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홀로 지킨 딴 하늘에서

받아들인 슬픔이라 새길까 하여

지나가는 불꽃을 잡건만

어둠이 따라서며 재가 떨어진다.

바람에 날려 한 많은

이 한 줌 재마저 사라지면

외론 길에서 벗하던

한 줄기 눈물조차 돌아올 길 없으리.

산에 가득히 …… 들에 펴듯이 ……

꽃은 피는가 …… 잎은 푸른가 ……

옛 꿈의 가지가지에 달려

찬사를 기다려 듣고 자려는가.

비인 듯 그 하늘 기울어진 곳을 가다가

그만 낯선 것에 부딪혀

소리 없이 열리는 문으로

가는 것을 나도 모르게 나는 가고 있다.’

이 시는 김광섭 시인의 ‘가는 길’이다. 하늘은 만인의 것이다. 시인은 처음부터 ‘내 홀로 지킨 딴 하늘’이라고 했다. 내 홀로 지킨 딴 하늘은 만인의 것이 아니라 나만의 고독이고 나만의 방황이다. 그 하늘에 슬픔을 새긴다는 것은 슬픔을 참고 견디기 위해서리라.

‘지나가는 불꽃을 잡건만’ 지나가는 불꽃을 잡을 수도 없겠지만, 그만큼 고독과 슬픔은 너무나 깊어서 지나가는 불꽃에나 의지해 볼 거나, 이제 눈물조차 말라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거늘 무엇을 더 이상 안타까워하랴.

남성우 씨. ⓒ이복남

그러나 삶이란 산에 들에 피어나는 꽃들처럼, 돋아나는 푸른 잎들처럼,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나에게도 아름답고 찬란했던 꿈이 있었건만, 이제는 모두 다 내려놓고 초연하게 내 길을 가고 있다.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고독한 인생길은 계속될 테니까.

남성우(50세) 씨의 고향은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위로 누나가 하나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있는 1녀 2남의 다복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둘째지만 장남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용인에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종갓집의 장남이라 엄청 귀염 받고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지만 아버지는 건설 현장의 감독이시라 어렸을 때는 아버지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어린 시절에는 동네 또래들과 구슬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등으로 놀기도 했고, 겨울이면 땅이 얼어서 아버지가 일을 쉬어야 했으므로 아버지와 같이 할머니 댁에 살면서 썰매를 타며 놀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농사를 크게 지으셨기에 동네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고 아버지가 8남매의 장남이고 그 또한 장손의 장남이라 의시 대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어릴 때는 아주 개구쟁이였고 엄마 아버지도 못 말리는 말썽꾼이었습니다.”

학령기가 되어 홍제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는 재미가 없고 운동을 좋아해서 처음에는 태권도를 했습니다.”

스포츠는 다 좋아했다. 태권도를 비롯해서 합기도 유도 야구 그리고 겨울이면 스케이트도 즐겼다.

“당시만 해도 스케이트 장비가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없었지만 저의 장래 희망은 야구선수였습니다.”

중학생 때. ⓒ이복남

그는 야구 선수를 꿈꾸었는데 스포츠를 좋아하니까 부모님도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지원을 해 주었다.

“**중학교에 특기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중학교에 유도부 특기생으로 들어갔다. 당시 **중학교에는 유도부가 없었으나 그가 특기생으로 들어가서 유도부가 만들어졌다.

“유도가 재미있었고 유도선수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유도 외에는 공부도 안 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걸핏하면 선배들과 싸웠다.

“2학년 때 선배들하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누구 잘못인지 잘 모르겠지만 잘잘못을 따질 것도 없이 그는 2학년이고 그가 대들고 싸웠던 사람은 3학년 선배였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좀 있으면 풀릴 거라고 했다. 그는 장손이라 기다리는 동안 개인 과외를 했다.

“기다리라고 하더니 저의 퇴학은 풀리지 않았고, 퇴학생이라고 소문이 나서 다른 학교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학원을 다녔으나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번번이 검정고시도 떨어졌다.

“오토바이를 사 줘서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녔습니다.”

오토바이를 운전하려면 원동기 면허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열여섯 살이 되자마자 원동기 면허를 땄습니다.”

다치기 전의 어느 날. ⓒ이복남

집에서는 공부하라고 학원을 보냈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게 너무 싫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하도 사고를 치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시골로 내려가라고 했다.

“할머니 집에서 트랙터와 이양기도 몰고 경운기도 몰고 다녔습니다.”

누나와 동생은 공부를 잘했는데 둘 다 대학을 보내지 않았다. 그가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에 누나와 동생이 대학을 다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세상이 전부 제 위주로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여기저기 사고만 치고 다녔다. 그야말로 불량 청년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눈에 뵈는 게 없었고, 모두가 다 제 세상 같았습니다.”

만 19살,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입대를 해야 했다. 부모님도 군대 가면 좀 달라질 거라고 했다.

“영장을 받아 놓고 보니 그제야 철이 들었는지, 입대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용돈을 좀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일산에 있는 철제 가구공장에 아르바이트로 취직을 했다. 입대하기 15일 전이었다.

“1989년 12월 3일이었습니다. 6시 반에 퇴근을 해서 씻고 나왔는데, 겨울이라 깜깜했습니다.”

동료와 같이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커브 길에서 뒤에서 오던 승용차가 그를 못 보았던 모양이다. 그는 차에 부딪혀 그대로 쓰러졌다.

“처음에는 별로 아프지 않았고, 운전기사가 내렸기에 다시 공장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척수장애인이 되어. ⓒ이복남

운전기사는 그를 부축해서 차에 싣고 다시 공장으로 데려갔는데, 공장에 가서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 병원으로 데려다 주세요.”

승용차 기사는 다시 근처 병원으로 그를 데려갔다.

“병원에 가니 엑스레이부터 찍으라고 했는데, 엑스레이 찍고 CT 찍고 여기저기 검사를 받으면서 제 발로 걸어 다녔습니다.”

검사를 다 받고 병실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는데 다리가 안 움직였다.

“저의 장애는 어쩌면 응급 처치를 잘못 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쳤다. 그런데 처음에는 별로 아프지 않았기에, 등뼈가 다 부러진 사람이 두 시간이나 여기저기 걸어 다니면서 검사를 받았으니 그동안에 척수 신경이 다 망가진 것 같다는 것이다.

“요즘은 척추나 경추 등을 다친 사람은 절대로 일어서면 안 되고, 이차 예방을 위해서 반드시 보조대를 하거나 들것에 누워서 응급실로 가야 됩니다.”

그제야 일산 병원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구급차를 불러서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보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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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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