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후에 근처에 00골프장이 생겼다. 부모님은 연탄가게를 접고 아버지가 골프장에 잡부로 취직을 했다. 아버지는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는데 퇴근하면 학교로 그를 데리러 왔다. 그래서 가끔은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아버지의 허리를 껴안고 돌아오는 시간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렇게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주사가 심했다. 술에 취해서 집에 오면 언니와 오빠들은 도망을 갔고 어머니와 그만 남아서 아버지의 주사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교회에서. ⓒ이복남

아버지가 어머니나 자식들을 때리지는 않았으나 밥상을 뒤집어엎는 등 박살을 내는 바람에 집안 살림살이가 남아나지가 않았다.

“언니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다녔는데 오빠들이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언니들은 공장에서 늦게 오고 오빠들은 아버지의 주사가 무서웠는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이면 그와 어머니는 오빠들을 찾아 다녔는데 작은 오빠는 게임방 같은데서 찾아오기도 했으나 큰오빠는 며칠씩이나 종적을 감춰서 어머니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

“엄마는 평생 큰오빠 때문에 애를 태우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작은 오빠는 마음을 잡고 그와 함께 살고 있단다.

집안은 그렇다 치고 그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어렸을 때는 커서 간호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헝겊인형에게 주사도 놓고 토닥거려 주면서 혼자 병원놀이를 하며 간호사의 꿈을 키웠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눈 때문에 간호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절망감은 참으로 씁쓸하였다.

옛날에는 그랬다지만 현재도 그럴까 싶어 00간호대학에 문의를 해봤다. 의료인 국가고시에는 정신질환이나 마약 등 외에는 제한이 없지만 간호대학 입학시험에는 면접도 있으므로 어렵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필자에게 되물었다.

「의료법」 제8조 의료인의 결격사유에는 정신질환자, 마약·대마·향정신성의약품 중독자, 금치산자·한정치산자 등이다.

간호사의 꿈은 물 건너갔고 그 다음으로 그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은 노래였다.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그냥 꿈일 뿐이었어요.”

가수의 꿈은 언감생심 차마 꿈이라고 말 할 수도 없는 혼자만의 아픔이었다. 학교에서 소풍이나 노래자랑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중학교나 여상에서도 노래 잘하는 아이들이 저 말고도 여럿 있었어요.”

그래서 특별히 노래에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구서여중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남산새벽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했다.

“엄마가 남는 과일이나 채소를 가져 왔기에 과일은 잘 먹었습니다.”

깨진 수박도 가져오고 개구리참외, 자두를 비롯하여 사과 배도 가져왔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동네에서는 여행계나 낙찰계 같은 것을 많이 해서 부모님은 동네사람들과 관광버스 여행을 자주했는데 부모님의 여행에는 항상 그가 동행했다.

“엄마가 눈 때문에 저를 더 챙겼던 것 같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눈에 좋다는 온천에 그를 자주 데려갔다.

“그러나 제 눈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부모님이 그와 같이 셋이서 가끔 여행을 했으나 대부분의 일상에서 부모님은 맨 날 싸웠다.

청와대 견학. ⓒ이복남

“큰오빠가 고등학교 다닐 때 엄마가 낙찰계 계주를 했는데 큰오빠가 곗돈을 들고튀었습니다.”

어머니는 땅을 치고 통곡했다. 큰오빠는 누구하고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길로 큰오빠는 집을 나갔고 돈이 떨이지면 잠깐씩 집에 왔다가 나가면 또 몇 년 씩 안 들어오고 해서 결국에는 어머니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언니들은 다 결혼을 했고 그도 여상을 나와서 와이셔츠 공장에 취업을 했다. 와이셔츠 공장이라니 그 눈으로 미싱을 하는데 지장은 없었을까.

“눈이 나빠서 미싱은 못하고 다림질을 했습니다.”

다림질은 와이셔츠를 입기위해서가 아니라 포장하기 위한 다림질이었다.

“스팀다리미로 하루에 65장 내지 70장정도 다렸습니다.”

제일먼저 칼라를 다리고 등판과 앞판 위쪽을 다린 다음 마분지 같은 직사각형의 종이를 몸통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단추를 채우고 양쪽 소매를 다린 후에 홀딩을 해 놓으면 포장을 하는데 포장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하루 종일 뜨거운 다림판 앞에 서서 다림질을 했으나 당연히 할 일이라 생각했기에 별 불만이 없었다. 그리고 월급은 어머니에게 봉투째 갖다 드렸다.

그동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을까

“있었지요. 그런데 내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은 별로고, 그 사람이 좋아하면 제가 아니었어요.”

그러면서 만났다 헤어지고 하는 동안 세월은 가고 아직도 이렇다 할 인연을 못 만난 것 같다고 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사유로 회사를 몇 군데 옮겨 다니면서 99년까지 와이셔츠 공장을 다녔다. 그렇다면 회사는 왜 그만 두었을까.

“엄마가 해 주라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언니 친구가 대출을 받는데 언니하고 그가 연대보증을 썼다. 가게는 망하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보증을 선 그의 월급에 압류가 들어 왔다. 월급에 압류가 들어오는 바람에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월급도 월급이지만 회사에 알려지는 게 싫었습니다.”

그 무렵 한 지인이 눈이 나쁜데 왜 장애인등록은 안 하느냐고 다그쳤다. 장애인등록을 하게 되면 당장 지하철도 무료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장애인등록 대상자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병원에서 검진을 하고 장애인등록을 했는데 시각장애 1급이었다.

그 후부터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보험회사도 다니고 00정수기 영업사원도 하다가 마지막으로 손을 댄 것이 00회사인데 이른바 다단계였다. 잘 될 줄 알았으나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였다.

몇 년 동안 물건을 사고팔고 카드돌려 막기를 했으나 이자에 이자가 붙고 또 이자가 늘어나는 바람에 빚이 1억이 넘어서 하는 수 없이 파산신청을 했다.

부산점자도서관 중창대회. ⓒ이복남

그러는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술에 절어 살고 집에 오면 살림을 깨고 부수고 어머니와 싸우는 일상이 반복되어 있었다. 부모님이 싸우면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울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얘기 할 때는 그 때의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김귀옥 씨는 한참 동안 눈물을 삼키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술을 끊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의 술 때문이라 자책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술은 끊었으나 그 대신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한편 어머니가 낙찰계 계주를 했는데 큰오빠가 곗돈을 들고튀는 바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기저기 빚이 많아서 집을 팔아야 될 형편이었다. 집에는 그와 아버지 둘 뿐인데 집은 팔아야 될 형편이고 아버지는 건강이 나빠진 것 같아서 참으로 막막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종합병원에 모시고 갔습니다.”

폐암을 예상했는데 조직검사에서 암세포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주가 지나서 울산 사는 큰언니가 아버지를 울산 00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그가 울산으로 아버지 면회를 갔다.

“귀옥아, 나 멀쩡하고 안 아프니까 그만 집에 가자”

“아버지,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 다 나으면 그 때 집에 가자”

집에 가자며 떼를 쓰는 아버지를 겨우 달래 놓고 부산으로 내려 왔는데 사흘 만에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병원에 가보니까 아버지는 산소 호흡기를 쓰고 있었다. 언니들과 작은 오빠한테 연락을 하고(큰오빠는 연락이 안 되었음) 큰언니를 기다렸다. 큰언니는 슈퍼를 하고 있어서 슈퍼 영업을 마치고 밤늦게 왔다.

“큰언니가 나도 왔으니 니는 내려가라고 해서 집에 왔더니 몇 시간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참으로 어이없는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을 팔아서 빚을 정리하고 그는 혼자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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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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