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시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이 시에서 마지막에 나오는‘하냥’은 전라도 사투리로 ‘한결같이, 늘’이라는 말이다. 이 작품은 모란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모란이 떨어져버린 뒤의 ‘절망감’이라는 이중적 갈등을 다루고 있다.

시인은 모란이 피고 지는 과정을 통해 소망하는 것에 대한 기다림과 그것이 이루어진 후 그 가치와 의미가 퇴색함으로써 생기는 비애를 형상화하고 있다.

김기수 씨. ⓒ이복남

시인은 마지막 행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일까. 어쩌면 인생사에서는 영원한 희망도 없고 또한 영원한 절망도 없다.

“어릴 때 우리 집 마당에는 봄이면 모란꽃이 화려하게 피어나곤 했는데, 모란꽃이 그렇게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김영랑 시인이 우리 옆 동네 강진 출신이라는 것도 어릴 때는 몰랐습니다.”

김기수(1976년 생) 씨는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2남 2녀의 둘째인데 위로 누나가 있고, 아래도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고흥군은 반도인데, 뒤는 산이고 앞은 바다인 농촌이자 어촌마을입니다. 고흥군은 대륙에서 보면 왼쪽에 나라도 우주발사기지가 있고 오른쪽에 소록도가 있었지만 저의 고향은 거기서도 더 들어간 거금도라는 섬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농사도 짓고 바다에 나가서 일도 하곤 했다. 밭에는 양파 마늘 감자나 고구마 등을 심었다. 바다에서는 멸치를 잡고 미역을 따고 김을 떴다.

“어렸을 때 새벽에 일어나서 부모님이 김을 뜨시면 뜬 김을 말리기 위해 건조장으로 날랐습니다. 요즘은 전부 기계로 말립니다.”

부모님은 농사도 짓고 멸치도 잡고 미역도 따고 김도 떴지만 항상 가난했다. 다른 집들도 대부분이 다 비슷했다.

“태풍이 오면 밭농사는 물론이고 바다도 싹 쓸어갔습니다.”

태풍은 적도 부근이 극지방보다 태양열을 더 많이 받기 때문에 생기는 열적 불균형을 없애기 위해, 저위도 지방의 따뜻한 공기가 바다로부터 수증기를 공급받으면서 강한 바람과 많은 비를 동반하며 고위도로 이동하는 기상 현상 중의 하나이다.

북태평양 서부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 중에서 중심 부근의 최대 풍속이 17m/s 이상으로 강한 폭풍우를 동반하는 자연현상을 말한다. 발생 해역에 따라 태풍(Typhoon), 허리케인(Hurricane), 사이클론(Cyclone), 윌리윌리(Willy-Willy)라고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

“부모님에게 들은 얘기로 사라호 태풍 때는 우리 마을을 싹 쓸어 갔답니다.”

거금대교에서 딸하고. ⓒ이복남

사라호 태풍은 우리나라를 덮친 역대급 태풍으로 1959년 9월 15일에 발생했으니 그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그 후에도 그가 어릴 때 닥친 크고 작은 태풍으로 어장은 물론이고 미역밭이나 김밭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는 적령기가 되자 지금은 학생 수가 없어서 폐교된 금장국민학교를 다녔다.

“집에서는 염소도 키우고 소도 키우고 해서 학교에 갔다 오면 깔을 베러 다녔습니다.”

소나 말에게 먹이는 풀을 꼴이라고 하는데, 전라도 사투리로 깔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는 농사도 짓고 김도 뜨서 말리고 보통아이들처럼 그렇게 자랐습니다.”

혹시 나중에 커서 뭐가 되겠다는 꿈은 있었을까.

“국민학교 때 수학이 재미있어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수학선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면 부모님을 도와서 농사도 짓고, 바다에 나가서 미역도 따고 김도 뜨고 고기잡이도 하면서 수학 선생하고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데, 지휘봉을 들고 다니시면서 애들 손바닥을 딱딱 때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저도 두어 번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추첨을 했다.

“금산면에 중학교가 두 군데 있었는데, 저는 금산동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가 사는 곳은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십리가 넘었는데 금산동중학교 쪽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번 밖에 없었다. 아침에는 학교 쪽으로 갔지만 오후에는 다른 쪽으로 돌아 왔던 것이다. 십리는 4km정도인데 집에서 학교까지는 6km 쯤 될 거라고 했다.

“아침에는 버스를 탔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걸어 왔는데 우리 마을에는 여섯 명이 동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집에서 둘째 아들하고. ⓒ이복남

중학교 다닐 때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없을까.

“학교 수업을 마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섯 명이 모여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다녀서 그렇게 먼 길은 아니었습니다.”

길은 비포장 신작로 길이었는데 철마다 갖가지 꽃이 피고 해서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가을이면 산에 머루가 까맣게 익었는데 따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머루는 저 높은 산등성이에 있어서 보기만 할 뿐 따러 갈 수는 없었다.

“염소를 방목했는데 학교에 갔다 오면 염소를 돌아야 했습니다.”

누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보세공장에 다닌다고 했다.

“그러다가 3학년 때부터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습니다.”

왜 자취를 하게 되었을까.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동생과 같이 살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금산종합고등학교 공과에 입학했다.

수학선생이 되고 싶었다면서 왜 문과를 안 갔을까?

“자라면서 수학선생의 꿈은 멀어졌고, 그래도 순천공고를 가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금산종합고등학교 공과는 육성회비 같은 게 면제되었고, 영농후계자로 학비도 저렴했다.

“학교에서는 트랙터나 콤바인 경운기 이양기 등 농기계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금산종고를 졸업할 때까지 동생들과 같이 자취를 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이랑 세 명이 한 방에서 살았습니다.”

고3이 되고 추석 무렵 금산면 농협 수리센터에 취직이 되었다.

“사람들이 트랙터 콤바인 경운기 이양기 등 농기구가 고장 나면 가져 왔는데, 제 위에 사수가 한사람 있어 그 선배가 하는 일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는 사수가 하는 농기계 수리를 옆에서 거들면서 수리센터에서 2년을 보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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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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