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이 노래는 1986년 이선희가 불렀던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의 ‘알고 싶어요’라는 노랫말이다. ‘알고 싶어요’는 이선희의 대표곡이라 할 만큼 히트를 친 곡이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하면 황진이와 박연폭포 그리고 서경덕을 꼽는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의 기생이고, 서경덕은 학자이다. 서경덕은 황진이가 사모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다. 그런데 황진이와 정을 나눈 소세양이 있다.

김귀옥 씨. ⓒ이복남

황진이는 절세미인이자 명창이고 시인이었다. 소세양은 정2품의 대제학인데 대장부가 여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장부가 아니라고 큰소리 쳤다. 그런 소세양을 유혹한 황진이의 시가 야사하(夜思何)란다.

‘야사하(夜思何)

소요월야사하사(蕭寥月夜思何事) 소슬한 달밤 무슨 생각하오신지

침소전전몽사양(寢宵轉輾夢似樣) 뒤척이는 잠자리는 꿈인 듯 생시인 듯

문군유시녹망언(問君有時錄忘言) 님이시여 때로는 제가 드린 말도 적어보시는지

차세연분과신량(此世緣分果信良) 이승에서 맺은 연분 믿어도 좋을는지요

유유억군의미진(悠悠憶君疑未盡) 멀리계신 님 생각, 끝없어도 모자란 듯

일일염아기허량(日日念我幾許量) 하루하루 저를 그리워하시나요

망중요고번혹희(忙中要顧煩或喜) 바쁜 중에도 돌이켜 생각함이란 괴로움일까, 즐거움일까

훤훤여작정여상(喧喧如雀情如常) 참새처럼 지저귀어도 제게 향하신 정은 여전하신지요

유유억군의미진(悠悠憶君疑未盡) 그대를 생각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인터넷에서 발췌>

이 노래는 많은 사람들이 황진이의 시를 번역해서 이선희가 불렀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반대다. 이선희의 노래를 황진이 시로 탈바꿈한 것이란다.

1995년 이재운 작가는 주간조선에 ‘청사홍사’라는 연재소설을 쓰고 있었다. 황진이 편에서 황진이와 소세양의 사랑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엮으면서 마땅한 한시를 구하다가 양인자 작사가의 양해를 얻어 ‘알고 싶어요’를 한역한 것이란다.

이재운의 청사홍사. ⓒ네이버 책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는데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는 이제부터 필자가 이야기 하려는 김귀옥 씨가 젊은 시절 좋아해서 즐겨 부르던 노래라는 것이다.

황진이와 소세양처럼 불타는 열정의 연애는 못해봤지만 그도 남몰래 짝사랑은 했었단다. 그리고 짝사랑에 대한 화답보다는 자신의 신세가 서글퍼서 혼자 눈물지으며 ‘알고 싶어요’를 자주 불렀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하고 그리고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런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풀리지도 않고 답도 없는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대면서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너무나 서글픈 자기 신세 같아서 한없이 빠져드는 ‘알고 싶어요’가 아니라 이제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가 있어 ‘파도여 슬퍼 말아라’는 ‘무인도’를 부른단다.

김귀옥(1972년생) 씨는 부산 금정구 선동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의 선동은 부산의 오지다. 선동은 오륜대와 가까워 신선이 노닐었다고 해서 선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2남 5녀의 막내로 언니가 넷이고 오빠가 둘이다. 어머니는 낳고 싶지 않은 아이를 가졌기에 애를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당시만 해도 이렇다 할 낙태 방법이 없었기에 좋다는 민간약을 다 써보고 그래도 안 되어서 어머니는 높은 곳에서 몇 번이나 뛰어 내렸다고 했단다.

어머니는 어떤 민간약을 썼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네 눈이 이렇다!' 하시며 평생을 죄인처럼 사셨어요.”

예전에는 의술이 발달되지 않았고 수술이 불가능했기에 아이를 임신하면 생기는 대로 다 낳았다. 원치 않는 아이를 가졌을 때 낙태약이라고 해 봤자 팥꽃나무, 우슬, 홍화씨 등 주로 어혈제거나 자궁수축작용이 밝혀진 약초 등을 사용했다.

인흥마을에서. ⓒ이복남

봄이면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데 대부분의 꽃이 붉은색이나 노란색인데 팥꽃나무는 보라색이라 사람들이 즐겨 심었다고 한다. 팥꽃나무는 주로 해안가에서 자랐는데 꽃이 필 무렵이면 조기들이 회유한다하여 조기꽃나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임진왜란이후 여자들이 원치 않은 왜인의 씨를 가져 무분별하게 팥꽃나무를 복용하여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아 나라에서는 지방 관리를 통해 팥꽃나무를 다 베어 버리는 바람에 요즘은 팥꽃나무가 흔치 않단다.

아무튼 어머니는 그를 낙태시키려고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봤으나 낙태에 실패하고 그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열 달 동안 노심초사하다가 아이를 낳았는데 팔 다리는 멀쩡했으나 눈이 이상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통곡했다.

“눈이 사팔뜨기라 엄마는 여러 군데 안과를 다녀봤다고 하던데 이유도 잘 모르고 치료도 어렵다고 하더랍니다.”

오른쪽 눈은 안 보이고 왼쪽 눈은 내사시다.

“사팔뜨기라는 트라우마는 평생을 따라다녔습니다.”

동네 또래 친구들하고 어울리기는 했으나 그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친구들도 사팔뜨기하고 같이 어울리기 싫어했던 모양이다.

“철마 쪽에서 살다가 이사를 왔다고 하던데 부모님은 선동에서 연탄장사를 했습니다.”

연탄 트럭이 와서 2~300장을 풀어놓고 가면 부모님은 집집마다 리어카로 연탄을 배달했다.

“그래서 제 별명은 사파리(사팔뜨기)에서 연탄집 딸래미가 하나 더 붙었습니다.”

그는 눈도 나쁜데다 몸도 병약해서 늘 골골했다. 청룡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마을버스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하루에 두 번을 다녔다.

“아침에는 버스를 타고 갔는데 오후에는 시간을 잘 못 맞춰서 친구들하고 걸어 다녔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는 날 보다 안가는 날이 더 많았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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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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