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일곱 번째는 우수상 수상작인 신범호 씨의 ‘더딘 걸음’이다.

더딘 걸음

신범호

오늘의 날씨 ‘맑음’

초여름이라 좀 덥긴 하겠지만 하루 종일 비도 바람도 없이 맑기만 할 거란 것을, 나는 아침 눈 뜨자마자 뉴스에서 확인했다 분명히. 그러나 순식간에 시커먼 먹구름이 일더니 비바람으로 몰아쳤다. 다른 사람들 얼굴 위로는 죄다 해가 쨍쨍한데 오직 내게만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쳤다. 기상청 정보가 내게만 완전히 비껴간 10년 전 몹쓸 그날.

평소와 다름없이 직장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마 양쪽을 예리한 무언가로 찌르는 것 같은 극심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왜 이러지? 요즘 내가 너무 과로를 했나?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혀는 목구멍으로 말려들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기도도 막혀갔다. 그래도 최대한 정신 바짝 차리고 휴대폰을 꺼내 급히 119를 눌렀다. 하지만 그날따라 웬 다른 응급환자들이 그리 많았는지 응급실마다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른 병원을 찾는 동안 좌측 편마비가 계속 진행되어 졸지에 뇌졸중 환자가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이었다. 2010년 7월 5일. 그때부터 내가 내게 새긴 마치 종신형 죄수번호 같은 나의 핸드폰 번호 뒷자리 1075.

고혈압, 뇌출혈, 뇌병변, 편마비, 머릿속에 남은 피 제거. 그리고 장장 여섯 시간 동안 이루어진 개두수술. 수술 후 용변도 내 손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나는 단 하나 죽음만을 생각했다. 아내와 자식들,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 수치스러움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게다가 재활치료를 위해 형편상 그나마 저렴한 지방병원을 전전하던 중 지인에게 사기까지 당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건만 뱀의 혓바닥에 그만 농락, 유린당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 꼴로 내가 더 살아서 뭐 하나. 어디 숨만 붙어있다고 사람이랴.

흔히들 말하는 중풍환자가 된 내게 지인들의 연락도 서서히 뜸해졌다. 그것은 고요한 멸시였고 뻔히 알아챌 수 있는 철저한 외면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은둔과 고립은 마치 수순인 듯 이어졌다. “언제까지 그렇게 집에만 있을 거예요? 어디 장애인복지관이라도 나가보든가.” 꼼짝없이 철제 침대에 붙박이 되어 멍하게 있는 내 처지를 아내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을 테지만, 동시에 또 그런 나를 바라보는 게 점점 짜증이 났던 게다. 누구나 측은지심도 사실상 한계가 있는 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아내의 말이든 자식들의 말이든 무조건 따라야 만이 그나마 국물이라도 얻어먹으며 내 존재를 보존할 수 있을 테니. 아니 연명할 수 있을 테니.

집을 나섰다. 당당하게 어깨 펴고 회사로 향하던 발걸음이 뒤뚱뒤뚱 우스꽝스러운 발걸음을 한 채 장애인복지관으로 향한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사회로부터 격리된 수용소 같은 장애인복지관. 내가 앞으로 드나들 곳이라곤 정말 이곳밖에 없는 것일까. 화가 났다가 억울했다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팍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래도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처음 얼마 동안은 당최 적응이 되지 않아 심기 불편하기만 하더니 하루 이틀 사흘, 장애인복지관에 다니면서 점점 마음의 평화를 찾아갔다. 복지관 사람들 모두 다 같이 비슷한 처지라 나도 따라 빠르게 동화된 것이다. 그리고 복지관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나는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인문학 프로그램 중 하나인 사진동아리에 들어갔다. 이 사진동아리에서는 강사 말에 귀를 쫑긋 경청하며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출사도 나간다. 이어 찍은 사진들을 보며 평도 나누고 조언도 한다.

“이 꽃 사진은 채도를 좀 높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오, 이 풍경 사진은 대비를 정말 잘 하셨네요.”

그러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다. 자연스레 지난 시절의 나를 되돌아보게도 된다. 누구한테든 훈계나 꾸중보다 칭찬과 덕담을 더 많이 하며 살 것을 하고.

시나브로 사진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는, 툭하면 목에다 카메라를 걸고 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갔다. 꽃이 피는 봄에는 꽃을 찍으러, 바다 출렁이는 여름에는 바다를 찍으러, 그리고 가을 단풍과 겨울눈을 찍으러. 오른쪽 한 손으로만 해야 하기에 카메라 세팅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과정 역시 나는 아주 즐겁기만 했다. 또한 내가 선택한 피사체가 렌즈에 담길 때는 오롯이 나만의 정신적 재산이 된 듯 희열도 느껴졌다. 어찌 생각하면 내 몸이 정상일 때가 지금보다 더 불행하지는 않았을까. 시간에 쫓겨 숨 헐떡이게 바빠 개인적 취미생활 따위 엄두도 낼 수 없는 세월들이었으니.

얼마 전 오랜만에 지인과 조우했다. 이런저런 말들 끝에 지인은 참담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들이 당뇨병 후유증으로 다리가 괴사되어 끝내 다리를 절단하고 말았단다. 나이 이제 겨우 서른두 살이라는데. 나는 나의 왼쪽 팔과 다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비록 펄펄 끓던 용암이 구멍 숭숭 난 현무암으로 굳어버린 것처럼 굳어버린 팔다리일지언정 그래도 이렇게 붙어는 있구나. 통째 잘려나가지는 않았구나.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는 타지 않아도 되는 거였구나. 아무렴 아직은 푸른 상추 이파리 같아야 할 이 사람의 아들보다야 내가 훨씬 나은 처지인 거겠지. 여전히 금세 닫힐 엘리베이터 문이 두렵고, 황급히 바뀌어버릴 횡단보도 빨간 불이 무섭지만, 또한 누가 보아도 뒤뚱뒤뚱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지만, 나는 쉬지 않고 걸어 나갈 것이다. 단지 좀 늦을 뿐 그곳이 어디든 반드시 도달할 것이다. 수십 년 늘 바쁘게만 살았으니 이제 좀 더디게 가도 되는 거잖아.

코로나로 인해 장애인복지관이 휴관된 지도 오래되었다. 갈 곳 없는 나는 그냥 집 앞 공원벤치에 잠시 앉았다. 그러자 비둘기 떼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와 연신 풀씨를 쪼아댄다. 어느 전깃줄에 걸렸던 건지, 아니면 가시덤불로 불시착을 했던 것인지, 가만히 보니 발가락이 구부러지거나 아예 발가락 한 개가 상실된 비둘기도 보인다. 그런데도 풀씨를 쪼는 것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어 보인다. 되레 정상으로 보이는 비둘기들보다 훨씬 열정적인 부리 질이다.

비둘기 떼 옆으론 초여름 꽃들이 한창이다. 얼마 전 혈액암 선고를 받은 아내, 이제는 나보다 더 약해져버린 아내에게 들꽃 몇 송이 꺾어다 줘볼까?

그래, 씩씩해져야겠다. 나이 칠십 나의 날씨는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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