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두 번째는 국민일보 사장상 수상작인 박성근씨의 ‘어머니와 홍시’다.

어머니와 홍시

박성근

“어머니, 저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날도 마루에 홍시 한 알이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어머니께서 미리 준비해놓으신 것임을 직감했다. 산 번지에 웃자란 바람이 일렁였다. 나는 문밖에서 일부러 큰 소리로 어머니께 내 외출을 알려드렸다. 예상대로 어머니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더듬더듬 문지방을 건너 오셨다. 나는 홍시를 피해 얼른 어머니를 부축해드렸다. 어머니는 눈이 잘 보이지 않으셨다.

이윽고 어머니께서 손끝으로 홍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학교에 가려던 내 손에 쥐어주셨다. 망막이 흐릿해졌다. 그렇게 어머니의 모습은 점묘화처럼 내 가슴에 점점이 찍혔다. 그 무렵 군대에서 제대하여 대학에 복학한 나와 어머니의 일상이었다. 이상하게 청년이 되면서부터 내 눈물의 끓는점은 어린 시절보다 더 낮아졌다. 그날 이후 벌써 마흔 번째 찔레꽃이 피고 졌다. 어머니는 찔레꽃 향을 참 좋아하셨다.

내가 중학교 때 우리 집은 큰 도시 산동네로 이사했다. 가난했지만 그때도 우리 집 광에는 늘 홍시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아버지가 홍시를 준비해 두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군 장교로 있던 큰 형님이 홍시를 준비했다. 아버지의 간곡한 유언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어머니께 자식들에게 손수 홍시를 나눠주는 기쁨을 안겨드렸다. 그 시절 우리 형제들이 광에서 직접 홍시를 꺼내는 것은 약속된 금기였다. 늘 배가 고팠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지켜드리는 불문율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에 어머니가 오시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친구들의 어머니가 떠나고 나면 선생님은 그 친구들의 머리를 한없이 쓰다듬어주셨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혼자서는 어디에도 가실 수 없었다. 그렇게 단 한 번도 학교에 오시지 못했다. 물론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그런 어머니를 친구들이 알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 아침이었다. 하늘은 쓸쓸하리만큼 유난히 높고 파랬다. 학교에 가려던 내게 어머니께서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머슴살이를 하셨던 아버지께서 수년 전 돌아가신 후로 늘 침울하시던 어머니셨다.

“성근아. 나 오늘 장애인 대잔치에 간다. 그런데 반 친구들이 몇 명이니?” “아, 그래요? 79명이에요. 그런데 엄마는 어느 분이 모시나요?”

어머니의 갑작스런 말씀에 나는 내심 놀랐다. 여러 생각들이 오르락내리락 자맥질했다. 어머니는 그냥 찔레꽃처럼 웃기만 하셨다. 다만 우리 학교에서 가까운 군청에서 장애인 대잔치가 개최된다는 말씀만 하셨다. 나는 반 친구들의 숫자가 왜 필요하신지 너무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어머니의 설레는 마음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수업시간 내내 아침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교실 벽에 기대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왠지 어머니가 불쑥 오실 것만 같았다. 기쁨과 두려움이 쿵쾅거리며 이리저리 구부러졌다.

그러다 하마터면 친구들 앞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멀리 교문 입구에 빛바랜 파란 줄무늬 치마를 입고 계신 어머니와 이장 아저씨가 서 계셨다. 아저씨가 교문으로 들어서지 않으려는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내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의 마음이 희미하게 읽혔다. 그러나 잠시 후 어머니와 아저씨가 함께 운동장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어딘가 숨을 곳을 찾았다.

“어어! 성근아, 저기 저 너희 엄........”

망을 보듯 밖을 지키느라 가까운 동네 친구 상수가 곁에 있는 줄도 몰랐다. 흥분하며 내게 소리치던 상수가 스스로도 깜짝 놀라 얼른 자기 입을 막았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 못했다. 문득 친구들의 도시락 달그락거리던 소리도 일제히 그쳤다.

그 사이 두 분이 멈춰 서서 무언가 말씀을 하고 계셨다. 이윽고 아저씨만 큰 박스를 들고 우리 반 교실로 걸어오셨다. 어머니 대신 홍시를 닮은 낮달이 아저씨를 따라왔다. 나는 혹시 아저씨가 친구들 앞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낼까 봐 부리나케 밖으로 마중 나갔다. 다행히 아저씨는 귀엣말로 “어머니!”라는 말씀만 하시고 내 자리에 박스를 내려놓으셨다. 그리고 노란 고무줄로 묶은 얇은 헝겊 뭉치를 건네시고 떠나셨다. 아저씨의 등에 늦가을이 찰방거렸다.

“성근아, 친구들과 같이 이 홍시 나눠 먹어라..그리고 사탕도 사 먹어라..”

박스 속 수북한 홍시 위에 놓인 쪽지였다. 삐뚤빼뚤한 문장은 갈수록 오른쪽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종이에 짐작으로 쓰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무슨 소중한 보물인 양 꽁꽁 묶은 헝겊을 급히 풀어보았다. 누런 10원짜리 동전 다섯 개였다. 실은 나는 며칠 전 어머니께 처음으로 사탕 타령을 한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동전을 꼭 쥔 채 친구들 몰래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시 동전을 세고 있던 내 작은 손이 덜덜 떨렸다. 쪽지에 눈물이 떨어지고 낡은 검정색 칠판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까 잠시 숨으려고 했던 것이 어머니께 큰 불효를 한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신 것 같아 더욱 괴로웠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창밖 작은 점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가난한 어머니의 돈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힘없이 시선을 거뒀다. 어머니는 내 까치밥이셨다. 그렇게 당신의 얇은 호주머니를 털어 따뜻한 가슴을 늘 내게 남기셨다.

홍시는 반 친구들 모두에게 돌아가고도 남았다. 내 깊은 슬픔을 눈치 챈 상수가 대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나눠주고 있었다. 이윽고 반장이 친구들에게 왠지 조심스럽게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홍시임을 알렸다. 학기 초 반장선거에서 두 표 차이로 나를 이겼던 읍내 소문난 부잣집 아들이었다.

나는 공부를 가장 잘했지만 가난은 나를 구원하지 못했다. 친구들도 다들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고맙다고 했다. 친구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열한 살의 모퉁이가 빙빙 돌았다. 오래 숨겨둔 내 불안의 괄호가 끝내 풀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은 후련했다.

어머니께서는 21년 전, 찔레꽃 미치게 흐드러지던 날 내 곁을 떠나셨다. 젊은 날, 나는 어머니의 홍시와 나무토막 같았던 아버지의 손을 떠올리며 공부했다. 입술이 부르트고 때로 코피를 쏟으며 이를 악물었다. 덕분에 공직에서 국장으로 은퇴 후 사회복지학 박사 과정을 거쳐 복지 분야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베이비 박스에서 버려진 아이들이 사는 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등불을 달아주고 싶었다.

이제 나도 칠순을 향해 늙어가지만 초조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두툼한 시간 동안 아무리 헹궈도 묽어지지 않는다. 지금도 누군가 내게 홍시를 건네면 울컥 목울대가 잠겨 한참을 못 먹는다. 그렇게 가뭇한 기억 속 어머니의 홍시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 빨갛게 익어 있다. 

“어머니...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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