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가 장애인의 잠재된 문화예술 역량을 계발하고, 장애인도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근로 주체임을 알려 올바른 장애 인식 개선에 기여할 목적으로 지난 2000년부터 ‘장애인 고용 인식개선 콘테스트’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17회를 맞은 콘테스트 공모전에는 운문, 산문, 사진, 컴퓨터그래픽, 미술, 광고영상/스토리보드 등 6개 부문에 총 469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작품 1029점을 응모했고, 1·2차 심사를 통해 총 68점이 최종 선정됐다. 에이블뉴스는 운문, 산문 부문의 입상작 26점을 소개한다. 산문 부문 입선 수상작 3편이다.

겸손의 KTX는 종착역이 없다

민경례(여, 지체)

아줌마! 나 알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웃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네, 그럼요.” “나 앞 동 노인회장이야.” 은근히 자랑을 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나에게 할머니의 말이 길어졌다.

문 앞이라 자리를 빨리 피하며 옆을 보았다. 젊은 여성의 표정이 하이에나 같이 보였다. ‘아차’ 싶었다. 입구를 막고 이야기하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비켜달라 말 못하고 참고 있던 그녀에게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늙으면 이래요.” 잠시 눈치없는 행동을 한 것에 얼른 사과를 했다.

젊은 여성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니야요, 그냥 먼저 타세요.” 했다.

“아유 미안해요.” 또 한 번 타라고 양보했더니 “네.” 하고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내려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 입으로 자신을 할머니라 칭했던 것과 조금 전의 일들을 돌려 생각해봐도 너무 잘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지금까지는 누가 할머니란 말을 하면 듣는 언어가 어색하여 “그냥 언니라고 해요.” 하던 내가 나도 모르게 자신을 할머니라 시인을 했다.

‘그래.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먹은 나이가 어디 가나.’ 하며 껄껄 혼자 웃었다.

요즘 내 생활이 참 즐겁다. 검지와 중지 사이로 잡은 전동핸들이 나를 편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어깨근육에 통증이 심해 병원에서 초음파를 찍었더니 근육이 부었고 염증이 있어 팔을 잠시 쉬어주라고 하여 16년 동안 돌리던 수동휠체어를 쉬고 모터의 힘을 빌려 활동을 넓히니 이제는 마트까지 다닌다. 야채 코너에 가서 오이와 버섯을 담고 내가 좋아하는 육식코너에서 이것저것 먹고 싶은 음식 재료들을 골라 장바구니 가득 사기도 한다. 돌아오는 마음은 혼자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콧노래가 절로 났다.

롱드레스 입고 시장 보던 새댁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 행복이 순간이지만 어쨌든 좋다.

오십 중년부터 16년 동안 걸어보려고 재활병원을 직장처럼 다녔다. 걷는 것은 허상이라 깨닫고 오가던 일상들을 하나 둘 정리를 했다. 까칠하다고 듣던 소리도 후덕한 할머니로 마음을 바꾸는 노력을 했다.

비장애인일 때 잘 안하던 인사법이 자연스럽게 이웃과 나누게 되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이런 따뜻한 말을 언제부터인가 인연으로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할 줄도 알았다.

사랑의 단어를 마음에서 꺼내니 고칠 것이 왜 그리 많은지. “사람 마음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로 그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지금껏 겉모습만 바라보았지 내 안의 장애를 모르고 살았다.

생각을 바꾸니 이렇게 편하고 모두가 좋은 것을 왜 그리 따지고 파고들며 다루었을까? 중학교 때 엄마를 떠나 오빠와 살면서 사춘기라 망므이 조금씩 꼬였던 것 같다. 선택과 행동이 보퉁이에서 자란 가시는 꼭꼭 찌르는 것을 향기로 알고 미운 짓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 생각하니 참 부끄러운 후회다.

뾰족한 가시로 자기를 보호하는 가시나무도 예쁜 꽃을 피우며 아름다움을 표출하는 계절이 있다. 까칠했던 나도 중도장애로 오십대를 보내며 아픔을 이겨낸 후에는 평안한 인생여정이 보일 것이라 희망을 안고 살아왔다.

고희가 넘은 이제야 철이 들고 불현 듯 어머니가 보고 싶다. 고향에 가도 농장에 가도 그 어디를 봐도 어머니는 없다. 구순이 넘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못한 죄책감에 밤이면 심장이 울렁울렁 울었다.

내가 자애인이 된 것은 어머니 때문에 된 것도 아닌데 오만과 교만은 눈덩이처럼 커지며 내 맘에 미운 사람들을 몹시 힘들게 했었다.

장애를 극복하려고 재활을 하며 또 다른 나의 인생을 살 때에는 그땐 정말 듣는 귀도 막히고 보는 눈도 뜨지 못해 나만의 오가 마음에 꽉 차있었다.

사람의 본능을 져버리고 가마니 짜는 새끼 타래처럼 둥글게 둥글게 커져간 인생의 굴레가 내 삶의 암 덩어리였다. 말단비대증이란 희귀난치성으로 머리 두 번 척추 흉추 6, 7번 요추 3, 4, 5번 이렇게 3번의 수술 끝에 장애인이 된 내게 가족들은 등을 돌렸다. 혹시 짐이 될까봐 그랬을까?

하반신 마비로 장애인이 된 후에는 병원에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40살에 이혼을 하고 남매를 키우며 고생하던 그때 아들은 군복무중이고 딸은 직장에 다녔다. 병원생활 4년은 참 긴 세월이었다.

“남에게 입바른 소리는 똑똑해서 하는 줄 알았던 바보 같은 나.” 그토록 강한 자존심을 깨고 보니 겸손이 보였다.

가족들에게 용서의 마음을 열고 보니 커다란 걸림돌이 가슴을 쳤다.

섣달 어느 날 농장 관리인 아저씨로부터 걸려온 전화 “여보세요! 고모님이죠.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내가 상주인데, 아저씨가 왜 전화를 해요. 가족들이 연락해야지. 하고 큰 소리를 쳤다. 아저씨에게 화를 낸 것에는 가족들에게 받은 야속한 마음을 꺼내지 못했던 아픔이 있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친정가족들과 처음 만났을 때 어머니는 나를 가리키며 “너희 고모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웃 창피해서 어떻게 하냐.” 그 순간을 생각하면 죽을 수 없어 그냥 가슴에 묻고 살았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 마지막 어머니를 뵈러갔을 때다. 나와 올케가 이야기하는 자리에 오더니 올케 어깨를 다독거리며 “어미야! 자식은 너 밖에 없다.” 하셨다.

장애인이 된 딸은 자식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냉정하기만 한 어머니는 가슴 아픈 딸을 두고 떠나실 준비를 하신 거라는 것을 돌아가신 한참 후에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장애인이가 미워한다며 가족들을 증오했는데 십년이 지난 이제는 어느 날부터 모두가 보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두 다리로 걷던 내가 다리가 좀 아파 휠체어에 앉았다고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장애인 시절에 깨닫지 못했던 나를 변화시킨 기적의 휠체어다.

장애인도 형제라고 꼬집어주며 그리운 마음을 살짝 열어봤다.

내 모습이 낯설다고 나에게 돌을 던져 마음의 빙하를 쌓게 한 것은 인척들이 혀끝 차는 것을 본 후였다.

마음의 장애를 털지 못하고 아집을 안고 시한폭탄으로 살던 나에게 겸손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인도하는 손길이 있었다.

억새풀 같은 마음을 날카로운 비수로 자르지 않고 살포시 달래주며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는 말씀이 듣는 귀를 열어주었다. 얼어있던 빙하를 깨기 시작했다.

사랑은 따뜻한 것이라고 조금 눈을 뜨고 보니 나의 삶이 너무 꽈배기처럼 꼬였던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나에게 늘 하시던 말씀 “네가 무엇을 하니. 가만히 있어라.” 그땐 그 말씀이 장애인 딸을 멸시하는 줄 알고 싶은 오해의 뿌리를 내렸었는데 지금 겸손의 마음에 비추어 보니 그것을 휠체어를 탄 것만 보아도 마음이 아픈데 하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죄 없는 어머니에게 항변하던 말, 나를 낳은 자의 잘못이라고, 어머니는 자식이 가시를 가혹하게 찔러도 사랑을 참았다는 것을 내 자식이 어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알았다.

“나” 지금 그리움의 진한 향수가 후회되어 어머니의 곁을 찾아갑니다.

장애인으로 살면서 가족 간의 아팠던 수많은 날들을 스스로 치유하며 맘 문 닫았던 곳에 엄지 검지가 데려가는 전동을 타고 “할 수 없다.”를 “할 수 있다.”로 열면서 어머니! “사랑합니다.”가 나왔다. 어른이 된 딸을 보고 내 아픈 손가락이 철들었다고 어머니가 기ᄈᅠᇂㅏ실 것 같다. 겸손의 강한 힘은 내 안에 굵은 줄로 꼬여있던 실타래를 쭉쭉 뽑아내며 무한대의 넓은 통로를 열어주었다. 겸손의 KTX는 종착역이 없다.

함께 하는 일터

감경민(남, 지체)

1. 해후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KTX 열차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오묘했다. 한껏 펼쳐진 산은 전날 내린 눈을 품고 있었지만 조금씩 제 살을 찌워 많은 것들에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산은 소리 없이, 다시 봄기운을 몰아 한바탕 엎치고 있었다. 한없이 푸근한 산자락 앞에서 날씨가 추울 것이라는 일기예보에 겁을 먹어 겨울 외투로 꽁꽁 싸매고 열차에 올라탄 내 모습은 초라하기만 했다. 그러나 조금만 있으면 곧 반가운 얼굴을 본다는 생각에 마음은 들떠 있었다. 개강을 하루 앞둔 전 날임에도 불구하고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대구행에 오른 것은 순전히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성균관대학교 장애-비장애학생 통합동아리인 ‘이퀄’은 2015년 5월말을 기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퀄(Equal)이라는 이름이 동아리의 지향점을 잘 드러내고 있듯이, 우리는 학내에 재학 중인 장애학생들이 학교를 다닐 때 느끼는 불편함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비장애학생들에게는 장애학생들을 대할 때 에티켓 등을 알려주는 장애인식교육활동을 해왔다. 또한 우리 스스로 ‘장애’에 대해 잘 알고자 장애에 관련한 주제들로 세미나를 하며 공부했다. 세미나 주제 중 하나가 장애인의 고용이었는데 아무래도 동아리의 구성원 대다수가 학생이다 보니 학교가 아닌 직장에서 장애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해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장애인 선배를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자 길을 나섰다.

학교를 졸업해 일터에서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장애인 선배님들은 꽤 많은 편이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선배는 헌주 형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한국가스공사에 취업했는데 몇 해 전부터 대구에 위치한 본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새내기였을 때 헌주 형은 대학 생활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었다. 전동휠체어를 타는 나와 달리 헌주 형은 수동휠체어를 이용했는데 학교 지리의 특성상 유난히 경사가 가파른 관계로 비장애학생들도 거의 등산로를 오르다시피 힘겹게 오고갈 정도였다. 그래서 헌주 형은 파란색 마티즈를 몰고 다니며 강의실을 오갔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서 종종 형과 마주쳤는데 내 눈에 비친 것은 너무도 능숙하게 혼자의 힘으로 차에서 휠체어를 꺼내고 내리는 형의 모습이었다. 잘하는 일이라고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타이핑을 치며 글을 쓰는 것이 전부인 나는 헌주 형이 부러웠고 어떻게 하면 그런 독립심을 기를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당시 헌주 형은 취업준비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터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마주칠 때면 대학생활에서 유용한 팁들을 무심하게 건네는 선물처럼 툭툭 알려주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앞두고 있었고 헌주 형은 직장 생활 3년차가 되었다. 동대구역의 한 카페에서 만난 우리는 미소가 만발한 얼굴로 해후를 음미했다. 그렇게 우리는 몇 년 전에 이루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형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와 동아리 사람들은 거기에 매료되었다. 그 이야기는 뭇 소설보다 깊이 있고 진정성이 녹아 있었다.

녹음기는 부지런히 형의 육성에 담긴 삶을 기록하고 있었다.

2. 전환

누구나 한 번쯤은 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지축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그것이 외부에서는 사소한 일로 비춰질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삶의 지표가 한순간 바뀌어버리는 엄청난 사건으로 다가온다.

헌주 형은 중도장애인으로 스물다섯의 나이에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다. 군 제대를 하고 여자 친구와 함께 간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 수영장에서는 다이빙을 할 수 있었는데 물 위에서 내려다보니 수심이 깊어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도 성격이 워낙 활달하고 자신감이 넘쳤던 헌주 형은 힘껏 물속으로 뛰어내렸는데 입수한 순간 어떠한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다리에 쥐가 났으리라는 생각에 얼른 물속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몸은 거대한 납덩어리들을 매단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고 수영장 물만 마셔댔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여자 친구는 급히 물 밖으로 빼냈고 119에 신고해 병원으로 옮겼다.

대수술을 끝내고 희미하게나마 다시 일상에 대한 감각을 느끼게 되었을 때, 삶의 나침반은 이전과 너무도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특히 중환자실에서 보냈던 한 달여간의 시간은 공포와 두려움의 나날들이었다. 수심이 얕은 수영장 바닥에 부딪쳐 목뼈가 부러지면서 신경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의식은 또렷이 살아있어 영혼을 짓누르는 죽음의 공포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특히 주위에서 들려오는 온갖 비명과 울음소리는 끔찍했다.

삶과 죽음이 수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중환자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비록 고개를 돌려 볼 수는 없었지만 죽음이 성큼 다가와 서성이고 있음을 너무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생의 갈림길에서 헌주 형은 홀로 고독하게 서 있어야 했다. 그 나날들은 어떠한 빛도 없는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이 쥐 죽은 듯 고요한 침묵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다행히도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결박되었던 감각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감각은 일반병동으로 옮길 때까지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감각의 부재 속에서 헌주 형은 자신이 장애인이 되었음을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예감의 닻을 현실의 세계로 정박시킨 이는 의사였다. 의사는 병실로 와서 헌주 형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해주었다.

너는 수영장에서 목뼈가 부러져 신경을 다쳤고 경추 골절로 인해 지금 몸이 마비된 상태이며, 앞으로 걸을 수도 일어설 수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없는 사지마비 장애인이 되었다고. 막연히 예감은 했지만, 그래서 마음을 여러 번 고쳐먹었지만 의사의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헌주 형은 그 날 밤 내내 어머니와 함께 깊은 울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낼 수는 없었다. 생각보다 슬픔의 유효기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이따금씩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가슴 속에서 올라와 괴로움을 겪지만 온몸을 흔들어놓았던 슬픔은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캄캄한 터널 같은 나날들 에 예상치도 못한 한 줌의 빛이 스며들었다.

그 날도 병실에 누워 티비를 보고 있었는데 그 때 어린이 티비 프로그램에서 특집으로 가수 강원래 씨와 슈퍼맨 닥터 이승복 씨가 휠체어를 탄 채로 출연했다. 그 두 사람은 매우 친근하게도 어린이들에게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은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줬으며 그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줬다.

특히 보조기기의 도움을 받아 글을 쓰는 그들의 모습을 본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생의 의지가 샘솟았다. 헌주 형은 자신도 강원래 씨와 이승복 씨처럼 당당하게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재활에 매진했고 그 과정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다시금 절망에 빠트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황우석 사태’로 불리는 줄기세포를 둘러싼 학계의 스캔들이 한국을 뒤흔들었던 때였다. 헌주 형은 내심 줄기세포로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 꿈은 너무도 쉽게 사라져버렸다. 사라져버린 꿈의 자리에서 어느 때보다도 깊은 절망에 빠졌고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절망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와 어깨를 쓸어주시고는 이런 말을 남겼다.

“헌주야, 비록 네가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줄기세포는 없지만 네 스스로 줄기세포가 되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만들어주려무나…….”

평소 무뚝뚝하던 아버지에게서 들은 한마디는 돌멩이 하나 던져진 고요한 강처럼 마음속의 수많은 파동을 일으켰다. 이는 아버지의 말에 여느 때보다도 진실함이 담겨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순간은 삶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전환이 일어나던 순간이기도 했다. 헌주 형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3. 기투(企投)

장애는 깊은 절망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심지 하나를 새겨 넣기도 했다. 그 심지는 어떤 것에 빠지게 되면 열정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헌주 형은 다시 공부하겠다는 마음에 대학 수학 능력시험을 쳤고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 사실 늦은 나이에 새로이 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공부에 대한 갈망도 컸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 몫 거들었다.

사고 이후로 끊임없이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예전 생활을 찾게 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는 하시던 일을 그만 두시고 아들을 돌보는 데에 전념했는데, 자꾸만 죄책감이 들었다. 장애인이 되면서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던 일상생활이 어느 순간 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처럼 힘겨운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아들을 돌보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어느 순간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대학교 입학을 핑계로 상경했다. 상경하는 길에서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이제는 혼자서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연한 두려움도 엄습했다. 하지만 헌주 형은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로 했다.

전공은 경제학으로, 우연히 들은 교양강의에서 경제학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전공으로 선택했다. 학회도 꾸준히 다니며 착실하게 지식을 쌓아나갔다. 헌주 형은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제학과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장 가고 싶었던 직장은 한국예금보험공사였는데 그곳은 한 은행이 문을 닫아도 그곳에 예금한 사람들의 돈을 일정 부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공기업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을 겪은 사람에게는 이전의 삶을 어느 정도나마 회복할 수 있는 인프라가 얼마나 중요한지 온몸으로 깨달았기에 그런 일을 하고 싶었고 그 직업군에서 택한 것이 한국예금보험공사였다. 처음에는 오직 그 곳만을 바라보며 달려갔으나 취업의 벽은 높기만 했다. 필기시험은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자꾸만 떨어졌다. 거듭하여 고배를 마신 끝에 조금 더 많은 것들을 고려해 취업시장의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사실 예금보험공사에 떨어진 후 이곳저곳에 문을 두드렸지만 장애로 인해 불리한 요건은 어쩔 수 없었다. 노골적으로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불합격을 주는 회사는 없었지만 그것은 충분히 추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헌주 형은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더 갈고 닦았고 어느 곳에 가서도 당당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때부터 다이어리 맨 앞장에 항상 이 문구를 적어놓았다.

‘웃자, 당당하자, 인사하자!’

헌주 형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너무도 예기치 않게 한국가스공사에 입사했다. 사실 자신이 한국가스공사에 취업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덜컥 합격을 하고 나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헌주 형은 그것에 더욱 더 감사하면서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선물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한국가스공사는 이전에도 장애인 사원을 받았지만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사원은 헌주 형이 처음이자 유일했다. 회사 사람들은 약간 당혹감을 느끼는 듯했지만 얼마 안 있어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았다.

헌주 형은 기회다 싶어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말했고 놀라울 정도로 시설 개선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 화장실에 관한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입사할 당시 분당에 위치해 있었던 한국가스공사본부 건물에는 장애인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헌주 형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회사에서는 일반 화장실 칸 두 개를 뚫어 장애인 화장실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실상 일반 화장실의 칸 두 개가 없어지는 일이 발생했고 비장애인 사원들은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줄을 서거나 다른 층으로 가야했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불편한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헌주 형으로 인해 한국가스공사는 장애친화적인 일터가 되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있어 한국가스공사는 지역발전 정책의 일환에서 대구 지역으로 옮겼다. 그 때 회사에서는 헌주 형을 고려해 미리 장애인화장실을 만들고 경사로를 설치하고 기숙사를 1층에 배정해주는 편의를 제공했다. 헌주 형은 이러한 회사의 정책에 감응 받아 더욱 더 열심히 일했다.

물론 한국 사회의 ‘미생(未生)’들이 그러하듯이 회사 업무량은 만만치 않았다. 어떤 때는 두 달에 딱 세 번만 쉬고 일을 해야 했던 때가 있었는데 휠체어에 계속 앉아 일을 하다 보니 생전 처음으로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기도 했다. 바로 그 때,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장애인고용공단에서 업무에 필요한 보조기기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헌주 형은 곧바로 욕창방지 방석과 사무실 의자를 신청해 조금 더 편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없이 보낸 두 달이 지난 후 회사 사람들은 헌주 형의 능력을 인정했다. 장애의 유무를 떠나서 업무의 탁월함과 동료들과 친하게 지내는 서글서글한 성격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헌주 형은 오히려 회사 사람들에게 미안함이 들기도 하였다. 팀 막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송구스러웠는데 오히려 팀원들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회식 자리를 잡을 때도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지 먼저 알아보거나 상사님과 출장을 갈 때에도 상사님이 헌주 형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헌주 형은 상사님의 가방을 들어주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 파트너쉽을 너끈히 발휘했다. 그것은 일터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하는 또 하나의 장(場)이었다.

헌주 형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가끔씩 던지는 특유의 농담조에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고 신나했다. 헌주 형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떠올랐다. 어떤 거센 폭풍우가 지나가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 물결 따라 흐르는 강물 말이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우리는 서둘러 서울행 기차를 타야했다. 기차를 타러 가는 길까지 배웅해주는 헌주 형의 손을 꼭 잡으며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 만남에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고대하면서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하자는 무언의 약속을 나눴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KTX 열차 안에서 바라본 바깥은 어둠에 싸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어렴풋이 어떤 풍경이 떠올랐다. 푸릇푸릇하게 살을 찌워 많은 것들에게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산의 모습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숲 속 세계가 떠오르자 빙그레 웃음이 났다.

우리 부모님은

유잠별(여, 청각)

“여러분, 이번 달 글짓기 숙제 다 받으셨죠? 안 받은 친구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한 사람당 종이를 두 장씩 나눠주셨다. 우리 반은 한 달에 한번 씩 선생님이 나눠준 종이에 적혀있는 주제에 맞게 글짓기를 한다. 나는 숙제 중에 글짓기가 제일 좋다. 글짓기는 준비물을 따로 사지 않아도 되고, 내가 4살 때부터 이모가 책을 많이 읽어준 덕분에 글을 쓰는 것에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짓기를 제일 잘 한사람에겐 문화상품권을 주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문화상품권을 2번이나 받았는데 두 번 다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컴퓨터 게임 아이템을 사는데 썼다. 이번에 그 게임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 아이템이 나왔는데 빨리 문화상품권을 받아 그 아이템을 사고 싶다. 새로운 게임아이템을 장착한 내 캐릭터를 상상하며 이번 달 주제를 확인하기 위해 종이를 살펴보았다.

‘우리 부모님은…’

이번 달 글짓기주제는 부모님 인가보다. 글짓기에 자신 있는 나지만, 엄마아빠를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들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시끄럽던 교실이 이내 조용해지고 반 아이들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선생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자, 손을 든 친구가 없는 걸 보니 다들 종이를 받았군요. 종이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번 달 주제는 부모님이에요. 여러분들의 부모님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쓰면 되요. 부모님의 직업도 좋고, 함께 했던 일 중에 기억나는 일을 적어도 좋아요. 다음 주 금요일까지 완성해서 제출해주세요. 질문 없으면 오늘 종례는 이걸로 마칠게요. 우리 2학년 4반 친구들, 선생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 해줘서 너무 기뻤어요. 집에 조심히 들어가시고, 행복하고 건강한 주말 보내세요. 반장 인사!”

반장의 인사와 함께 종례가 끝나자 반 아이들은 저마다 부모님과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라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놀이동산에 갔었던 이야기들을 했다. 나는 딱히 할 이야기가 없어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와 엄마아빠가 장사중인 포장마차로 갔다. 주황색 낡은 포장마차 한쪽에 굵은 글씨로 ‘떡볶이 2,500원 계란 추가 500원’ 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아빠는 거의 바닥이 보이는 떡볶이에 새로 끓인 육수를 넣고 있었고, 엄마는 막 손님들이 떠난 자리를 치우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보고는 평소와 같이 활짝 웃으며 꼭 안아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 아아.”

엄마는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고는 마트가 있는 쪽을 가리키면서 천 원짜리 몇 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마트에 가서 떡볶이에 넣을 계란을 사오라는 얘기다. 나는 돈을 천천히 세어보았다. 모두 다섯 개다. 엄마는 글씨를 잘 못 읽지만 돈을 세는 것은 언제나 정확하다. 나는 마트로 가서 4,680원짜리 계란 한판을 샀다. 계란이 깨질까봐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쳐 들고 가는데, 멀리 포장마차 앞에 낮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반 경석이와 그 애의 동생이었다. 나는 그 애들을 보자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태권도 도복을 입은 것을 보니 얼마 전에 다니던 태권도 학원을 새로 생긴 곳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그게 우리 포장마차 뒤쪽 건물 이었나보다. 나는 태권도학원을 가는 경석이에게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계란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 그대로 근처 공원으로 가서 빈 벤치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영화관 안에 있는 게임장에 가서 다른 사람들 게임 하는 것을 실컷 구경이나 하고 싶었지만 혹시 다른 애들이랑 마주칠까봐 관뒀다. 포장마차 안에 한 시간 정도 쓸 계란은 있을 테니 그쪽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나는 이번 달 글짓기 숙제에 무엇을 쓸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아빠는 항상 장사를 하느라 바쁘셨다. 그런 엄마아빠와 함께 했던 일 중에 기억나는 일이라곤 포장마차에서 심부름을 했던 일 뿐이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신다거나 귀가 안 들린다고 쓰는 것은 싫었다. 한 시간쯤 벤치에 앉아 글짓기에 쓸 내용을 생각하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아까 산 계란을 들고 포장마차로 갔다. 다행히 그 애들은 학원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빠도 잠깐 어딜 나갔다 오는 길이였는지 포장마차 앞에서 나와 딱 마주쳤다.

“으! 으으!”

내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서 나를 찾으러 마트를 갔다 오는 길이란다. 나는 근처마트에 계란이 떨어져서 멀리 있는 마트까지 갔다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계란을 삶을 물에 방금 사온 계란한판을 전부 넣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마치고 포장마차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수학숙제를 했다. 수학숙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학숙제를 끝내고 또 다른 숙제를 했다. 장사는 해가 진지 한 참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나는 다른 숙제들은 전부 끝냈지만 글짓기숙제는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글을 쓸 내용이 생각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시간이 일주일이나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씻은 후 이불에 누워 오늘 보았던 도복을 입은 경석이의 모습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꿈에는 도복을 입은 내 모습이 나왔는데 꽤 근사했다. 주말에는 이모가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엄마아빠는 다른 날처럼 장사 준비를 하느라 일찍 나가셨다. 이모는 작년에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하기 전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내가 집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모였는데 이모랑 따로 사니까 말할 사람이 없어서 답답했다. 하지만 이모는 요즘에도 가끔 이렇게 우리 집에 와서 내 말동무가 되어주거나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이모는 집에 오자마자 우편물들을 뜯어보았다. 대부분 세금을 내는 노란 종이였다.

“현성아, 이리 와봐. 저번에 이모랑 같이 은행가서 이 노란종이들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니?”

나는 세달 전부터 이모랑 같이 한 달에 한 번씩 집으로 배달되는 노란 종이들을 은행에 가져가서 돈을 주고 종이에 도장을 찍어오는 연습을 했다. 이모는 내년 봄이면 이모부가 직장을 멀리 옮겨서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야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모가 하던 것들을 전부 내가 맡아서 해야 한다며 요즘 집에 올 때마다 나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있다.

“당연하죠. 여기 적힌 숫자만큼 돈을 들고 가서 번호표를 뽑고 순서가 되면 돈이랑 종이를 같이 은행 이모한테 주면 되잖아요.”

나는 그런 것쯤은 별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어휴 역시 우리 현성이는 한번 가르쳐주면 다 기억하네! 이모가 다음 주에는 시간이 없어서 현성이가 혼자 은행에 가서 세금을 내야하는데 잘 할 수 있겠어?”

이모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 아홉 살이지만, 이모랑 같이 몇 번이나 연습해보았기 때문에 이제 혼자서 세금을 내는 일쯤은 거뜬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반 아이들 중에 혼자서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일 것이다.

“걱정 마요 이모! 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어요. 아마 우리 반에서 내가 세금 내는 걸 제일 잘할걸요?”

나는 주말 내내 포장마차 따위는 잊어버리고 이모랑 수다를 떨면서 보냈다. 그리고 또다시 월요일이 돌아왔다. 짝꿍이 오늘 우리가 하는 게임에 새로운 맵이 나왔다면서 수업 끝나고 피씨방에 가자고 했다. 나는 무척 가고 싶었지만 아직 모아놓은 돈이 부족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오늘은 세금을 내러 가야 했다. 나는 짝궁에게 오늘은 엄마가 일찍 오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학교가 끝난 후, 아침에 엄마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은행에 갔다. 역시 생각대로 혼자 세금을 내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나는 세금을 내고 포장마차로 가는 내내 새로 생긴 맵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동전지갑을 꺼내 계란심부름을 하면서 조금씩 모아놓은 돈을 세어보니 목요일쯤엔 피씨방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며칠 동안 짝궁이 들려준 새로 생긴 맵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피씨방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목요일이 되었고, 나는 짝꿍과 함께 피씨방에 갈 수 있었다.

방과 후에 신나게 피씨방으로 달려가서 새로 생긴 맵에 들어가니 아직 내가 사지 못한 새로 나온 아이템을 장착한 캐릭터들이 많이 보였다. 나는 그 아이템을 보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글짓기 숙제가 생각났다! 내일까지 글짓기를 내려면 오늘까지 완성해야했다! 나는 두 시간 동안 피씨방에서 게임을 하는 둥 마는 둥 한 후에 짝궁과 헤어져 글짓기숙제를 하기 위해 포장마차로 달려갔다. 하지만 포장마차 앞에는 도복을 입은 경석이와 경석이의 동생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 가게에서 떡볶이를 먹으며 깔깔대고 있었다.

“야! 이 바보야!”

“바보야! 메~롱. 킥킥킥. 형, 이 아줌마아저씨 진짜 우리가 하는 말 못 듣나봐.”

엄마아빠는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그 애들이 하는 짓들을 못 봤다. 아빠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 애들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씩 웃으면서 떡볶이를 먹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화가 났다. 그러다가 아빠가 뒤에 서있는 날 발견하고 반가운 듯이 손짓했다.

“으! 으으!”

경석이도 뒤를 돌아보고 날 발견하더니 말을 걸었다. 아마 내가 이집 단골쯤으로 생각했나보다.

“어! 현성아! 너 이 아저씨 알아? 여기 아줌마랑 아저씨 말 못한다. 자기들끼리 손으로 얘기해. 진짜 웃겨. 봐봐, 내가 이렇게 뒤에서 얘기하면……악!”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경석이의 가슴을 퍽 소리 나게 밀쳤고 경석이는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 여기 우리 엄마아빠 가게거든? 여기로 떡볶이 먹으러 오지 마!”

옆에 있던 동생은 갑자기 자기 형을 밀치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다급하게 뛰어나와 날 붙잡았다. 경석이는 내가 말한 사실에 당황한 건지, 자기 동생이 울어서 혼란스러운 건지 벌떡 일어나 옷을 툴툴 털더니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동생의 손을 잡고 학원 쪽으로 사라졌다.

“아! 아아!”

엄마는 계속 왜 그랬냐고 지금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보며 날 다그쳤지만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 엄마 말을 무시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엄마아빠랑 목소리로 얘기하고 멀리 놀러도 가고 싶어! 나도 쟤들처럼 태권도학원 다니고 싶다고! 이런 계란 심부름 따위 말고!”

나는 옆에 있던 계란바구니를 발로 힘껏 차버렸다. 바구니 안에 있던 계란들은 바닥으로 쏟아져서 내 기분처럼 엉망진창이 되었다. 나는 발에 걸리는 계란들을 짓밟아버리고는 공원 쪽으로 달려갔다.

“아! 아아!”

엄마가 뒤에서 뭐라고 소리쳤지만 오늘만큼은 엄마의 말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풀이 죽은 얼굴로 공원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공원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아줌마, 친구들이랑 같이 어딘가로 가는 교복 입은 형·누나들. 다들 걱정도 없고 행복해 보였다. 나는 저번 주엔 경석이를 보고 엄마아빠가 창피해 숨어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경석이에게 화를 낸 내 모습이 우스웠다.

경석이가 우리 엄마아빠를 깔보았기 때문에 화가 난건가? 아니면 아무 걱정 없이 태권도 학원이나 가는 경석이에게 샘이 났었나? 나와 같은 나이에 이렇게 많은 일들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학교에 입학하기 전 까지는 내가 엄마아빠를 대신하는 일들이 당연한 일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해 다른 친구들을 사겨보니, 우리 집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한참을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 벤치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내 쪽으로 오더니 말을 걸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

“네, 그러세요.”

나는 내가 앉아있던 벤치의 한쪽 자리를 할아버지에게 내어주었다.

“아까부터 여기에 앉아있던데 누구 기다리고 있는 게야?”

그 할아버지는 한참 전부터 내가 맞은편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이 신경 쓰였나보다.

“아니요. 그냥 지나가던 사람들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러는 할아버지는 왜 아까부터 계속 저기에 앉아계셨어요?”

“허허. 나도 너처럼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하고 집에선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빨리 이 할아버지처럼 늙어서 할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럽네요. 저도 할아버지처럼 할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모든 걸 다 제가 해야 되거든요. 집으로 오는 전기요금도 제가 내러 가야 되고, 우편물들도 다 제가 읽어야 해요.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얼마인지 듣고 돈을 내는 것도요. 도무지 우리 엄마아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불만을 할아버지에게 쏟아내어 버렸다.

“아이고, 엄마아빠가 몸이 불편하신가보구나?”

“아니요. 몸은 건강한데 귀가 안 들려서 말을 못하세요. 그리고 학교를 안다녀서 글씨를 못 읽어요. 이모가 그랬는데 엄마가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해서 형제 중에 한명만 학교에 갈 수 있어서 엄마는 학교에 못 가셨데요. 아빠네 집도 그랬고요. 제 생각에는 엄마아빠가 안 들리기 때문에 학교를 안 보낸 것 같지만요. 왜,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나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설명을 했던 것을 할아버지에게 되풀이해서 말했다.

“허허, 벌써 그런 것도 알아? 그래, 엄마아빠가 말을 못하시는구나. 그래도 말이다, 널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거란다. 아무도 널 불러주지 않으면 금방 심심해져서 못 견딜걸? 하루 종일 여기 앉아서 사람들 구경하면 재미있겠니?”

“아뇨, 사실 벌써 지루해요.”

“거봐라. 그러니 너희 부모님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거라.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마음 쓰는 일이라 쉽지 않단다.”

그 할아버지는 꼭 우리 이모처럼 말했다. 이모는 항상 나에게 엄마아빠가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엄마아빠를 미워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딱히 부모님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저를 위해서 힘들게 돈을 벌고 계시니까요. 그렇지만 그냥 지금 상황이 조금 짜증날 뿐이에요.”

“허허, 그래도 낮선 나에게 네 사정을 다 털어놓다니, 너는 참 씩씩한 아이이구나. 걱정하지 마라. 시간이 네 고민을 해결해 줄 거야. 언젠가 먼 훗날이 되면, 이 할애비가 했던 말이 기억날 거다.”

할아버지는 알쏭달쏭한 말을 하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는 저녁 먹으러 집에 가야겠다. 너도 굶지 말고 잘 먹어야 키가 쑥쑥 큰다. 기회가 되면 또 보자꾸나.”

할아버지가 밥 얘기를 하자 갑자기 내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때 내가 있는 벤치로 걸어오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두 손에는 검은 비닐이 들려있었다.

“으! 으으!”

아빠가 배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내가 배고플까봐 떡볶이를 가져왔단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는지…. 갑자기 아빠가 와서 말을 거는 바람에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지 못해서 인사를 하려고 돌아보니 할아버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 본 할아버지였지만 내 마음을 시원하게 털어 놓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떡볶이 냄새를 맡자 갑자기 배가 고파진 나는 따뜻한 떡볶이를 허겁지겁 먹었다. 떡볶이 안에는 계란이 두 개나 들어있었다.

계란을 먹다가 목이 막혀 콜록거리자 날 지켜보던 아빠가 보온병에 들어있는 오뎅국물을 따라서 건네주었다. 나는 엄마아빠를 부끄러워한 내 자신이 창피해졌다. 다른 애들의 엄마아빠처럼 목소리로 얘기하거나 태권도학원을 보내주지는 못하지만, 내가 목이 막히는 것을 신경써주고 나를 꼬옥 안아주는 것은 나를 사랑 하는 우리 엄마아빠뿐이기 때문이다.

오뎅국물을 후후 불어서먹는데 내 볼 위로 뜨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뎅국물은 평소보다 더 짰다. 공원에서 떡볶이를 다 먹고 아빠와 같이 포장마차로 돌아가니 엄마가 평소와 같이 웃으며 날 꼭 안아주셨다. 나는 포장마차 뒤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글짓기 숙제를 펼쳐놓고 드디어 첫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부모님은 귀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부모님은 세상에서 저를 제일 사랑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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