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방안에 누워서 하늘만 쳐다보는데 그래도 세월이 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두 살 터울의 동생들이 태어났다.

“어디 한 번 나가려면 저 애(임상균)는 업고 큰 동생은 걸리고 작은 동생은 안고, 애 셋을 데리고 낑낑 대면서 겨우겨우 다녔습니다.”

취직을 해 보려고 해도 애들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학교 갈 나이가 다 되어 가는데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애를 태웠다. 그 무렵 고종사촌이 한의사 한 분을 소개했다. 외국에서 침을 배워 왔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한의사에게 아이를 맡겼다.

“그 사람이 아이의 목 뒤에다 침을 몇 방 놓았는데 얼마 지나니까 감각이 돌아오는지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복남

그 때 그 한의사에게 침을 많이 맞았다고 했다. 침을 맞고 나니 아이는 다리에 힘이 생겼는지 일어나서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우 한 발짝씩 떼어 놓는 아이의 걸음걸이는 위태위태했다.

몇 달을 그러다가 어머니는 아이를 업고 명덕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학교 갈 때나 집에 올 때는 제가 업고 다녔습니다.”

그 무렵 화명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아파트의 5층에 살았다.

“제가 아이를 업고 5층을 오르내리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이는 계단을 걸어 보겠다고 했다. 학교에서 아이를 업고 와서 아파트 계단 앞에 내려놓으면 아이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한 발 한 발 발자국을 떼면서 천천히 5층까지 올라갔다. 아침에도 혼자서 계단을 잡고 1층까지 내려왔다.

“3월에 입학해서 방학 때까지 한 5개월을 그렇게 한 것 같았는데 여름방학이 지나고 2학기부터는 학교도 혼자 다니겠다는 거예요.”

아마도 그렇게 몇 달 동안 5층을 오르내린 것이 다리에 힘을 키웠는지 임상균 씨의 재활에 큰 도움이 된 모양이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잘 걷지 않았고 슈퍼를 하면서 더 걷지 않아서인지 요즘은 그 때보다 더 못 걷습니다.”

임상균 씨가 혼자서 학교를 걸어 다니게 되면서 어머니도 처음에는 시간제 파출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다시 신발공장을 다니게 되었다.

“침을 맞고 걸을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신기해서 나도 커면 한의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이복남

그 무렵은 아직 어린애라서 그런지 부모님도 장래희망이 한의사라니까 별 말씀을 안 하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꿈은 깨어졌다. 그는 뇌성마비였다. 글씨를 쓰는 손도 떨렸는데, 한의사라면 아픈 사람들에게 침을 놓아야 하는데 그는 손이 떨려서 제대로 침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변명 같지만 한의사도 안 될 것 같고, 사실은 공부도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부모님도 장래희망 보다는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게 소원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체육시간에 교실에 남아 있었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운동장에 같이 나갔다. 야구나 축구 등 달리기 외에는 피구도 같이 하는 등 운동시간을 함께 했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동네아이들과도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 함께 어울렸다.

“친구들이 비실이라고 놀렸지만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받아 주지 않았으니까 친구들도 재미가 없는지 별로 놀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릴 때는 소풍가면 어머니가 업고 갔는데 4학년 소풍 때 어머니가 무슨 일인지 오지 않았다.

“소풍은 주로 금정산성으로 갔는데 한 번은 엄마가 못 왔고 제가 잘 못 걸으니까 담임선생이 저를 업고 갔습니다.”

그 때 자신을 업어 준 선생은 지금까지도 생각난다고 했다. 선생이나 반 아이들도 특별히 그를 따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잘 모르는 아이들이 놀리거나 말거나 어릴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주위의 시선이 정말 따갑게 느껴진단다.

어머니는 그래도 임상균 씨에게 장애가 있지만 특수학교를 안 보내고 일반학교에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중학생이 되었다. 공부는 그저 그렇게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침이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오는 것이 그가 해야 될 사명 같았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그래도 공부를 잘 했으나 그 아래 남동생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잠깐 엇나가기도 했었다.

임상균 씨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어떻게 보냈을까.

“내 장애에 대해서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리고 견디기 어려웠지만, 학교에 다니는 것만이 제 일이라 생각해서 그냥 참고 견뎠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래도 학교는 졸업해야 될 것 같았다.

“누가 저 같은 애를 쳐다나 보겠습니까? 그래서 딱히 미래에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초라해서 ‘내가 무엇이 되겠는가?’ 아무것도 자신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의지가 없었던 같기도 해서 부모님은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미안해진단다.

일산직업전문학교에서. ⓒ이복남

그래도 세월은 가서 학교를 졸업했다. 본인의 무심함에 오히려 부모님은 애가 탔다.

“어머니의 주선으로 지체장애인으로 등록을 하고 ‘일산직업전문학교’(현 일산직업능력개발원) 전자과에 입학했습니다.”

처음 어머니와 같이 가서 입학을 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에 목발을 짚는 소아마비가 한 명 있었는데, 일산에 가보니까 전부다 장애인이어서 약간은 놀랐습니다.”

학교에는 다리를 저는 장애인 뿐 아니라 목발을 사용하는 장애인도 있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등 별의별 장애인이 다 있었다.

학교에서는 전자회로 전자캐드 그리고 납땜 등을 배우면서 다른 장애인들 하고도 잘 지냈다. 1년 만에 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전기밥솥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장애인이 대여섯 명 있었는데 참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떤 때는 밤샘 야근도 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도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팀장이 장애인이라고 미워하는 지 자주 야단을 맞았다.

“일 못한다고 뭐라 하고 방 안 치웠다고 뭐라 하고, 너무 서러워서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사고가 났다. 일하다가 오른손 검지 손톱부분을 잘린 것이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왠지 그만 두면 안 될 같아서 치료를 받고 계속 있었다. 그동안 같이 있던 장애인 동료들은 하나 둘 그만 두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그만 혼자 남게 되었다.

“혼자 남으니까 나가라고 그런 것인지 팀장의 구박은 더 심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디었지만 더 이상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어머니가 그의 월급으로 월 40만 원짜리 적금을 넣는다고 했는데 2년이 지나 그 적금도 끝이 난 것 같았다. 회사에 다닌 지 2년 6개월만이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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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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