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생은 지금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바로 아래 남동생과 여동생이 항상 같이 다녔는데 그 동생들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오빠들은 아예 그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아래 남동생은 항상 그의 가방을 대신 메고 같이 다녔기에 그는 언제나 그 동생을 의지했고 동생도 누나를 살뜰히 돌보았다.

부산에서 의상실 할 때. ⓒ이복남

“동생이 누나를 끔찍이 생각했지만 동생도 어리다보니 어쩌다 다른 친구들하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누나를 잊어버리는 겁니다.”

교문 앞에 멍하니 서서 하염없이 남동생을 기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쩌다 퇴근하는 선생님이 보시고 “너 아직도 안 갔냐?”고 묻기도 했다.

선생이 그 모습을 보고는 동생 대신 데려다 주지는 않았을까.

“아니요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선생들은 그를 집까지 데려다 주는 일은 없었지만, 남동생이 늦게 오는 날은 친구들이 데려다 주기도 했다.

필자가 김태순 씨를 인터뷰하고 언뜻 생각나는 제목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이다. 김태순 씨는 중증장애인인데 어머니가 조금만 관심이 있었다면 좀 더 아래쪽 그리고 편의시설이 되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1년에 굿을 몇 번씩이나 하면서도, 김태순 씨를 위해서 집을 이사하고 보조기를 맞춰주는 등의 일은 안 하셨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굿을 하셨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김태순 씨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학교 선생이 김태순의 상태를 보고 보조기라도 하라고 했으면 그런대로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학교 다니기가 너무 불편해서 중퇴를 할 정도였다.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 낳고는 폭력 남편에게 시달렸으나 아들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참고 살았지만 아무도 참지 말라고 말해주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야 어떤 장애인을 만나서 여수애양병원에서 다리 수술을 한 후 보조기를 하고는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그의 생활 내지 그의 장애에 대해서 이렇다 할 조언을 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바로 아래 남동생과 여동생이 부축해 주지 않으면 저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동생들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남동생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아, 누나 미안미안!”하고는 그의 가방을 받아 들고 옆에서 부축해서 대청동 산비탈 집으로 향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바로아래 남동생이랑 여동생이 양쪽에서 부축을 해 주었습니다.”

아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이복남

김태순 씨를 인터뷰 하면서 정말 어이없는 게 어머니나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오빠가 둘이나 되는데 오빠들은 무얼 했나 싶었다.

“글쎄요? 큰오빠는 자기생활하기에 바빠서 저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작은오빠는 비 오는 날에는 가끔 업어 주기도 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작은 오빠 등에 업혀서 그가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가다가 작은 오빠가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들에게 부끄러웠는지 우산을 앞으로 내리라고 했다.

소풍이나 운동회는 어떻게 했을까

“그때만 해도 개근상이 있던 시절인데 저는 결석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운동회 때도 학교에 가서 자리를 지켰고, 6학년 때 구덕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나이 많으신 남자 선생님이 저를 업고 가셨습니다.”

그는 선생님 등에는 안 업히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자꾸만 괜찮다고 업히라고 하셨다.

“선생님 지 너무 무겁지예?”

“괜찮다. 내가 너를 너무 몰라서 미안하다.”

그전에도 소풍 때만 되면 어머니가 학교에 오셔서 “우리 딸 결석 시키지 말아 달라‘ 당부를 하셨는데 그전에도 소풍 때 아버지가 한번 업고 갔던 것 같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주여중에 입학했습니다.”

동주여중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남일초등학교와 가깝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제 어깨를 두 동생이 메고 다녔습니다.”

동생들은 그를 동주여중에 데려다 주고 자기들 초등학교로 갔다.

“동주여중은 광복동 평지에 있어서 동생들 덕분에 다닐 수가 있었고 친구들이 가방도 들어 주곤 했습니다.”

서울 양장점 직원들과. ⓒ이복남

그때까지만 해도 나중에 자라서 무엇을 하고 싶다든가 하는 그런 꿈은 별로 없었다.

“하루는 사촌오빠가 집에 와서 저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오빠는 저에게 약대를 가라고 했습니다.”

오빠 말을 듣고 보니 약사라면 그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장래 희망은 약사가 되었다.

“약사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마땅히 갈 고등학교가 없었습니다.”

집 가까이에 남성여고가 있었지만, 그가 다니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여상에 시험을 쳐서 합격은 했습니다.”

여고생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꿈에라도 그리던 모습이었던가. 여고생이 되면 다음은 약대생이 될 터이니 가슴 설레는 그리움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보조기를 맞추었지만,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해서 부산 약대를 간다는 것은 너무나 멀어 보였습니다.”

가족들 누구 하나 그를 지지하거나 응원해 주지 않았고 대학생은커녕 당장 **여상을 다니기도 너무나 힘이 들고 벅찼다.

“국민학교나 중학교는 그래도 집에서 걸어 다녔지만 **여상까지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끔찍했습니다.”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 같았다. 어머니를 비롯해서 가족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지 **여상을 졸업하라는 것이 아니라 제발 학교를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학교를 그만두고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

“학교를 그만두고 차라리 양장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아들 중학교 졸업식. ⓒ이복남

양장을 배우는 것에는 관심이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두 손은 성하므로 손으로 하는 것은 그런대로 잘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귀가 솔깃하기도 했습니다.”

학교를 중퇴하고 YWCA 등 몇 군데 양재학원을 다녔다. 그가 양재학원을 고르는 1순위는 편의시설이었다.

“양재학원은 편의시설 등이 되어 있는 곳을 골라서 다녔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양재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치수를 재고 패턴을 뜨고 마름질을 하고 그리고 미싱으로 옷을 만들었다.

“미싱이 전부 발 미싱인데 저는 발로 미싱을 밟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전에 어느 지체장애인이 한복을 만들면서 비장애인 기능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우승을 하지 못해서 억울하다고 했다. 그가 우승하지 못한 이유는 발로 밟는 미싱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미싱을 비장애인처럼 밟을 수 없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김태순 씨도 양재를 배우면서 디자인 등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었지만 발로 밟는 미싱은 제대로 밟을 수가 없어서 서툴렀다고 했다.

“그때는 보조기를 했는데 길을 가다가 보조기가 부러져서 낭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방에는 교과서 대신 디자인 관련 책이랑 가위와 바늘 실 등 외에 커다란 자가 들어 있었다.

“제가 디자인 가방을 메고 다리를 절면서 다니는 것을 본 한 아주머니가 저를 불렀습니다.”

아주머니가 조심스레 꺼내는 말은 자기 딸이 장애인인데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한다고 했다.

“이렇게 다니는 아가씨를 보니 너무 부러운데 우리 딸을 한 번만 만나 주세요.”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데 아줌마의 딸은 땅을 밟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아줌마의 집이 근처였기에 집에 가서 누워있는 딸을 만났습니다.”

딸은 그에게도 반감을 보였지만, 보조기를 하고 목발을 짚는다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딸의 장애는 그래도 자신보다는 나아 보였던 것이다.

“그 딸에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 주고, 목발과 보조기부터 맞추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들은 얘기는 항상 엄마 등에 업혀 다녔던 애가 보조기와 목발을 맞추고는 남성여고를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