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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고용 인식개선 ‘Talent Contest’ 입상작 소개-⑩

산문 부문 입선 수상작 5편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7-11-01 09:10:57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가 장애인 근로자 및 근로의지가 있는 장애인의 다양한 재능 역량을 계발하고, 장애인도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근로 주체임을 사회에 알려 올바른 장애 인식 개선에 기여할 목적으로 지난 2000년부터 ‘장애인 고용 인식개선을 위한 Talent Contest’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18회를 맞은 Talent Contest에는 운문, 산문, 사진, 컴퓨터그래픽, 광고영상/스토리보드 등 5개 부문에 총 348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작품 770점을 응모했고, 1·2차 심사를 통해 총 55점이 최종 선정됐다.

에이블뉴스는 운문, 산문 부문의 입상작 26점을 총 10회로 나눠 소개한다. 마지막은 산문 부문 입선 수상작 5편이다.


첫 출근
양 혜 린(여, 시각)


요금 첫 출근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청년들이 역대 최고치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93학번 이었던 내가 졸업 할 당시 즈음인 1997년 말 IMF 가 닥쳤지만 그래도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하거나 취업 준비 몇 년 후 바로 취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다 비장애인들의 얘기 였다. 취업의 어려움이 없던 그 시절에도 난 지금의 청년들처럼 첫 출근의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고 맘 속으로 무수히 취업을 갈망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때 당시 나는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학교를 다닌다 는 것과 취업을 한다는 것의 차이는 실로 컸다.

학교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공부였다. 아무리 장애인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든 공부를 어느정도 하거나 중간정도만 하게 되면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취업은 생계와 연결된 것이고 고용을 하는 입장에서도 하나의 인간을 효용성의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당연히 일 터라는 곳에는 장애인은 지극히 효용성이 떨어지는 인간이기 때문에 정말 어렵고 진입조차 힘든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학교생활과는 달랐다.

나 또한 예외없이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취업이 정말 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시도 조차 못하고 주저앉아 버려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그 때 당시에는 90년대 중 후반이라 회사 채용 시 신체검사가 요구 됐고 채용 조건에도 어떤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력을 요구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벼룩시장, 교차로 같은 무가지를 안보이는 눈으로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며 “구인” 란에 있는 내용을 거의 외우다 시피 했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해 필요한 부분을 물어보고 면접 시간을 약속했다. 그러나 면접 까지 연결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영세한 업체들이 대부분이라 막상 취업을 하더라도 급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한 번은 만화책에 “18세 미만 불가” 라는 스티커를 붙이는 일을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주급이 입금 되지않아 업체에 전화를 했더니 전화는 받지 않고 나중에는 결번이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순간 속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광고를 했던 무가지 회사에도 전화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돈을 받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겐 쉬운 첫 출근이 나한텐 왜이리 어려울까 또 왜 이런곳 밖에 다닐 수 없을까? 그래도 어디다 하소연 할 때도 실질적 도움을 요청 할 때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참 어려운 시기였고 시대적으로도 힘든 시절 이었다.

텔레마케터(Telemarketer)

텔레마케터의 사전적 의미는 “전화를 통해 구매자에게 상품홍보와 판매 활동을 하는사람” 이다.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감도 적고 말주변이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한 조건 없이 쉽게 도전해 볼수 있는 직업이다. 그리고 홍보를 위한 스크립터만 외운다면 시력이 불편한 장애인 일지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주급을 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 고민에 쌓여있던 나는 텔레마케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역시 무가지를 통해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모 회사의 텔레마케터 광고를 보게 되었다. “○○ 건설 사무소”에서 내근직 텔레마케터를 구한다는 구직광고를 낸 것 이었다. 주요 업무는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전화문의를 받아서 응대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전에 했던 일과는 많이 다르고 강남에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라 어느정도 기대를 하고 첫 출근을 했다. 그런데 하루에 걸려오는 전화는 고작 두 통 뿐 이었다. 열심히 외웠던 스크립트도 별 소용이 없었다. “ 모델하우스 위치 좀 알려 주세요” 등의 간단한 질문이 전부 였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이사라고 하는 사람이 손님을 데리고 와서 차를 타달라는 지시를 했다. 한 달 남짓 지났을까 여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사가 내가 눈이 많이 나쁘다는 걸 눈치 챈 이후에 약간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아쉬웠지만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 이후 또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던 끝에 부모님의 권유로 외삼촌이 거주하던 canada에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어학연수의 형태로 가기로 했지만 장기적 계획으로는 어학연수 후 대학을 진학하여 나중에는 아예 이민까지 하겠다는 각오가 서있었다. 나는 1998년 9월 12일 드디어 canada vancouver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course도 입학 등록이 되어있었고 Home stay도 1년 계약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아무 걱정없이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vancouver에 도착한 후 내 생활은 너무 여유롭고 좋았다. 학교에선 그때 당시만해도 장애인에 대한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던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학생 ESL course 학생에게 까지도 편의 지원을 해 주었고 학교에는 장애인학생을 담당하는 coordinator가 상주해 있었다.

물론 4년제 정규대학에 속해있는 ESLcourse였기 때문에 그러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정말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의 생활도 100% 만족스럽진 않았다. 우선 대중교통이 일찍 끊기고 uptown과 Downtown이 나눠져 있었기 때문에 주택가 주변은 조금만 어두워져도 집을 찾기가 어려웠고 인적도 드물어 도움을 요청 할 수도 없었다.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난 결정을 내려야 만 했다. 마지막 남은 ESL course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 계속 공부하여 직업을 얻어 이곳에서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그냥 어학연수만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것인가 하는 선택에 대한 결정 이었다. 오랜 고심 끝에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물론 여러 가지 시스템이나 여건이 장애인이 살기에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지만 외국인인 내가 native처럼 직업생활을 영위하기 까지는 적지않은 시간과 돈이 투자 돼야만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계속 그곳에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나는 귀국을 결심했고 2년 정도가 지난 2000년 11월에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난 다시 무엇을 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 즈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로버트 할리 전화영어 학습지 CES에서 전화영어 강사를 모집한다며 한번 응시해 보는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사실 그 때 나도 윤선생영어와 튼튼영어 같은 몇 군데 학습지회사와 동네 영어학원에 이력서를 제출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참 이었다.

며 칠 후 전화영어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학습지 회사와 면접일자가 겹치게 되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전화영어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오전 오후로 나눠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학습지 회사 면접을 본 후에 난 불합격을 직감했다. 면접에서 “ 돌아다니며 일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라는 질문을 했다.

물론 대답은 “할수 있어요”라고 했지만 사실 자신감이 없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나는 학습지 회사가 아닌 전화영어 회사에서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일 자체는 별로 어려운 것이 없었다. 그냥 교재를 외워 회원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일주일 후 슬슬 교재판매 요구 압력이 들어왔다. 기존회원의 전화영어 수강 연장 뿐 만 아니라 회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무료레벨 테스트를 한다고 한 후 테스트 후 sample 교재와 테이프를 보내주고 구입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강사는 표면적 타이틀 이었고 역시 텔레마케터 “전화를 통해 구매자에게 상품홍보와 판매 할동을 하는사람”이었다. 물론 아예 영업만 하는 것이 아니니 부담도 적고 사람들의 영어 실력이 늘 때마다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아예 텔레마케터 역할을 안 할 수는 없었다. 1998년 고뇌 끝에 어학연수 까지 다녀 왔지만 결국 제자리 “텔레마케터”였다. 혹자는‘어학연수가 뭐 대수냐?’할 수 있지만 1998년 당시는 거의 어학연수 가는 일이 드문 일 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학업을 마치고 오면 적어도 영어학원의 강사가 되었다. 그런데 결국 난 제자리 였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참담하다는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놀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회사를 계속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사회복지 특수교육 그리고.... 안마

전화영어강사를 계속하던 2003년 난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아마 이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예견되어있던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뒤에 강사라는 호칭이 붙어도 텔레마케터는 텔레마케터 였다. 영업 실적을 제대로 내지 못하면 월급에도 영향이 있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러던 중 많은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섭섭한 마음은 전혀없었고 너무나도 행복했다.

회사를 그만 둔 뒤 우선 나 같은 유형의 장애인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현재 무슨 일을 이 대한민국에서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일단 복지관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고 직접 방문해 상담을 받아 보기도 하였다. 선천적 저시력 이었지만 거의 장애인 재할이나 복지관에 대해 알지 못했던 나는 기본적인 기초재활 교육부터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초재할, 정보화 교육 등을 복지관에서 이수했고 이어 일산직업능력개발원(한국장애인고용공단 산하기관)에서 직업훈련을 받았다. 개발원 훈련을 다 마친 뒤 일산에 있는 새빛안과 병원 전화교환원으로 취업했으나 또 텔레마케터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6개월 정도 다니다가 그만 두었다.

복지관과 직업능력개발원을 통해 얻은 인맥을 동원하여 사회복지학과와 특수교육학과가 개설돼 있으면서 장애인이 공부하기에 편한 즉 편의시설이 잘 돼있는 학교를 알아봤다.

대구대학교 나사렛대학교 등 몇 군데 추천을 받았다. 그리고 삼각지에있는 서울맹아학교도 알아봤다. 나는 몇 주일 동안의 고민 끝에 나사렛대학교 편입을 결정하게 되었다. 우선 내가 편입이라 장애인특례입학 혜택도 받지 못하는 상황 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공부기간을 줄이면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적합하다고 판단 되었기 때문에 특수교육전공은 우선 배제 했다.

그 다음에 고려한 것은 얼마나 많은 자격증을 취득 할 수 있는지의 유무 였다. 그런 이유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 할 수 있고 더불어 직업재활사 자격증을 취득 할 수 있는 나사렛대학교 인간재활학과 편입을 결심 하였다. 나이들어 어린 학생들과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다니던 90년대와 2000년대는 너무 달랐다.

93년 당시 만 해도 레포트를 자필로 썼는데 2007년의 대학에서는 거의 모든 레포트를 컴퓨터로 써야 했다. 그래서 적응하는데 좀 시간이 걸렸지만 ‘열심히 해야지’하는 생각으로 노력했다. 노력의 결과 였는지 성적도 꽤 잘 나왔고 장학금도 한 학기정도 받았다.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과연 여기 까지 나왔는데도 취직을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냥 자격증하나라도 더 따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졸업하자마자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과 요양보호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해 취득했고 졸업과 동시에 나오는 직업재활사 자격증도 취득앴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걱정하던 중 교수님의 추천으로 천안에 있는 충남중증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취업 할 수 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그래도 충청남도에서 설립한 자립생활센터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처우가 좋았다.

그 곳에서 많은 장애인들을 상담하고 재활 과정을 보면서 보람도 많이 느꼈고 즐거웠다. 충남에서 처음으로 장애인 영화제도 개최했고 장애인들이 장애물 제한 없이 다닐 수 있는 음식점이나 상점들을 소개하는 안내책자도 만들어 보급 하였다. 물론 센터장님의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나름대로 내가 처음부터 기획하고 구성해 일을 만들어 나갔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프로로절도 내서 선정 돼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 때에도 당연히 일하는데 어려움은 있었지만 창의적인 일이나 상담을 하는 일 그리고 내가 전담하여 기획하는 일등은 시력의 한계를 제한적으로 느끼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활동보조인을 간접 활용하여 사무실에서 보조인력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재미있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취업이 다가 아니다.(취업이 직업재활의 끝은 아니다.)

충남중증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아무 걱정 없이 다니던 어느날 센터장님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퇴사하고 다른 직원들도 조건이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나도 보람은 느끼고 있었지만 천안에서 자취하며 생활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센터 월급은 사회복지사 호봉체계에 맞게 월급을 주고 있었지반 사회복지사 자체가 월급이 너무 적은 직종이었기 때문에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편입해서 졸업한 남자 동기들도 거의 경제적 이유 때문에 사회복지사 일을 그만두고 일반회사로 이직 하였다. 그래도 4년제 정규대 졸업자이고 전문직인데 대기업 임금과 아니 중소기업 임금과도 너무 많은 차이가 났다. 거의 배 정도 차이가 났다. 그러니 우수한 인력이 특별한 사명감이 없는 한 이 쪽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현상 이었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7년 전만 하더라도 이 쪽 분야에서 제일 월급을 많이 받는 것은 사회복지 공무원 이었다. 공무원의 직업적 위상을 누리면서 사회복지사의 보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당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나 같은 시각장애인들도 차별없이 시험을 특수 프로그램이나 확대문제지를 이용해 볼수 있었고 시간 연장도 되었기 때문에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2011년 2월 퇴사 하고 집인 서울로 바로 올라와 공부를 시작했다. 학원 강의는 듣지 않고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강의를 수강했다. 그리고 집 근처에 있는 은평구립도서관에서 공부 했다. 아침 7시 30분에 가 거의 도서관 문이 닫히는 저녁 10시 정도까지 공부 했다. 12월에 시럼이 있었는데 다행히 합격하여 서울시 모구청에서 일하게 되었다.

물론 힘든 일도 많았다. 시험준비 기간 중 중증장애인특별채용(무시험)에 응시해 면접을 봤지만 낙방했다. 12월 시험을 보고 든 생각이지만 국가나 지자체에서 중증장애인특채를 시행 할 거면 중증장애인은 다 무시험 면접으로 뽑고 아니면 장애 등급별로 중증과 경증을 나누어 필기시험과 면접을 보는 것이 더 합리적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시럼보기가 더 힘든 중증과 경증이 다 장애구분모집에 응시해 시험을 본다면 당연히 중증장애인에게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중증장애인특채 조건에 중증장애인이 모두 해당 하는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당시 나는 시험제도가 너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취업이 되었지만 나에겐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출근을 했는데 나 같은 시각장애인이 처음인 구청에서는 뭘 해줘야 할이지 알지 못했고 나 또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2012년 4월 30일부터 나는 나 스스로를 직장 사람들에게 인식개선 시키기로 했다. 나에 대해 엄밀히 말하면 장애에 대해 설명하고 보조기구 지원을 독려하고 내 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이런 일들을 해 나갔다. 사실 아직 이 일들은 계속 되고 있다.

직업의 특성상 사람들이 계속 순환보직으로 바뀌기 때문에 바뀔 때 마다 위에서 말한 일들을 계속 해야 했다. 물론 아직 미흡하다. 이런 노력은 나 혼자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임용한 측에서도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엔 나를 임용한 자치구에 대해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맘도 많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몰라서 그런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교육이 비장애인 위주로 어렸을 때부터 장애인식개선 교육이랑은 거리가 멀게 이루어 졌기 때문에 내가 겪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인식개선을 주위사람들에게 할 것이다. 그리고 크지 않은 소망 이지만 보수적인 이 조직에도 변화가 았기를 기대해 본다. 예를 들어 임용과 동시에 보조기기 지원, 장애유형에 맞는 직무분석에 따른 업무배치, 근로지원인 지원, 승진에서의 차별 금지 등이다. 이미 서울시 본청에서는 이런 것들이 이루어 지고 있지만 아직 자치구에서는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난 지금도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직업재활 책에도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직업적 중증장애인”이라고 씌어져 있다. 그 만큼 직업생활을 하기 힘든 장애유형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 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경험으로 비춰 볼 때 장애인에게 취업보다 중요한 것이 게속 직업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재반조건들이 마련되는 것인 듯 하다.

따라서 장애인 인식개선은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 인 것 같다. 지금 보다 더 환경이 좋아지고 인식개선이 돼 나 같은 장애인들이 더 많이 첫 출근의 기쁨을 맛보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첫 출근이 첫 출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동안의 출근으로 이어 지길 마음 속 깊이 바래본다.


‘평행 이동’-PARALLEL MOVEMENT
양 주 혜(여, 시각)


프롤로그
"평행우주요?"
"네, 어떤 선택이나 가능성에 따라 생기는 경우의 수 만큼 새로운 세계가 평행을 이루며 계속 만들어진다는 이론이예요!"

들어본적이 있으신가요? 이 신기한 이론에 대해서... 사실 이 이론은 흥미롭긴 하지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흠입니다. 무수히 만들어지는 그 세계는 평행선상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현존하는 사람 중에 자신이 사는 세계와 완벽히 평행을 이루는 또 하나의 세계 '페러렐월드'에 다녀온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왜냐하면 오늘 제가 들려드리려 하는 것이 바로 그 믿기 힘든 이야기이거든요. 물론 그 신기했던 경험만을 들려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너무나도 많은 걸 알게 되었고 그걸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그럼 시작 해볼까요?

일단 제 소개를 좀 해드릴게요. 나이 스물여섯, 직업은 변호사입니다. 성별은 여자이고 전화번호는... 아 그건 괜찮으시다고요? 알겠습니다. 참 잊을 뻔 했는데 저는 눈을 맞추며 이야기 하는 것이 조금 어려운 사람입니다.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타고 났거든요.

커다란 글자나 사람, 사물의 형태 정도만 알아 볼 수 있는 시력이죠. 강호영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 소개를 듣고 나면 "시각장애인이시라고요?", "그런데 변호사라니... 대단하시네요..." 등의 반응을 보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런데,"라는 반응이 그닥 반갑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바로 '과연 나한테 장애가 없었어도 그들이 그런 표현을 쓸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한테는 그 말이 마치 많은 변호사들 중 한사람이 아니라 장애가 있으니 힘들게 힘들게 노력해서 변호사가 되었구나 하는 동정의 한마디로 들렸거든요. 하지만 머지 않아 그 원인이 자격지심에 의한 것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이렇게 답합니다.

"네, 저도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궁금 하신가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그럼 슬슬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글의 시작부터 궁금해 하고 계실 '평행우주'라는 생소한 그 이론에 관련된 저의 경험담을요.

이 이야기는 평소와 다름 없었던 저의 아침 풍경부터 시작됩니다. 365일 중 300일 이상은 꿈을 꾸며 얕게 자는 탓에 아침을 상쾌하게 맞지 못하는 저는 매일같이 자명종과 다투다가 겨우 겨우 눈을 뜨는 게 일상인 사람입니다.

주변에서는 그럼에도 지각 한번 하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라고들 하더군요. 그래서 그 날도 억임 없이 알람소리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서야 잠에서 깬 저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죠. 그런데 하필 역의 출입구는 공사를 시작 했는지 막혀 있고 그 날 따라 근처에 사람들도 거의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있는 감각 없는 감각을 다 동원 하여 다른 쪽 출입구를 찾다가 겨우 계단과 만나 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 안은 더욱 한적 했습니다. 아니, 한적 하다는 말로는 그 공기를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정적이 흘렀어요. 마치 그 곳에 아무도 없다고 해야 믿어질 정도의 정적...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었던 건 지하철은 다닌다는 사실이였습니다. 소리가 들렸거든요.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저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승강장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늘 승차 하는 1-1번 문을 통해 열차에 올랐죠. 열차 내부도 조용 했습니다. 허나 그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이 아니였어요. 왜냐하면 제가 지하철을 타는 역은 종점이였고 첫 번째 칸이니까 사람이 없을 수도 있겠다 생각 했죠. 그래도 그렇게까지 인기척이 없는 지하철을 타보기는 처음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조금 무섭기도 하더군요.

뭐, 그래도 '별 탈 없이 잘 탔으니 됐나?'라는 생각을 하며 달리는 동안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싶어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그 잠깐의 숙면이 든든했어요. 마치 도착할 때까지 잠을 방해 하는 안내방송이 한번도 나오지 않다가 제가 내릴 역에서 딱 방송을 틀어 저를 깨워준 느낌이랄까요? 여튼 말로 설명 하기 힘든 약간은 기묘한 출근길이였지만 그러려니 했습니다. 여기까지는요.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분명 매일 오가는 역, 걷는 길이라는 건 틀림 없는데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이유 모를 위화감이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 하게 온 몸에 전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잠시 후 경악 할만한 일을 겪게 됩니다. 매일같이 출근 하는 저의 사무실 건물이 하루 아침에 다른 건물로 바뀌어 있는 기상천외한 일을요.

처음엔 너무나도 익숙한 그 곳을 잠에 취해 못찾는 건가, 설마 그럴 수가 있나, 하는 등의 생각도 해봤지만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그런 건물은 모른다 하고, 뒤바뀐 건물 안으로 들어가 관리자 분에게 여쭤봐도 이 주변에는 없는 건물 같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거기다 휴대전화까지 먹통... 정말 난감 했죠. 도시 전체가 저에게 몰래카메라를 연출 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거든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황을 쉽게 받아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당연하게도 한동안 그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서있을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 동안 제가 알아낸 거라고는 저의 사무실이 사라지고 대신 나타난 그 건물에 무슨 커다란 출판사가 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이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나 고민 하다가 차라리 다시 되돌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하철역 방향으로 몸을 돌리려던 순간,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의 이름이 들려왔습니다.

"강호영이라고 합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네, 접수 되었습니다."

자신을 강호영이라 밝힌 그 사람의 목소리 또한 어디선가 들어 본적이 있었습니다. 뭐랄까, 녹음된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 했어요. 그 상황을 느낀 그대로 표현 하자면 또 한 명의 제가 그 자리에 있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요. 하지만 잠시 후 저는 그 판타지 소설 같은 생각이 비단 저의 느낌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뭐야, 이 사람? 나랑 똑같이 생겼잖아!!"

방금 전 들었던 그 목소리였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가려다 저를 발견한 그 사람이 가장 처음으로 했던 말이였죠. 그 사람 입장에서는 혼잣말이였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냥 무시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싶어서 얼떨결에 저도 대답을 했습니다.

"저... 목소리도 같은 것 같아요..."

이런 저의 말에, 아니 목소리에 그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출생의 비밀 같은 걸 이유로 어릴적 헤어진 쌍둥이 형제와 만난 드라마 속 여주인공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뭐 이런 생각도 지금에서나 할 수 있을 만큼 당시에는 저도 많이 놀랐었지만요.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그 때는 그 사람 말을 듣고 생긴 것 까지 똑같다는 걸 알게 된 직후였으니 말이죠. 하지만 저희는 그런 당혹스러움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곧 그 자리를 피해야 했습니다. 이유는 예상 하시는 대로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저희를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안되겠네요. 일단 여기서 나가요."

그래도 또 한명의 호영씨는 그런 상황에서 제 손에 들린 흰지팡이를 보고 제가 자신의 안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 차렸는지 제 손을 잡고 건물 밖으로 나가더군요. 그리고는 목소리를 내는 게 어색 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제가 먼저 말을 건냈습니다.

"이제 어떡하죠?"
그러자 그녀는 여전히 당황 반, 놀라움 반의 감정을 그대로 들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우... 적응이 안되네요. 기분이 이상한 게... 뭔가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는 싶은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그 상황에서 한가지 저와 그녀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는 그 세계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건 그녀의 말이나 행동에서 금방 알 수 있었죠. 애초에 그녀는 그 출판사가 있는 건물에 볼 일이 있어서 온 사람이였으니까요.

"표정을 보니 그 쪽도 저와 더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네요??"
"아, 네..."

결국 저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 눈엔 우리가 쌍둥이 처럼 보일 거라며 사람들 시선은 너무 의식 하지 말자는 농담 섞인 이야기라던가 자신이 잘 아는 조용한 카페가 있으니 일단 거기로 가자는 얘기 등을 하면서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을 최대한 없에주었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그녀가 잘 안다는 그 카페까지 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카페에 도착한 저희는 구석진 곳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 한 잔씩을 시켰습니다.

"무슨 이야기 부터 하면 좋을까요?"

자리에 앉은 다음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그녀였어요. 그래서 일단 저희는 서로의 소개를 듣기로 했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 했습니다.

"제 이름은 강호영이고 나이는 26살입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예요. 유명한 작가는 아닙니다. 아직은요..."

사실 출판사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이미 어느정도는 예상 했었습니다. 물론 나이까지 같다는 사실은 몰랐지만요. 그리고 이어진 제 소개를 들은 호영씨는 이름과 나이가 같다는 사실에 새삼 또한번 놀라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이후 저는 오늘 아침 저에게 있었던 기묘한 일에 대해 말해줘야 겠다고 생각했고, 물론 말로 표현 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 해서 최대한으로 제가 겪은 일에 대해 얘기 해줬습니다.

저는 이야기 하면서도 '과연 이 사람이 내 말을 믿어줄까?'하는 반신반의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녀는 제말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를 더 놀라게 했던 건 제 얘기를 듣고난 뒤에 그녀가 보인 반응이였어요.

"혹시 평행우주라는 거 알아요?"
"평행우주요?"
"네, 어떤 선택이나 가능성에 따라 생기는 경우의 수 만큼 새로운 세계가 평행을 이루며 계속 만들어진다는 이론이예요!"
들어 본적은 없었지만 설명을 듣고나니 무슨 가설인지는 알겠더라고요.
"그러니까 호영씨 말은 지금 제가 그 평행선상의 세계에 와있다는 이야기인가요?"

저는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저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저는 오늘 평소와 다른 이상한 일을 전혀 겪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쪽, 아니 호영씨가 제가 살고 있는 이 세계로 이동되어 온 게 아닐까 한다는 거죠!"

그녀의 말은 묘하게도 싱빙성 있게 들렸어요. 아니, 그 때는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달리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저의 생각과는 무관 하게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평행우주에 관해서는 전에 한번 책으로 읽은 적이 있어요. 어느 한 쪽에서 다른 세계의 사람을 간절히 만나고싶어 한다거나, 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평행한 두 세계 사이를 오갈 수 있다 하더라고요! 문제는 왜 호영씨가 이 세계로 오게 됐는지 그 이유인데..."

그녀의 생각을 듣는 동안 저는 줄곧 그녀가 매우 즐거워 하고 있다는 걸 느겼습니다. 마치 자신이 발견한 재미있는 게임이나 만화책에 대해 친구한테 이야기 해주는 듯한 아이 같았거든요. 그런 그녀의 말에 의하면 저는 제가 살던 세계와 평행한 그 곳에 어떤 이유로 인해 오게 되었고 자신과 제가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어린시절이라던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 겪어왔던 어려움, 현재에 대한 불만 등과 같은 주제를 놓고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습니다.

대화를 통해 그녀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건 어렸을 때 어떤 친구와 만난 다음부터 나중에 재밌는 이야기를 써서 그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에 작가라는 꿈을 갖게 되었다는 것과 그녀가 꽤나 오랫동안 여러 출판사를 돌며 원고를 보여줬지만 한번도 반응이 돌아온 적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점점 지쳐서 요즘들어 꿈을 포기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는 것 등이였어요.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호영씨는요?"

그녀의 물음에 저 역시 제 이야기를 늘어 놓았죠.

"저는 저의 장애를 완전히 수용 하는 게 가장 어려운 듯 해요. 사람들은 장애는 극복하는 거라고 흔히들 이야기 하지만 사실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일부와 다름 없는 장애를 받아들이는 게 가장 필요 하고 또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 하거든요.."

사실 그녀와 이야기 나눴던 그 때만 해도 저는 변호사라는 제 직업을 밝힐 때마다 느껴지는 사람들의 지나친 호응이 어쩐지 부담되고 불편 했었거든요.

"그렇군요..."

그 후에도 한참동안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왠지 그녀와는 오랜 친구처럼 편했어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샘이였으니 그랬던 거겠죠? 그렇게 저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애초에 그 대화를 왜 시작 했었는지 같은 건 안중에도 없게 되었고 결국은 장시간의 대화로 배고픔을 격하게 느낄 때 즈음에야 한숨 돌리고 시계를 확인 했습니다.

"우리 뭐 좀 먹을까요?"

점심시간은 이미 지나버렸고 저녁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기로 하고 카페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메뉴를 정하다 문득 제가 있던 곳에서 자주 가던 식당이 그 곳에도 있을까 궁금해져서 별 기대 없이 호영씨에게 물어봤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신기 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도 그 가게 단골이라고 대답 했고, 저희는 그 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죠. 그 때는 사장님의 목소리나 말투가 제가 알던 그대로라 마치 원래 세계로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들더군요. 아, 물론 메뉴는 조금 달랐지만요. 식사를 마친 이후에는 그 쪽 세계의 호영씨네 가있기로 했습니다. 뭐, 어차피 저에게 돌아갈 집은 없었으니까요...

사실 처음에 그 세계로 가게 되었을 때는 다시 한번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면 집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녀의 집 주소를 확인 하고난 뒤에 그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쪽의 강호영 집 주소가 호수 맨 뒷자리 까지 제가 사는 곳과 완벽하게 일치 했으니까요...

그녀의 집에 도착한 저는 방 구조까지 똑같으면 어떤 기분이 들려나 하는 생각 등을 하며 집 안으로 들어 갔지만 제 방과는 확실히 다른 곳이였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종이 냄새로 알아 챌 수 있을 만큼 책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책 한권 한권에는 적어도 네다섯번은 읽었겠구나 하는 흔적이 남아있었어요.

덕분에 저는 그녀가 얼마나 간절히 작가라는 꿈을 키워 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러가지 책들을 만져보던 중 제 손에 잡힌 작은 노트 한 권이 있었는데 그 노트는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얇았고 중앙이 볼록 해서 펼치면 뭔가가 만져질 것 같았어요. 저는 그 노트를 책장에서 꺼내 펼쳐 봤습니다. 그 안에는 어린 아이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입체 모형 같은 게 장마다 붙어 있었고 제가 한장씩 만져보고 있으니 그녀가 옆에 와서 말을 걸더군요.

"그거 제가 어렸을 때 만든 동화책이예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모형이 붙어있는 쪽 바로 옆장에 적힌 글씨를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저는 그 동화가 왜 입체 모형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어요. 동화는 한 아이가 놀이터에 있는 어떤 아이에게 말을 걸며 시작 되는데 홀로 놀이터에서 놀던 그 아이가 저처럼 눈이 불편한 아이였거든요. 순수 했던 어린 시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서툴지만 예쁜 동화책이였습니다.

“읽어줘서 고마워요!”
“이 책 호영씨가 가질래요.”
“이렇게 열심히 만든 걸 저한테 줘도 돼요?”
“네, 옛날에 만났던 친구한테 주려고 만든 건데 호영씨 줘도 될 것 같아요!!”
“그럼 나중에 그 친구 만나면 줘야죠!”
제 말에 그녀는 그냥 조용히 웃기만 했어요.
“오늘 고마워요, 호영씨...”
“저두요...”
“계속 불렀는데도 제가 제이름 부르는 거 왠지 어색하네요!”
“그러게요~ 이런 오글거리는 얘기 해서 더 그런 거 같지 않아요?”

저희는 작은 원룸에 이불을 펴고 누워서 한동안을 평범한 여자들의 수다로 채우다가 잠 들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익숙한 구조의 방에서 익숙한 촉감의 이불을 덮고 있었어요. 네, 제 방이 틀림 없었습니다.

‘꿈...이였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 손에 작은 노트 한 권이 잡혔습니다.
그녀는 저희가 만나게 된 대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 날, 기분 좋게 퍼지는 책 냄새가 가득한 그 방에서 잠에 들기 전까지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저는 제가 하고 있던 고민들이 결국은 스스로에게 자신을 갖지 못하고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얻었으면서도 장애를 핑계삼아 자격지심을 부린 것 뿐이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장애’라는 단어에 쌓는 편견은 결국 그걸 손에 쥔 이들이 스스로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저에게 깨닫게 해줬어요. 그녀도 저를 통해 얻은 게 있다면 좋을텐데 말이죠. 뭐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는 그 세계에서 언젠가 유명한 작가가 되겠지만요.

에필로그
아주 어렸을 때 집 근처 놀이터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나이가 나와 비슷해 보이길래 같이 놀자고 말하려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 아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챘
다.

“야! 너 왜 울고 있어?”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오늘까지 그 날을 기억하려 해쓴 덕에 그 때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지만 당시 나는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였고 딱히 정의감에 불타는 성격도 아니였기 때문에 그 때 왜 그 애에게 말을 걸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하지만 단지 같이 놀 친구가 필요 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는 건 분명 하다.

“친구들이 자꾸 같이 안놀아주고 놀리기만 해서 너무 화가나!”
그 아이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 했고 나는 그 아이에게 아마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럼 혼자 놀면 되지? 책을 읽어도 되고!! 비디오게임을 해도 되고!!”
하지만 곧 나는 책을 읽는 것도, 비디오게임을 하는 것도 그 친구에게는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사실과는 전혀 상관 없이 우리는 노을이 질때까지 신나게 놀다 헤어졌다.

“또 보자!”
그날 집으로 돌아간 나는 색종이와 테이프, 몇가지 미술 도구들을 펼쳐놓고 동화책을 만들기 시작 했다.

그리고...
‘이정도면 그 애가 만져보고 읽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며칠이 걸려서야 볼품 없는 한 권의 동화책을 완성 시켰다. 책을 만들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나름 즐겁게 만들었던 것 같다. 딱히 그 친구를 동정 해서 그런 일을 했던 건 아니였다. 어렸지만 그 정도의 감정은 분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확실히 기억 한다.

‘아니 어쩌면 그 때는 동정이라는 감정을 몰랐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냥 그 애와또 놀고 싶었던 거다. 그 때 나는 그냥 매일 매일에 충실한 어린애였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 놀이터에서도 동네 어디에서도 그 아이를 만날 수는 없었고 당시에는 이사를 갔나 싶어 나중에 다시 만나면 주려고 책장 한켠에 잘 보관 해두었던 그 동화책은 어느 순간부터 내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서 경 애(여, 시각)


울컥 안타까움이 솟구쳤다. 깊은 우물처럼 잔잔한 눈망울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서러움이 병실을 덮는다.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어깨가 들썩인다. 아버지는 당신의 마음만큼 고요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굳게 닫혔던 입술을 달싹인다.

“울지 마라. 다른 사람은 울어도 너는 울면 안 된다.”
눈물이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냇물처럼 흐른다.
“저 하늘을 봐라. 문이 열리지 않니? 이 애비가 들어가야 하는 문이다. 이렇게 갈 곳이 있는데 울기는 왜 울어?”

하늘은 어떤 걸림돌 없이 자유롭게 흐르고 있다. 아버지는 허물을 벗은 나비같이 힘찬 날개짓을 하더니 다시 애벌레처럼 반원을 그리며 눕는다. 70평생 닳은 몸은 침대 반에 반도 차지하지 못한다. 침묵하던 작은 몸은 드디어 마지막 이별의 몸짓을 보내더니 곧 편안해 진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간 게다.

바로 그 때 내 자궁 속에선 또 하나의 문을 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생명이 있다. 들어가는 문이 있으면 나오는 문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가르쳐 주었는데도,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범벅이 된다. 절묘하게도 찰나를 지나 두 개의 문은 엉키지 않는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었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자궁 문을 열었더라면 그렇게 기다리던 아이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가장 낮고 부족한데서 행복 찾기를 좋아하던 사람. 내가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것도 30년이나 되었다. 친부모는 원치 않는 삶으로 나를 키울 수 없게 되자 입양을 보냈다. 내가 이 집에 오게 된 것은 아버지에게 자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보다 오히려 더 진짜 엄마, 아빠뻘인 언니와 오빠들이 위로 다섯이나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이 집에 들인 것은 아버지 생의 단편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원치 않으면 아버지라고 안 해도 된다.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라. 삶은 억지로 안 된다. 흘러가는 대로 그냥 두어라. 그래야 편하다.”

그 말이 아니어도, 아버지라 부르지 않을 셈이었다. 반항심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다 떨어져가는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기에 나는 어렸다. 아버지가 정말로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재산도 꽤 되지만 여전히 고물을 모으고, 농사를 지었으며 주위 어려운 사람들을 남몰래 돕곤 했던 아버지. 넘치는 것 보다는 모자란 것이 편했던 덕에 집 담벼락엔 동네 아이들의 글씨로 ‘거지집’이라 쓰여 있을 정도였다. 그 집이 부끄러워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의 눈을 피해 멀찌감치 돌아오곤 했다. 그런 모습을 알고도 모른 척 하던 아버지는 항상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나오고 들어가는 문은 어떤 문이든 소중하고 귀한 거다. 열고 닫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귀하고 천한 것이 될 수 있는 거야.”

그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말. 오래토록 기다리던 생명을 문 밖으로 내보내고서야, 아버지가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문으로 들어가고서야 가슴속 깊이 새겨진다. 아버지는 입관을 마치고 장지로, 아이는 탯줄을 끊고 바구니에 담긴다.

“거북이 날다.”
이상헌(남, 지체)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자, 오늘은 이만합시다.” 부장님의 말씀에 회의 내 내 몸을 맡겼던 의자를 밀치고 일어서는 순간, “뚝” 내 허리 쪽에서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마음대로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몸을 일으키는 것은 고사하고, 발가락 한마디조차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2011년 5월 내가 장애를 입게 된 바로 그날 속 내 기억의 모든 것이다. 6시간에 걸친 수술, 8개월의 병원생활 그리고 1년여의 재활치료에도 내 몸은 예전의 몸으로 돌아오질 않았다.

비관적인 내 생각인지 모르지만, 조금도 아주 조금도 내 몸이 그전으로 돌아지는 아주 작은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하루아침에 병석에 드러누운 남편 덕분(?)에 아내는 전업주부로 돌아온 지 10여 년 만에 다시 일터로 나섰고, 아직 초등학생인 큰 녀석과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 녀석은 종지에 고아와 같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던 내가 하루아침에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신세에다가 당장 아이들 교육비와 생계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평소 허리가 좋지 않아 가끔씩 한의원 치료를 받았던 진료기록 때문에 그 흔한 ‘산재’ 조차 인정받질 못했고, 내 앞에는 모든 것이 불투명한 암담한 미래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재활운동이라는 핑계로 절뚝이는 몸을 이끌고 집 밖으로 나와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고, 그런 다른 사람들은 시선이 싫어 점점 집 밖으로 나서는 것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영어에 재능을 보이던 작은 녀석에게 좀 더 나은 영어교육을 제안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 형편은 더 이상의 사교육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고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다행히 친척들의 도움으로 작은 녀석은 방과 후 추가로 영어교육을 받게 되었지만, 언제까지 남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본격적인 구직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20여 년의 현장 영업 경력에 대기업 영업팀장..

내 이력서는 현장 영업사원을 원하는 기업들의 눈에 들었는지, 수많은 면접을 거쳤지만 결과는 언제나 불합격이었다. 절뚝이는 거북이 같은 걸음걸이로는 현장 영업 활동을 하기엔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태반이었다.

다시 한번 내 자신에 대한 원망과 좌절에 빠져 있을 즈음 반신반의 상태에서 지원한 작은 중소기업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통보를 받았다. 많은 급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근무환경이 좋지도 않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근무를 시작했다. 내가 맡은 업무는 관공서 및 학교 영업이었다.

당시 내가 재직한 회사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제품은 ‘조달청 나라장터 쇼핑몰’을 통해서 판매되는 제품이었기에 주된 영업대상 또한 관공서 및 학교였다. 당시 조달청 나라장터 업무에 대하여 전무하던 나는 현장 영업활동을 병행하며 틈틈이 독학으로 조달 관련 업무지식을 넓혀가며 노력했고, 2년여의 근무기간이 지나자,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조달 업무 지식을 갖게 되었다.

재직하던 회사가 어려워지고 조직이 축소되며 원하지 않는 퇴사를 하게 되었지만, 퇴사도 하기 전에 역시 조달청을 통한 제품 판매를 하는 다른 업체로부터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게 되었다. 내 사회 경력에 맞는 연봉, 근무 환경 그리고 비장애인들과 차별 없는 대우, 제안받는 모든 것이 나에겐 날수 있는 날개가 된 것이었다.

비록 남들처럼 빠르게 달릴 수도, 빠르게 걸을 수는 없지만, 거북이처럼 꾸준히 노력한 결과가 비장애인들도 취업이 어렵다는 시기에 비장애인들보다도 많은 연봉과 좋은 근무환경을 제공받으며 근무하게 된 것이다.

평균 월급 수준 120만원을 받고 있는 모 인터넷 포털사이트 장애인 카페의 장애인 친구들은 내가 받는 연봉과 근무환경에 ‘대한민국 장애인의 0.0001%’라며 축하를 해주었다.

지금의 직장에서 근무한지 이제 만 3년이 지났다. 지난달엔 진급도 하여 회사 내에서 한 개 영업 조직을 책임지는 자리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매일 관공서와 학교를 방문하여 우리 회사 제품을 홍보하고 제안하며 내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처음엔 절뚝이는 거북이 같은 내 걸음걸이에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시던 분들도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나와의 협력이 강한 파트너들이 되었다. 꾸준함과 성실함 그리고 신뢰가 쌓여 경쟁사들보다 우리 회사 제품을 많이 선택해 주신다. 거래처를 방문할 때 나는 우리 회사의 제품 제안 이외에 경쟁사에선 도저히 드릴 수 없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바로 내가 몸이 불편하게 된 사례를 조심스럽게 설명드리며, 많은 분들이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시도록 권하고 있다.

나 같은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한 말씀씩 전하고 있다. 문뜩 출근길에 하늘을 바라본다.

저 멀리 절뚝이는 걸음걸이의 거붇이 한 마리가 높디높은 하늘을 날고 있다.

문밖으로 나오다
신 계원(여, 지체)


봄물 오른 나무 가지에 하나 둘 매달린 마른 잎이 비바람에 떨어져 길을 찾고 있다. 차가운 바닥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나뭇잎, 마치 어느 가을 높은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다 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예전 내 모습 같다.

돌처럼 굳어버린 몸, 속을 드러내지 못하고 명치끝이 까맣게 타버린 이방인처럼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속수무책 차오르는 슬픔에 나도 모르는 딸꾹질이 나왔다. 너무 슬프면 딸꾹질이 나오나보다. 마음을 얼레고 달레도 소용없이 딸꾹질이 나왔다. 십 수 년 감춰둔 상처고름이 통곡이었다가 속울음이었다가 재채기였던 슬픔, 타르처럼 굳어버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안의 탄식을 하늘에 밀어올리고 나니 둥근 다리가 미끄러지듯 굴러갔다. 새삼 행복한 글쓰기모임에 처음 방문한 때가 떠올랐다. 사고 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끊어버렸던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오기까지 수년, 소심하게 변해버린 성격 탓인지 나는 낯선 사람들과의 첫 만남은 늘 주눅 들린 유기견이 되었다. 미리 마중 나온 반가운 얼굴을 확인하고 어린아이가 엄마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것처럼 졸졸 따라갔다.

밀려오는 긴장감 때문인지 무거운 기운이 느껴져 회원들의 첫인상을 살필 여유조차 없이 호흡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호흡을 여러 번 내쉬고 경추장애 나를 소개하자 그때서야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반갑게 맞아주는 따스하고 잔잔한 눈길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아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정은 옆집 아저씨처럼 푸근하고 언니 오빠같이 부드러웠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환경을 탓하지 않고 눈물과 웃음 용기와 희망의 글을 고치처럼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강사님은 회원들의 마음을 요리하듯 한 글자 한 단어를 능숙하게 뽑아내 표현과 느낌을 맛깔나게 살렸다. 마치 문학의 놀이터에서 형형색색으로 탈바꿈되는 신기함에 빠져 나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렸다. 각양각색의 언어들은 소리가 되고 맛이 되어 내 마음을 자극시켰다. 나도 독특한 강의법에 빨려 들어가 글을 버무려 만든 시의 맛을 빨리 맛보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글은 빠르게 마음과 마음을 연결해 주는 소통의 연결로가 되었고, 어느새 그들의 마음 그들의 미소는 내 가슴 가득 훈훈한 해바라기 꽃이 되었다.

팔다리가 자유롭지 못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들, 그들은 온실 속 화초가 되어버린 내게 “너도 할 수 있다고.”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너니까 할 수 있다고 북돋워 준 그 한마디는 어쩔 수 없이 달팽이로 살아가는 내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래, 나라서 할 수 있다고.”

나는 나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그 말을 수 없이 되새김질하고 답답한 마음을 뚫고 막힌 생각을 틔우기 위해 정신을 매섭게 세웠다.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울기를 수백 번, 들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스스로 토로하며 살았던 무거운 삶까지......, 쓰고, 쓰고 또 쓰고 부지런히 썼다. 때로는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대못으로 박혀있는 자존심 때문에 펑펑 울기도 했다. 하지만 글에는 그 어떤 한마디말보다 따뜻하고 강한 힘이 있었다. 마음이 다쳤을 땐 위로의 언어로 지치고 힘들 땐 격려의 언어로 기쁜 일이 있을 땐 축하의 언어로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의 스승이었다.

우연히 글쓰기에 빠진 뒤, 나는 마음을 나누는 벽이 없는 곳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우리는 각자의 사연들을 마음껏 표출했다. 그런데 사연을 읽을 때마다 청하지도 않은 먹먹함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먹먹함 때문에 구멍 난 마음이 더 넓어진 이유를 깨달은 나는 기다리는 삶에서 찾아가는 삶으로 바꿨다.

자연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곳을 물어물어 찾아다니며 새로운 것들과 하나씩 하나씩 소통했다. 보고 듣고 느끼며 사는 맛을 찾은 나는 연극낭독 시화전 하모니카로 호흡하면서 경험하지 못한 것에 도전하고 체험했다. 그러다보니 굳게 닫혔던 마음문도 따라 열리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 되었다.

비록 찢기고 부셔진 삶이 아프고 슬프지만 나는 무조건 감사하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아물지 않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쉴 틈 없이 한 줄 한 줄 글로 표현하고 승화해나갔다. 글자 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한편의 시가 되고 수필로 완성되는 순간 내 심연은 단풍잎처럼 곱게 물들어갔다.

꽃잎처럼 초연한 달팽이, 이제 나는 그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거친 비바람을 견뎌내며 영근 대추 한 알 속에 햇살 구름 바람이 단맛을 내주는 것처럼, 꽃의 언어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햇살보다 더 달달한 행복을 내안에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고층 아파트 위로 태양이 솟으면 하루가 시작되는 일상적인 날이 오늘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 그들의 친절함과 넉넉한 마음은 나의 또 다른 길로 빛이 감돈다.

지금도 그들과 함께 마음을 읽고 생각을 쓰며 기쁨으로 견뎌낸다.

그리고

나팔꽃처럼 활짝 웃는 내일을 기대하며 마음가득 해를 품고 대문을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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