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해외건설은 1965년 현대건설주식회사가 태국의 도로공사를 수주함으로써 우리나라 해외건설의 막이 올랐다. 그 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도로공사를 수주하여 중동진출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 월남전이 끝나자 우리나라 업체들은 그 나라에 송출되었던 인력과 장비를 활용하기 위해 월남 이외의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석유파동, 특히 제1차 파동으로 불경기가 심화됨으로써 국내 실업이 늘어났으므로 고용의 증대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였다. 그러자 우리나라 해외건설 업체들이 세계로 진출하였고, 특히 중동진출이 크게 활기를 띠어 해외건설 수주액이 절정에 달함으로써 양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해외건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부가 「해외건설촉진법」의 제정과 해외건설협의회설립 등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함과 동시에 지급보증과 현지금융 및 조세감면 등 금융·세제면에서 적극 지원함으로써 해외건설이 급성장하여 1970년대 중동 건설 경기가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이복남

그 당시는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젊은이들에게는 흥분이었다. 마침 우리나라가 막 피어나려고 하던 때였고. 젊은 피가 끓는 우리로서는 열심히 해보고자 하던 때였다.

국내보다 월급도 2~3배 준다는 것도 구미가 당겼고 젊은이들은 현장 경험을 쌓으면 승진이 빠를 것이라는 야심도 작용했었다. 더구나 높은 교육열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실제 해외 건설현장에서 공사기일을 준수하고, 때로는 앞당겨 마무리하는 ‘빨리빨리’문화가 후한 점수를 받았는지 중동건설은 호황을 누렸다.

이 같은 이야기는 일반적인 ‘중동 건설 경기의 붐’에 관한 것이다. 송상춘 씨의 아버지는 당시 원목선의 선원이었기에 외국이 부러울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왜 무엇 때문에 중동의 건설 경기에 혹 하였을까. “선원보다는 중동의 건설현장이 월급이 더 많았겠지요.” 아무튼 아버지는 선원생활을 청산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현장으로 갔다.

“저는 어려서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층빌딩 공사에서 제관공으로 일을 하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15층에서 추락했다고 했다. 사람들은 안 죽고 산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바닥이 모래여서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왼쪽 다리가 골절되고 갈비뼈 3개가 부러졌다고 했다.

“아버지 사고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바로 **산업 서울 본사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현지에서 응급수술을 하고 귀국해서 서울 **병원에 입원했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보상을 한 푼도 못 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공사를 하다가 다치셨으면 보상을 받았을 텐데 한 푼도 못 받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아버지는 병원에서 3년 쯤 입원해 있었는데 병원비는 누군가가 부담 해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보상을 좀 더 많이 받으려고 소송을 했는데 패소했습니다.” 아버지가 중동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다치셨는데 패소라니, 이해가 잘 안 되었지만 이미 어머니도 안계시고 송상춘 씨도 더 이상은 잘 알지 못했다.

“4학년 때 이사를 갔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사를 했을까? 누군가가 집터가 좋지 않아서 우환이 많다고 했다.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도 않았지만, 중동까지 가서 다쳐 오다니……. “엄마는 화병으로 구심을 달고 살았습니다.” 구심(求心)은 우황 청심환과 비슷한 효능인데 아이들이 경기 할 때나 심장병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필자 주-

어머니는 누군가의 조언으로 부산을 멀리 떠나 북으로 이사를 했다. “안양국민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 5학년이 되기 전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너무 추워서 엄마는 뼈가 시리다고 했습니다.”

어느 야유회에서. ⓒ이복남

부산에서는 동래구 명장동에 살았다. 아버지도 집에 있었는데 다리도 약간씩 나아져서 목발을 짚고 다녔다. 아버지가 백수가 되니 어머니가 보험회사에 나갔다.

백수는 아버지뿐 아니었다. 부산으로 내려와서는 그도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웬일인지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그를 학교에 보내지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보험회사에 나가고 누나와 동생도 학교에 가고 그는 아버지와 같이 집에서 빈둥거렸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몸이 조금씩 좋아져서 목발을 버리고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사업 한다고 일본을 오가기도 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는 뭘 했을까. “일본에서 노가다도 했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생활비를 벌어 주셨을까. “아니요, 생활비는 엄마가 벌었고 아버지는 며칠 만에 한 번씩 술이 취해서 집에 오면 엄마와 저를 때렸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오면 그와 엄마와 동생은 아버지를 피해 숨었다고 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습니다.” 누나는 어디로 갔을까. “누나는 고학으로 전문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집에 잘 안 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몇 년이 훌쩍 흘렀다. “(명장동) 부녀회장이 엄마한테 뭐라고 한 모양입니다.” 아마도 부녀회장은 아이(송상춘)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는 부녀회장의 주선으로 대연동에 있는 부산구화학교 4학년에 편입을 했다. 부산구화학교는 1966년에 설립된 청각장애와 발달장애를 위한 특수교육기관으로 현재는 영아학급,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다.

부산구화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제가 학교에 늦게 들어갔는데 엄마는 중학교 졸업이라도 해야 된다면서 아버지로부터 저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요즘말로 하면 가정폭력의 가해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아이들은 아버지의 그런 폭력을 고스란히 받으며 눈물로 견디고 있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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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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