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가 장애인 근로자 및 근로의지가 있는 장애인의 다양한 재능 역량을 계발하고, 장애인도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근로 주체임을 사회에 알려 올바른 장애 인식 개선에 기여할 목적으로 지난 2000년부터 ‘장애인 고용 인식개선을 위한 Talent Contest’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18회를 맞은 Talent Contest에는 운문, 산문, 사진, 컴퓨터그래픽, 광고영상/스토리보드 등 5개 부문에 총 348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작품 770점을 응모했고, 1·2차 심사를 통해 총 55점이 최종 선정됐다.

에이블뉴스는 운문, 산문 부문의 입상작 26점을 총 10회로 나눠 소개한다. 일곱 번째는 산문 부문 은상 수상작이다.

큰 나무 벤치

김 인 주(여, 시각)

큰 나무 옆 작은 벤치에 앉아서 바라보면 아주 맑은 바다는 아니지만, 넓은 서해바다와 영종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만조가 되면 작은 배와 바지선이 잔잔한 물결을 가르며 지나다니고 갈매기가 날아드는 곳이다.

이곳을 알게 된 것은 그리 길지는 않다. 5년 전쯤 남편의 일터를 따라 신도시라는 청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신도시 아파트가 한꺼번에 지어져 분양이 된 것이 아니라 공사차량 수없이 드나들고, 건설자재가 복잡하게 즐비하며, 공사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도시라 인터넷 게시판에는 이런 것들에 대한 불만이 하루에 수십 개가 올라오곤 했다. 예전에 살던 곳과 많이 다른 시끌벅적한 이 동네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게다가 남편은 일로 들어오는 날보다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고, 늘 밝게만 자라주던 하나뿐인 딸아이는 사춘기라는 장벽에 부딪쳐 날카로운 가시만 세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온 곳이 이 작은 벤치다. 나의 아지트이자 위로받는 나만의 작은 쉼터가 되어 상처받은 가슴을 많이 보듬어 주었다.

4월이 되었나보다. 벤치 바로 옆 큰 나무는 온몸을 떨어 벚꽃 비가 내려 노랗게 핀 개나리 위로 분홍 꽃잎을 덮어주고 있었다.

작은 벤치에 앉아 무심코 바다를 보았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고 있었다. 구름이 가려진 하늘로 햇살이 살며시 내려오고 있었다. 따스해지고 싶었다. 눈을 감고 내려오는 햇살을 좇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온 세상이 분홍빛으로 따스하게 다가왔다.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차가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따스했던 나만의 공간’

어릴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 종합병원이란 곳에 갔었다. 시장에 팔다 남은 배춧잎을 토끼 키우는 먹이로 쓴다며 얻어와 겉절이를 해 주셨던 팍팍한 살림 탓에 뒤늦게 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지금은 보편화되고 많이 저렴해진 가격이지만, 그 당시 병원에서는 고가의 콘택트렌즈를 권했다. 어머니께서는 나의 손을 다시 잡고 병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치료를 시작하면 낫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미 많이 벌어진 양 눈의 시력을 조금 더 붙잡아 둘 수 있다는 말에 생각이 많아지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께서는 내가 매번 사달라고 조르다가 따끔히 혼나곤 했던 만두가게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 한판을 들이밀어 주셨다. 어린 나는 뜨거운 만두에서 올라오던 김을 얼른 먹고 싶은 마음에 호호 불었다. 불어올라가던 김 사이로어머니께서는 몰래몰래 눈물을 훔쳐대셨다. 어린 나는 그저 만두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방긋방긋 웃었다. 그런 나를 어머니께서는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의 눈은 점점 시력차를 보이더니 결국 왼쪽 눈을 초등학교 4학년쯤 잃어버렸던 것 같다. 안 보인다는 게 뭔지도 몰랐던 나이였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게 잘 보였나보다. 피곤하거나 힘들 때면 왼쪽 눈이 제멋대로 돌아갔다. 철부지 아이들은 그게 신기하고 이상했는지 날 놀려댔다. 호기심어린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기엔 난 너무 마음이 여렸고, 약했다.

언니, 오빠가 동네 개구쟁이들에게 한바탕 놀림을 듣고 오는 날이면 맨발로 달려 나가 싸움을 해댔다. 어느 날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나에게 쓴소리를 했다.

“병신으로 살려면 강해져야지. 나중에 그러다가 아예 안 보이면 너 어떻게 살래?”

어린 나이에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하실에 내려가 연탄가스 마시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연탄구멍을 열고 앉아있던 기억도 나고, 새로 난 도로에 가서 큰 버스가 오면 하나, 둘, 셋을 세고 뛰어보자 했다가 급정거하던 버스기사 아저씨께 크게 꾸지람을 들었었다.

어린나이에 죽는 것보다 무서운 건 안 보이게 되는 것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햇살이 비치는 아침이 아닌 깜깜한 밤이 계속 될까 무섭고 외로워서 혼자서 많이도 울었었다.

하지만 소처럼 묵묵히 일하시는 아버지와 늘 막내걱정 뿐인 어머니 앞에서 약하게 보일 수 없었다. 마음에 응어리진 상처를 숨기고 누구보다 명랑하게 지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직장을 가질 때가 되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땐 본연의 모습이 나오는가보다. 그렇게 찾은 나의 첫 직장이 상담원이었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고 목소리만으로는 누구도 신기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진 않아서 이 직업을 선택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밝고 찬란하던 이십 대인데, 난 예쁘게 꾸민다는 생각보단 머리를 한쪽 내려 한 눈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러던 나에게 어느 날 아이가 생겼다.

아이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 들은 생각은 나의 장애가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본 육아서적에서 눈, 코, 귀는 유전이라 했기 때문이었을까. 할아버지 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막내고모도 한쪽 눈의 시력이 안 좋으셨다. 나는 그 중에 제일 심한 축에 들어 한 눈이 세상을 볼 수 없었다.

남편이 될 사람은 내가 장애가 있는 것을 알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댁에선 유전 이야기가 도마에 오르고 조금은 시끄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어찌하여 식을 올리고 아이가 태어났다. 갓난 아이 때부터, 아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기도했다. 아빠 눈을 닮게 해달라고...

준비되지 않은 엄마는 실수투성이다. 동화 같은 결혼 생활과 분유광고 속 아이마냥 웃기만하는 아이를 꿈꿨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경제적 문제도 문제이지만, 아이를 맡기고 일을 다닐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았다. 친정엄마는 1년 먼저 태어난 친정조카를 맡아 보고 있었다. 젊은 사람도 아이 둘을 돌보기 힘든데,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기엔 마음이 따라주지 못했다. 게다가 시어머니께서는 단호하게 아이를 돌볼 수 없다고 칼 베듯 말해버리셨다. 난 직장과 육아 중에 선택이 아닌 결정을 해야 했다.

집안 어른분들이 직장을 그만둘 때 위로삼아 말씀해주셨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나가서 돈 벌어오는 것보다 훨씬 값진 거라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고 슬픈 건 아니었다. 행복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아이가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소아안과를 다니고 눈이 조금 이상하다 싶기만 해도 병원에 달려갔다. 나의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이와의 애착이 커지고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만 했는데, 그렇게 키운 딸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에게 아픈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엄마는 좋겠어. 늘어지게 잘 수 있고 언제나 누구를 만나러 나갈 수 있네. 나도 엄마처럼 커서 놀고먹는 아줌마나 할까봐...”

눈의 상처보다 날카로운 상처로 가슴을 찔러댔다. 아이 눈에 내가 그렇게 보였나보다. 더 이상 엄마의 존재가 귀찮아지고 홀로 일어서려는 아이에겐 나의 존재는 도리어 짐 같았을지 모르겠다. 일에 찌들어 퇴근해온 남편에게는 어떤 말을 할 수 없었다.

작년 이맘때였을 거다. 딸아이의 냉대, 남편의 무관심, 연신 뉴스에서 살림살이 팍팍해진다는 보도가 나오는데도 아들고생만 시킨다고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어머니 사이에서 용기라는 걸 내보기 시작했다. 경력 단절이어도 너무 긴 단절이었다. 임신과 동시에 일에서 떠났으니, 15년 이상 된 시쳇말로 집순이가 갈 만한 직장은 더 이상 없었다. 인터넷 구인광고를 찾아보아도 스펙도 없고 상고를 나온 학력으론 공장 노동자자리, 주방보조자리만이 나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

어디든 나가고 싶었다. 아니, 나가야만 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공장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냈다. 한 눈으로 보다보니 조금 힘들면 어지러움이 몰려와서 앉고 싶었지만, 앉을 자리 한 뼘이 그곳엔 쥐어져주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대열을 한 눈으로 따라가려니 스스로 벅찼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것이 눈에 보였을 것이다. 작은 일을 던져주었다. 점점 더 작은 일...

어느 날 이사라는 분이 나에게 말했다. 당분간 물량이 없으니 그만 나오셔도 된다고 했다. 두 달도 안 된 시점에서

그렇게

나는 자리를

잃었다.

그날 밤 홀로 많이 울었다.

아무도 날 필요하지 않다는 걸, 나의 존재가 없는 듯 무의미해져서 슬픔이 밀려왔다. 다시금 컴퓨터를 켜고 구인광고로 눈을 돌렸다. 지금까지는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취업을 했지만, 이젠 다 드러내고 일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이 번뜩 들었다.

장애인이라고 좀 더 쉬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 낸 것은 아니다. 나와 맞는 일,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장애 유무란에 표시를 한참을 바라보다 체크를 하고 쫓기듯 급히 써내려간 이력서를 인터넷에 올리고 기다렸다. 물론 기대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덜 상처 될 테니까...

다음날,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유일하게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친구이다. 유치원 선생님인 그 아이는 쉴 새 없이 유치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해주었고, 한때 나도 같은 꿈이었던 유치원 교사가 내가 되어본 듯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선생님 눈은 왜 그러냐고 물어볼까 두려워서 너무 해보고 싶었던 직업이었지만, 도전도 하지 못했었다.

즐거운 대화 오가는 사이에 핸드폰이 울렸다. 이력서를 올린 장애인공단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오늘 면접보실 수 있느냐고 했다. 생각지 못했는데 면접이 바로 오늘 봐야 한다고 하니 당황되었다. 친구는 괜찮다며 면접을 가라 응원해 주었다. 어떤 곳이기에 이력서를 올리자마자 바로 연락이 왔나 싶으니 걱정도 되었다.

담당자는 간단히 업무를 이야기해주었다. 학교 행정실 업무라고 했다. 열심히 일 배우면 도움도 될 것이고, 갑자기 난 자리라 바로 면접을 진행해야한다며 양해를 구하셨다.

집에 부랴부랴 돌아와 오랜만에 정장스커트를 꺼내 입고 구두를 신었다. 미미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듯했지만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집안행사에서나 입던 모습으로 버스에 오르니 기분이 이상하고 두근거렸다.

면접을 진행하는 장소까지 거리가 멀긴 했다. 집에서 40분 이상 버스로 달려 내린 초등학교 정문에는 담당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정이야기는 면접보고 나오며 해준다며 정신없이 학교를 올라가서 행정실 문을 열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지만 행정실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어떤 일을 하는지조차도 몰랐다. 무지의 상황에서 밀려들어가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모르는 질문을 받고 10분도 안되어서 다시 내려왔다.

공단 담당자는 나에게 분명히 연락이 올 것이니 걱정마라 했다. 열심히 하시면 재계약도 되는 일도 있었고 일하시는 것도 편해질 것이라 말했다. 사전정보도 없이 들어가서 면접보고 내려오다 보니 어안이 벙벙했다.

5월 첫째 주라 연휴가 시작되었고 연휴의 끝 언저리쯤에 연락이 왔다. 연휴를 마치고 출근하시면서 이런저런 서류를 지참해서 오시면 된다 했다. 평소 숫기도 없고 겁도 많은데 일을 저지른 게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그토록 바라던 취업이 되었다.

출근 첫날 아침에 버스에 오르며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었다. 핸드폰 메모장에 메모 하나를 남겼다.

‘여기에서 또 도망가면 또 다시 필요 없는 사람이 된다.’

직장을 잃고 울던 그날밤이 다시금 떠올라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나의 업무는 행정실 행정보조의 업무라고 한다.

학교 일이 처음인 내게 행정실에 근무하는 분들이 배려를 해주었다. 간단히 공문을 접수하거나 소모품을 세기도 하고, 정리정돈을 도왔다.

며칠이 지났을까 조금 익숙해진 내게 근무하던 분들이 지금 있는 이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올해 1월에 온 근무자가 무단으로 결근을 하며 그만두었고 공단에서 새로운 분을 데려왔지만 온다 말만하고 연락도 없이 안 나왔다 했다. 누군가 버리고 간 듯했다. 학교에서는 장애인 실적을 채우기 위해 만든 자리인 것 같았다. 도움을 주며 보조해야할 자리인데 도리어 챙겨야하고 짐처럼 여겨지는 자리인 듯싶었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끌어모았다. 우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나누기로 했다. 집에서 심심하면 오물거리던 곰 모양 젤리 한 통을 들고 학교에 갔다. 자리에 두고 일하다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한 봉지씩을 건네주었다. 누구보다 방긋방긋 웃었고, 친해지려 말도 많이 하려 애썼다.

사람의 마음은 얼음과 같아 녹기 시작하면 순식간이었다. 어느 순간 행정실 분위기가 점점 좋아졌다. 지나가는 선생님들도 내게 한두 마디씩 건네주었다. 그것이 힘이 되고 용기가 되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했다. 너무 오지랖이 넓은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지만 이 자리에 대한 인식만이라도 바꿔놓고 12월 말일 계약이 종료된다해도 난 그것만으로도 해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옆에 같이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에게 귀찮게도 일에 대해 많이 물어보았고, 남자가 할 수 없는 작고 세심한 부분을 찾아 먼저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눈에 보이고 하는 일에 실수가 줄어들며 자리가 자리 잡을 즈음 행정실장이 나를 회의 테이블로 불렀다. 업무라는 걸 해보는 건 어떠냐고 기회를 주었다.

행정실 옆에 서고가 있는데 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정리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다고 했다. 행정실에 올 1월에 발령받은 신규직원이 있지만 업무가 많아 거기까지 신경쓰진 못하니 한번 해보라며 기록물관련 업무 담당권한을 주었다. 나에게 주 업무가 처음으로 주어졌다. 두근거리기도 하고 겁도 났지만, 옆에 근무하는 신규직원이 도와준다고 해서 또 한 번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교육청에 기록물 업무관련 전화를 쉴 새 없이 걸었다. 물어보고 또 물어보았다. 삼십대 막바지에 있지만 엑셀도 다시 배우고 컴퓨터 활용능력 공부도 조금씩 해나갔다. 팽개쳐 두어서 엉망이고 절대 정리가 될 것 같지 않던 서고가 점점 자리가 잡아갔다.

어느 날 공문이 내려왔다. 기록물 관련 업무처리 일정이 내려왔다. 늘 누군가가 일을 지시하면 그것만 따르던 나였으니까 누군가 답을 알려줬으면 해서 신규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연주무관님, 이번 공문에 보니 기록물 폐기처리 해야 한다는데요. 이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내 질문에 신규직원이 되물었다.

“네?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당황스러웠지만, 말을 이어갔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도와드릴게요. 담당자시잖아요. 담당자 말을 따라야죠.”하며 1년도 채 안 된 신규분이 웃어주었다. 이 일의 담당자는 나였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처리해야하는 일이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듯하였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기록물 관련 업무를 맡게 된 이후 학교 내 민원서류처리 분야도 인수받게 되었다. 민원인이 오면 다른 직원에 비해 아줌마정신을 발휘해 친절하게 일을 해내니 모두 고마워했다. 일은 점점 손에 익어갔다.

가을의 막바지에 해내지 못할 것 같던 기록물폐기도 해내고 서고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갈 즈음 어색하기만 하던 그 자리가 이젠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차석 주무관이 나에게 말했다.

“김주사님! 주사님이 들어와서 참 다행이에요. 행정실은 정말 많이 바쁘거든요. 근데, 초등학교에는 행정실무원이 없어요. 교무실에는 있지만 저희 일은 안 바빠보이나봐요. 주사님 아시다시피 이렇게 바쁜데 말이죠. 전에 장애인일자리 사업으로 들어오신 분들은 도움을 주시기보다 도움을 드려야 해서 저희에겐 사실 짐과 같았어요. 오죽하면 다른 실에서 급히 인원이 필요해서 주사님 자리에 있으셨던 분들 보내면 행정실 힘들었겠다고 말을 하겠어요. 주사님 참 고마워요.”

이어 옆에 있는 후배지만 나이가 더 많은 신규직원에게 말을 했다.

“연주무관님도 김주사님이 계신 덕분에 신규지만 일이 많이 없는 편이세요. 고마워하셔야 할 걸요?”하며 웃었다.

처음에 왔을 땐 어렵고 어색하기만 했던 이곳에서 도리어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고 있었다. 다행히 내 마음이 통했는지 행정실 분위기는 나날이 좋아졌다. 아이들의 재잘재잘 목소리가 귀에서 즐거움을 늘 선사해주며 하루하루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겨울이 되었다. 다른 곳으로 발령 나서 가야하는 실장은 나에게 1년 재계약 서류를 내밀어주었다.

도움을 많이 받아 고맙다던 신규직원은 나의 업무를 도와주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본인의 업무를 짬짬이 가르쳐 주었다.

조금 친해져 물어보니 요즘 공부하기 힘들다던 공무원 공부를 10년이나 했다고 했다. 10년 끝에 들어온 자리를 내가 들어왔던 5월에 너무 힘에 부쳐서 그만두려 했었다는 말을 웃으면서 했다. 그러곤 도움 많이 줘서 감사하다 했다. 얼마 전 실시한 새내기 교육에 참석해서 그 고마움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교육청에서 작은 상도 받았노라 말해주었다.

학교에 나가고부터 딸아이도 가족도 주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큰 나무 옆 벤치를 다시 찾았다. 4월의 햇살가득 내리쬐는 벤치에서 분홍빛으로 물든 큰 나무를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벤치에 앉아 눈을 잠시 감고 햇살을 받으며 따뜻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감은 눈으로 무언가 떨어졌다. 큰 나무가 꽃비를 흩날리고 있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곤 들고 온 작은 수첩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오랜 기간 공시생 생활을 하셨던 신규직원이 건네준 공무원 기출문제이다. 지난 날 장애를 가진 한 눈 탓에 포기하고 도망치기만 했던 내가 목표라는 것이 생겼다.

공무원

6월에 있을 지방교행직 공무원시험에 응시원서를 냈다. 10년을 공부해도 될까 말까한 것이 요즘 공무원이라 했다. 그 공부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공부를 하는 나의 모습만으로도 내가 대견하고 힘이 난다.

올해 생애전환 건강검진대상자 명단에 들어가 검진대상자 우편물을 받았다. 인생을 반을 살았다. 그동안 숨고 울고 도망치고 피하며 살았었다. 이젠 일어나 걸어야겠다. 아니 뛰어봐야겠다.

큰나무 벤치에 기대어 잠시 눈을 다시 감아본다. 감은 눈꺼풀로 햇살이 내려와 앉는다. 분홍빛으로 다시금 세상이 물든다. 다음해, 그 다음해, 더 따스해질 상상을 해본다. 벤치 옆 큰 나무처럼 단단해지려한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