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선에서는 무엇을 수출했을까.

“당시 선어가 유행이었습니다.”

참치 도미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배였다.

“하루는 자갈치에서 일본으로 가는 선어를 싣고 있었는데 암모니아 가스가 폭발했습니다.”

암모니아 가스를 뒤집어쓰고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특히 눈을 많이 다쳤다. 그는 정신을 잃었고 가까운 메리놀병원으로 옮겨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오른쪽 눈은 완전히 망가져서 앞이 보이지 않았고 왼쪽 눈은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메리놀병원에는 20일쯤 있다가 서면에 있는 개인안과로 옮겨서 6개월을 있었다.

“치료비는 회사에서 부담해 주었으나 보상은 따로 없었습니다.”

그가 보상이라고 받은 것은 입원해 있는 동안의 밀린 월급을 받았을 뿐이었다. 눈을 다친 그가 퇴원 후에 시작한 것은 숙박업이었다. 숙박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입원해 있을 때 병실에 같이 있던 사람들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서른 남짓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눈이 안 보이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배는 더 이상 탈 수가 없을 것이고 정말 무엇을 해야 되나 생각하니 너무나 막막했다.

친구들과 여행. ⓒ이복남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맹학교나 안마수련원을 나와서 안마원이나 침술원을 할 수도 있지만 그는 맹학교나 안마수련원을 나오지도 못했다. 그가 입원해 있을 때 병실에 같이 있던 사람이 지인이 여인숙을 하는데 제법 돈을 잘 번다고 했다.

“여인숙이라면 앞이 안보여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때가 1984년이었는데 몇 달 봉급으로 받은 돈에다 지인들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범천동에 여인숙을 하나 얻었다. 전세 2천만 원에 월세가 7십만 원인데 방이 12개였다. 숙박업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불륜의 장소가 아닌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런 개념은 별로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숙박업은 제법 잘 되었다. 그동안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림만 하던 아내가 여인숙에서 카운터를 보았다. 하룻밤 숙박비가 3천 5백 원 정도였는데 1년 만에 돈을 좀 벌어서 서면에 있는 좀 더 큰 여인숙으로 옮겼다. 모자라는 돈은 이모가 빌려주었는데 옮긴 여인숙은 방이 24개였다.

아내와 불국사에서. ⓒ이복남

서면에서도 2~3년 동안은 제법 장사가 잘 되었다. 그러자 집주인이 집세를 턱없이 올려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1년 또는 2년에 한 번씩 집을 옮겼는데 어떤 때는 6개월 만에 옮기기도 했다.

“그동안 옮긴 집이 20개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문현동에 땅을 사서 여관을 지었다. 아내는 막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정착하고 싶어 했다. 문현동에 여관을 지으면서 근처에 허름한 방 2개짜리를 구해서 살림살이를 재어놓고 고등학교 다니는 딸과 중학교 다니는 아들 그리고 부부가 함께 지냈다. 평당 150만원에 사서 지은 여관은 방이 24개였다.

“말하자면 집장사인데 여관을 지어서 팔면 두 배 정도는 남았습니다.”

IMF 이후 부동산 가격이 급락했고 매물이 많이 나왔기에 집 장사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일요일이면 아내와 같이 등산을 했다. 아내의 지인이 총무로 있는 A등산클럽인데 일요일 아침이면 부산 시민회관 앞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산으로 갔다.

“지리산을 갈 때면 관광버스로 중산리까지 가서 천왕봉으로 올라갔습니다.”

천왕봉을 돌아서 내려 올 때면 먼저 도착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중에 도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대체로 아내와 먼저 도착해서 근처가게에서 도토리묵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후발주자들을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어울리던 선발주자 가운데 B 씨가 있었다. B 씨가 자신을 소개하기를 4년제 대학을 나와 기술보증기금 지점장을 명예 퇴직한 금융전문가라고 했다.

어디쯤일까. ⓒ이복남

여관을 하면서도 그는 안과를 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오른쪽 눈을 다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칼라렌즈를 끼고 다녔는데 그런대로 견딜만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른쪽 눈이 점점 아파졌다. 부산의 안과 몇 군데를 다니다가 아내와 같이 서울로 갔다.

“서울성모병원에서 안구를 적출하고 의안을 했습니다.”

오른쪽 눈은 의안을 했지만 이번에는 왼쪽 눈이 자주 아팠다. 왼쪽 눈에 백내장이 와서 백내장 수술도 했다. 그러면서 시각장애 3급을 받았지만 그는 아닌 척 했다.

“자존심이지요. 제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무시할 까봐 차마 시각장애인이라고 못 밝혔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것 같았지만 그가 티를 안 내므로 다른 사람들도 그 앞에서는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러면서도 B 씨하고는 형제처럼 잘 지냈다.

“한 번은 B 씨가 내가 없는 자리에서 애꾸눈 봉사라고 했다던데, 우리 사회의 통념이니까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도 B 씨가 아빠를 많이 도와주고 아주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아버지처럼 대하라고 했다. 동네 장사만 하던 그에게 B 씨는 좋은 학벌에 기보지점장까지 지낸 엘리트였기에 신세계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 가족을 위한답시고 돈벌이에만 매달려왔던 무식쟁이에게 B 씨는 구세주 같았습니다.”

B 씨가 자신은 은행권 출신이라 금융 업무에 밝으니 자신만 믿으라면서 경락(競落)을 해 보자고 했다. 그는 집과 땅을 사고 팔 줄은 알았지만 경매물건을 매수하는 법은 잘 몰랐기에 B 씨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돈을 대고 B 씨가 경락을 받아서 이익금은 8대 2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당시 부동산 가격이 급락해서 경매물권이 많이 나왔다. B 씨의 조언으로 여관 하나를 골라서 경락을 받았다. 여관은 수리해서 바로 팔았고 B 씨에게는 약속대로 지분의 2를 배당했다.

즐거운 한 때. ⓒ이복남

다음에는 남천동에 있는 관광호텔 하나를 경락 받았다.

“수리를 해서 호텔이 팔릴 때까지는 그곳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호텔이 팔리지가 않았다. B 씨는 이러다가 굶어 죽겠다며, 이익금 말고 그냥 월급을 달라고 했다. 당시 호텔에는 직원이 4명 있었는데 월급이 120만원이었다. B 씨는 정식직원으로 등록도 하지 않은 채 월급 150만원을 주고 방을 하나 따로 주었다. 정식직원으로 등록을 하지 못한 것은 이미 다른 업체에 기술자격증을 빌려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B 씨는 월급 150만원을 받는 직원이었지만 그를 대신해서 모든 서류업무와 대외적 업무를 전결처리하다시피 한 사장대행이었다.

“그 때만 해도 B 씨가 다 알아서 처리했기에 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해운대 서울온천이 매물로 나왔다. 서울온천을 둘러보니 건물은 오래되고 낡은 것 같았는데 모텔과 대중온천을 같이 하고 있었다.

“앞은 잘 보이지 않지만 장사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2011년 서울온천을 인수해서 새로 지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B 씨는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호텔을 짓자고 했다. 그는 B 씨와 함께 마산에 있는 C은행지점장을 만나러 갔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에서 관광개발을 하라고 관광진흥개발기금(이하 관광기금) 100억이 나왔는데 마산에서는 그 기금을 소진할 데가 없다며 저더러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도 귀가 솔깃했다. 남천동 호텔 리모델링할 때 B 씨가 법인을 설립해주었는데 해운대에 호텔을 지으려면 법인이 하나 더 있어야 된다면서 주식회사도 하나 더 만들어 주었다. B 씨가 서류작업을 해서 건축허가도 냈다.

그는 B 씨 덕분에 관광기금 100억을 받을 수 있다면 살고 있는 아파트나 호텔을 팔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어서 B 씨에게 고마워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