로 흔들리는 차체를 느껴야 했다. 엄마는 곧 못 견디겠다는 듯 얼굴에 눈물이 흥건해졌다. 내리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 회복이 안 되던 엄마는 다신 구급차를 안 타고 싶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게다가 현금으로 결제하는 구급차는 2km를 달리고 7만원. 병원 외래진료를 다녀오면 왕복 15만원이다. 몇번 구급차를 이용하다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2번. 택시. 콜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휠체어를 탄 환자와 함께 이동할 예정이라고 했다. 잠시 기다려보시라고 하더니 어렵다고 거절당했다. 어쩌지. 망설이다 앱으로 택시를 불렀는데 택시엔 LPG 가스통이 있어 휠체어가 안 들어가니 콜을 취소해달라고 부탁하며 그냥 가셨다. 대형택시를 콜 했지만 잘 잡히지가 않아 땀을 뻘뻘 흘리는 동안 지나가던 친절한 택시 기사님이 서주셨다. 휠체어를 트렁크에 간신히 꾸겨 넣어주곤 똑같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출발해 주신다. 역시나 엄마 기력도 쭉 빠졌다.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이것도 아니구나.

3번. 콜밴. 짐이 많을 때나 공항에 갈 때 타곤 하던 콜밴이 떠올랐다. 휠체어를 충분히 실을 수 있고 기사님도 친절. 앉아서 갈 수 있으니 엄마도 좋고 택시보다 마음 편하게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막상 부르니 차체가 높다! 아이고. 불효녀 때문에 엄마가 또 울 판이다. 차체가 높은 콜밴을 부여잡은 엄마 얼굴은 점점 빨갛게 올라오고 엄마를 올려주려는 기사님과 나의 헛된 노력은 몇 번이고 빗나간다. 어떻게 올라탔는지도 모르게 콜밴에 올라탔다. 엄마는 히말라야를 등반한 표정으로 성취감에 뿌듯해하지만 곧 내릴 때가 되자 겁이 나서 안달이다. 미안, 엄마. 이것도 아니었네.

제발 복지카드가 빨리 나와서 우리도 장애인콜택시를 한번 불러보고 싶다. 그게 우리 소원이 될 정도로 걱정이 많았다. 엄마는 연하장애도 있어서 자주 대학병원에 가 콧줄을 빼도 되는지 검사를 해야 했는데 가기 일주일 전부터 나는 스트레스성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엔 뭘 타고 가나.

드디어 손으로 꼽아보던 6개월이 지나고 장애진단을 신청했다. 처음 입원했던 대학병원에서 간호기록지, CT 영상기록지 등등을 떼고 나니 서류가 두 뭉텅이다. 재활병원에서 다시 그동안 치료 기록들을 떼고 양손 가득 서류를 안고 신청했다. 손은 무거워도 마음은 가벼웠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은 방문 평가. 간병인 이모님들은 굳이 엄살 부리지 않아도 등급이 좋게 나올 거라며 안심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엄살을 부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감사한 건지 아닌 건지.

평가가 올 때쯤은 엄마 인지가 조금씩 돌아올 때였다. 그때 엄마는 자신의 움직이지 않는 팔과 다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한 번씩 엉엉 울어서 엄마의 별명은 우리 병원 2호 울보였다. 병원에 셋 있는 자주 우는 환자 중 한 명. 엄마는 가끔 울었지만 울 때는 꼭 아이처럼 얼굴을 다 우그러뜨리고 눈물이 줄줄 흘렀고 그러면서도 소리를 죽여 울어서 가장 안쓰럽게 울곤 했다.

아마 같은 방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이 아니었다면 엄마는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을 거다. 특히 옆자리 이모는 아주 좋은 분이셨는데, 내가 어설프게 새벽에 기저귀를 간다고 시끄러워도, 엄마가 밤새 코를 골아도 단 한 번도 뭐라 하지 않으시며 엄마에게 자신의 병 극복기를 들려주곤 했다. 울어야 돼. 굳고 단단한 어투로 몇 번이고 그렇게 말씀하시며 엄마의 손을 잡았다. 지금 울어야 병이 안 돼. 언니, 잘 울고 있어. 나도 얼마나 울었나 몰라.

동병상련으로 힘든 시기를 지내며 겨우 웃음을 좀 보이기 시작한 무렵 장애 판정을 위해 공단 분들이 나왔다. 아. 지금 생각해도 눈을 꼭 감게 된다. 나는 왜 엄마에게 마음의 준비를 못 시켰는지. 당연히 확인해야 하는 절차들 하나하나가 엄마에겐 상처였나 보다.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와중에 엄마는 나까지 포함해 네 명의 사람의 주목을 받으며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이겠다고 침대에 누워 퍼덕거렸다. 엄마가 묵묵히 따라주고 있어 엄마 기분을 채 살피지 못하고 드디어 장애 판정 절차가 마무리된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물었다.

"이렇게 아프다가 다 나은 사람, 본 적 있어요?"

실어증이 있는 엄마라서 더듬더듬 말을 건넸지만 의미는 이랬다. 그 말을 알아들은 나 혼자 눈물이 터졌고 공단 분들은 채 알아듣지 못한 단어들에 갑자기 울기 시작한 모녀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셨다. 우리는 그날 한참을 울었다. 장애 판정을 위한 평가가 엄마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이제는 안다. 엄마는 그날 정식으로 장애인이 되었다.

지금은 엄마가 아픈 지 3년이 훌쩍 지나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는 삶에 익숙해졌다. 그때 붙들고 서로 운 게 민망할 만큼 잘 지내고 있다. 삶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어지더라. 엄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휠체어를 밀고 혼자 화장실에 간다. 나는 어설프게 김치를 만들다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추어탕 집에 용기 내서 엄마를 데리고 가보기도 한다. 이전보다 조금 더 자주 손을 붙들어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중에서 크게 변한 게 있다면, 내가 면허를 땄다는 것이다. 복지카드를 발급받고 엄마와 휠체어 택시를 처음 부를 땐 기뻤지만 생각보다 대기도 너무 길고 변수가 많았다. 길거리에 1시간 30분을 기다리는 게 몇 번 이어지고 나서 나는 면허학원에 등록했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면허 생각은 없었을 텐데, 막상 학원을 다니는데 운전이 너무 재미있었다. 학원을 갈 때마다 호들갑을 떨다가 결국 한 번에 합격해서 동네방네 자랑을 했고 지갑에 주민등록증을 빼놓고 운전면허증을 꽂아뒀다. 당장은 차가 없지만 그나마 엄마 복지혜택으로 자동차 취등록세는 면제라 통장이 좀 여유가 생기면 바로 중고차라도 사야겠다고 벼르는 중이다.

중고차 구경을 하던 중에 문득 다들 어떻게 다니는 걸까 의문이 생겼다. 살다 보면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다닐 일이 많지 않은가. 보도블록은 울퉁불퉁하고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다더니 도시 한복판이나 골목길에서도 말도 안 되는 내리막길이나 오르막길을 마주한다. 휠체어를 끌고 다니는 몇 년 동안 친절한 사람은 많이 만났지만 친절한 공간은 만나질 못했다.

서울장애인콜택시는 편하긴 하지만 대기시간이 들쭉날쭉이고 길어지면 한두 시간 길에서 기다리게 된다. 이마저도 장애등급 1급~3급 장애인만 이용할 수 있어 대중교통을 타기 어려운 다른 교통약자들이 소외되고 있다.

경기도는 시별로 교통약자 이동지원을 따로 운영하는데, 이번에 재정비되어 광역이동지원센터로 통합이 되었다. 최근 재정비된 경기도 교통약자 광역이동지원은 시를 넘는 이동도 도와준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아직도 아쉬운 점은 있다. 다른 시로 넘어가서 도착지까지 운행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근 지하철역으로 내려주면 지하철을 이용해 타지역으로 넘어가서 그 지역 콜택시로 갈아타야 한다. 품이 들 걸 생각하면 보호자로서 생각만 해도 아득해지는 이용법이다.

올해 초 지하철에서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휠체어 시위가 있었다. 지하철이 지연되어야 이슈가 되는 사안에 대해 공감보다 비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속이 쓰렸다.

우리는 다들 결국 아픔을 한 번씩은 겪을 것이다. 저주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길, 우리가 무슨 병을 앓고 어떤 카드를 손에 쥘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도 복지카드를 손에 쥔 엄마를 생각해 본 적 없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길이 조금 더 편하고 당연할 수 있게 모두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걸어갈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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