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이 시는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이다. 이 시는 자연 속에서 탈속적 그리고 달관적으로 살아가는 자연친화적인 모습이다. 시인은 산에서 씨나 뿌리며 밭이나 갈며 살라고 했다.

그러나 아들딸 낳고 들찔레처럼 쑥대밭처럼 살아도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쯤은 그렇게 살 수도 있었구나 싶겠지만, 젊은 날 그 당시에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고 살 수도 없었다.

밭 갈고 씨 뿌리며 소박하게 산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밭을 갈 수도 없을뿐더러 씨를 뿌릴 수도 없었고 어쩌면 하루하루 절망하지 않고 살아낸다는 것이 지나고 보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깜깜하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 “밭 갈고 씨 뿌리는 것이 닿을 수 없는 꿈이었지만 그 속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었어요.” 갈 수 없는 나라에 죽어서 새가 되면 갈 수 있으려나.

김태순 씨. ⓒ이복남

김태순(1954년생) 씨는 부산 대청동에서 5남매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셋째 딸은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옛말이 있듯이 위로 두 아들이 있고 셋째 딸을 얻었으니 그는 집안의 복덩이였다.

부모님은 경북 의성에서 농사를 지었다. 의성에서 어떻게 부산으로 왔을까?

“큰아버지가 충무동 수산센터에서 일을 하셨는데 아버지를 오라고 하셨나 봅니다.”

큰아버지가 오라고 해서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으로 오기는 했지만, 시골에서도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밭일이나 집안일은 어머니 차지였다. 부산이라는 도시에 와서 아버지의 할 일은 더욱 더 없었다. 아버지의 할 일이 없었다기보다 아버지는 일 할 생각을 안 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부산에 와서 무얼 하셨을까.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하셔서 평생 백수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집안의 생활은 누가 어떻게 했을까.

“엄마가 수산센터에서 어상자 일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생선을 담는 어상자는 대부분이 나무상자였는데 어상자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상자를 대주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왜 같이 일을 안 했을까.

“아버지는 무엇이 불만인지 항상 술에 절어 계셨고 술이 깨기 전에 또 마시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엄마가 하는 일에 별로 흥미도 없었고, 하시려고 하지도 않아서 엄마가 내버려 두신 것 같습니다.”

아무튼 김태순 씨는 셋째 딸로 태어나서 친인척 등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돌 때 쯤 이었다고 하는데 부근에 있는 큰집에 제사가 있어서 식구들이 다 갔답니다. 큰집에서 일하던 언니가 제가 귀엽다고 업고 나가서 우물가에서 놀다가 애가 뒤로 빠졌답니다.”

우물가에서 포대기로 업은 아이가 뒤로 빠지면서 넘어진 아이는 까무러쳤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보채기 시작했다. 제사도 지내기 전 아이는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집 근처에 메리놀병원에 있는데 옛날에는 수녀병원이라고 했답니다.”

부산 용두산 공원 야경. ⓒ이복남

어머니는 놀라서 아이를 업고 수녀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원에서 해열제 주사를 맞고 돌아 왔다. 자고 일어나니 열은 내렸지만 아장아장 잘도 걷던 아이는 일어나지도 못했다.

소아마비는 폴리오(Polio) 바이러스에 의한 신경계의 감염으로 발생하며 척수성 소아마비의 형태로 발병한다. 5세 이하의 아이가 걸리는 경향이 많아 병명에 소아(小兒)가 들어가지만, 아이만 걸리는 병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이 소아마비지만,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1921년 8월 39살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지만 꾸준한 재활 훈련 끝에 어느 정도는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소아마비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는데, 1955년 미국 의사 조너스 에드워드 솔크(Jonas Edward Salk)가 발명한 백신으로 인해 점차 감소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아마비 예방접종으로 점점 줄어들어 1983년 이후 소아마비 환자는 발생하지 않았고, WHO는 1994년 서유럽, 2000년에는 한국을 포함한 서태평양 지역에서 소아마비 박멸을 선언하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소아마비가 한창 유행하던 때라 처음에는 어머니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를 했다.

“엄마가 용하다는 곳은 다 다니셨다고 했습니다.”

병원도 다녔고 한의원도 다녔다. 집에서는 탕약 달이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예전에는 집에서 약탕기에 한약을 달였다. 요즘 탕약은 한의원에서 다 달여 준다.

“제가 어릴 때 발가락에 커다란 침을 맞았던 것 같습니다.”

발가락에 대침을 맞으면서 아파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외에도 굿을 했는데 굿은 여러 번 했다.

“음식을 차려놓고 굿을 하면서 제가 방에 누워 있는데 굿하는 무당이 제게 굿하는 대를 흔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아마비는 그의 오른쪽 허리쯤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습니다.”

명절날 외사촌들과 용두산 공원에서. ⓒ이복남

그의 집은 메리놀병원 근처 대청동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큰길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45도 쯤 되는 급경사였다.

어머니가 돈을 잘 벌었다면서 아이를 위해서 집을 아래쪽 평지로 왜 이사를 안 하셨을까.

“집에 돈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나 아버지가 저를 위해서 평지로 이사해야 된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아래로 두 동생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두 아이를 낳고도 김태순 씨가 대여섯 살 때까지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셨으나 별 차도가 없자 거의 포기상태였다.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니까, 동래에 무슨 재활시설 같은 곳이 있었는데 엄마는 저를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장애아이들이 있었다. 여러 가지 재활 프로그램을 했던 것 같았다.

“그곳이 어딘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곳에서 자전거를 탔던 것 같습니다.”

그곳이 어딘지는 필자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리에 조금씩 힘도 길렀던 것 같았다.

“지금은 엄마가 안 계셔서 물어 볼 수도 없지만, 엄마는 거기 더 두면 안 되겠다면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그곳에 좀 더 있었으면 재활이 더 되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그가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가 하는 일은 더 바빠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타령이시고, 어머니는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 왔다.

“다른 아이들은 다 학교에 가는데 저만 홀로 방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지었습니다.”

방안에서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면 저 멀리 영도 봉래산이 보였다. 바다에 배들이 왔다갔다하고 그리고 영도다리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때만 해도 어려서 잘 몰랐지만 특히 영도다리가 올라가면 삐~익하고 사이렌이 울렸는데 영도다리가 올라가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어린 그가 방안에서 창밖으로 볼 수 있는 게 영도 방향의 산과 바다 그리고 영도다리가 전부였다.

영도다리는 부산 중구와 영도를 잇는 국내 유일의 도개교이다.

서울에서 서울어린이대공원에서. ⓒ이복남

*도개교(跳開橋, bascule bridge)는 배가 지나갈 때, 다리가 한쪽 또는 양쪽으로 들어 올려져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다리이다.

영도다리는 영도에 많은 사람이 살기 시작하고 도선이 빈번해지자 1926년부터 영도다리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1931년 10월부터 영도다리 공사가 시작되어 길이 400m 폭 25m의 다리가 1934년 11월에 완공되었다. 당시엔 하루에 7차례 도개가 있었으나 영도다리에 교통량이 많아지고 다리의 노후화로 1966년부터 도개가 중단되었다.

그 후 부산시청자리에 제2롯데월드가 들어서면서 영도대교를 4차선에서 6차선으로 재가설 조건부로 제2롯데월드 신축 공사 허가가 났다. 그리고 영도다리도 교량의 보수 · 복원 및 확장 되어 2013년 11월 27일 재건 이후 관광객 유치를 위해 12시에 15분 과정으로 도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점심시간 등 주변 상인 등의 반발로 2015년 9월부터 도개 시간은 2시부터 15분간이다. 영도다리에 얽힌 많은 비화 가운데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있다.

김태순 씨가 어렸을 때만해도 영도다리는 하루에 일곱 차례나 도개가 되었다니 어린 마음에 하루 종일 영도다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여덟 살이 되어 다른 친구들은 전부 (란도셀)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데 저는 엄마가 학교를 안 보내 줬어요.”

어머니의 변명은 걷지도 못하는데 학교는 무슨 학교냐? 어머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학교에 보내 달라고 울면서 졸랐다. 아버지는 날마다 술타령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들 호인이라고 했지만 빵점 가장이고 빵점 아버지였다. 특히 셋째 딸의 공부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했다.

“그래봤자 엄마는 새벽에 나가고 밤에 들어오고 했으니까 엄마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일 년 동안 어머니를 졸랐던 덕분인지 다음해 3월 남일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간다고 목발을 맞췄습니다.”

양쪽 목발을 맞추고 목발 짚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도저히 목발을 짚을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그런지 목발이 자꾸만 미끄러져서 김태순 씨도 같이 넘어지곤 했다.

“입학식 때는 엄마가 업고 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학교 다닐 때는 두 동생이 양쪽에서 제 팔을 어깨에 메고 다녔습니다. 저는 양쪽 팔을 동생들이 메고 다녔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 같은데 그때는 그렇게 다녔습니다.”

위로 오빠가 둘인데 이상하게 오빠들은 그의 기억에 별로 없고 동생밖에 없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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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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