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시는 ‘만약 내가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헬렌 켈러의 시다. 헬렌 켈러는 앞을 보지 못하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못하는 3중고를 겪고 있었다.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 언어의 3중장애를 이겨내고 대학을 졸업한 후 작가, 여성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녀가 3중장애를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시의 첫날에 나오는 앤 설리번 선생 덕분이었다. 그러나 헬렌 켈러에게 3일 간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관찬 씨. ⓒ이복남

헬렌 켈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앤 설리번 선생의 노력 등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교육가 또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할 때는 연설가로 대중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헬렌 켈러가 어릴 때는 말도 하지 못했으나 농아학교에서 발성법을 배우고 앤 설리번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의사전달이 가능할 정도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헬렌 켈러는 1880년생인데 두 살 때 뇌척수막염으로 추정되는 열병에 걸려 시각과 청각을 잃고 말도 못하게 되었다. 두 살 이라면 말을 배우기 전이라 말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관찬 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앞도 볼 수가 없는 시·청각중복장애인이 되었지만 말을 배운 후였기에 말은 할 수 있다.

박관찬(1987년생) 씨는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났다. 그는 1남 1녀의 장남인데 공무원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그리고 가까이에 거주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만큼 그도 4살 아래 여동생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까지는 장애는 물론이고 장애인을 잘 몰랐다. 그와 여동생은 부모와 조부모에게 사랑받고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보통의 아이들처럼 무럭무럭 잘 자랐다.

대구대 법학과 재학. ⓒ이복남

몇 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감포 이모집에 놀러 갔을 때 이모부가 사촌형을 ‘개똥아!’라고 부르던 우렁찬 목소리가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에 남아있다고 했다. 그리고 5살 때 미술학원을 다녔는데, 학원에 도착하면 늘 “관찬아, 선생님한테 와서 뽀뽀해야지!” 했던 선생님 말씀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단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로 “관찬아!”하고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 등……. ​물론 20년 전의 기억이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원지지 않는, 남아 있는 몇 가지 소리에 대한 기억이란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들어갈 즈음부터 시력과 청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병원에서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고, 신경에 이상이 있다는 특성으로 인해 수술을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엄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똑똑하고 활달하던 아이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다니,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도 아들을 위해서라면, 눈과 귀에 좋다는 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침을 맞고, 뜸도 뜨고, 탕약을 달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손자를 위해서 애를 쓰셨고 굿도 하고 조약을 쓰시고 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조금만 나이가 들면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아이 자신일 텐데 엄마가 울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엄마는 아이 앞에서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피자만들기 체험. ⓒ이복남

당시 그는 어렸기에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해도, 의사선생이 해주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님이나 의사선생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야 했다. 따라서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현재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 그는 잘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 TV에서 방영한 중국 드라마 ‘판관 포청천’을 정말 좋아했다. “그 때만 해도 약간 은 들려서 OST도 따라 부르곤 했거든요.” 어떠한 어려운 사건이 있어도 슬기롭게 해결해내는 포청천을 보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드라마를 보고 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땐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판사와 검사, 변호사의 정확한 개념과 역할을 알지 못했다. 그냥 법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판관 포청천’은 1993년의 대만판인데 KBS 2TV에서 1994년 10월부터 1996년까지 방영했다. 포청천의 이름은 포증(包拯)이고 송나라 인종 때의 사람인데 관료생활을 하는 동안 공평 정대한 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백성들의 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다.

판관이 되자 부패한 정치가들도 엄정하게 처벌하였으며, 강직하고 올곧은 사람이라 높은 벼슬에 오른 뒤에도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판관 포청천’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부패한 현실정치에 식상한 사람들이 사이다 같은 포청천의 일벌백계에 박수를 보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판관 포청천. ⓒ유튜브

그밖에도 어린 시절의 아이들이 보고 듣는 것 마다 꿈을 꾸고 동경하던 시절이라 당시 방영하던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카레이서였고, 즐겨보던 만화에서도 카레이싱을 다루고 있어 카레이서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판관 포청천’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법대를 나왔으니 어린 시절 꿈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 법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나머지 절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러 다녔다. 대구에 있는 병원으로 갈 때는 엄마와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아직 어린 나이라 병원에 있는 식당에서 김밥이나 우동 등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병원에서 받는 검사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청력검사를 할 때는 작은 방에 혼자 들어가서 이어폰 비슷한 걸 착용하고 삐 삐 뚜 등의 소리가 날 때마다 손에 쥐어진 기계의 단추를 누르는 검사를 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지만, 그 기계에서 나는 소리는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리가 큰지 작은지, 오른쪽 또는 왼쪽 어디에서 나는지 소리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소리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대학원 석사 수여식에서. ⓒ이복남

고등학생이 되면서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녔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서울은 아빠랑 갈 때가 많았기에, 검사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 꼭두새벽에 포항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받는 검사도 하루에만 몇 가지나 되어서 정말 힘들고 지루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한창 사춘기였기에 포항에서 서울까지 가는 것도 지루하고, 병원에서 기다리는 것도 지루했다. 특히 검사를 받을 때마다 학교를 결석하는 것도 짜증나서 공연히 아빠에게 투정을 부리는 등 예민했던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말없이 아들의 짜증을 다 받아 주었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면 제일 먼저 달려가던 아이, 아버지가 밖에서 집으로 전화를 할 때도 전화벨이 울리기가 무섭게 수화기를 들고 조잘대던 아이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빠의 마음도 무너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차마 아이 앞에서 내색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포항과 대구, 서울에서 치료를 받고 검사를 하면서도 그의 시력과 청력의 상태가 회복되지는 않았다. 피검사 청력검사 시력검사 등 여러 가지 다양한 검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의사선생님과 부모님의 대화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검사 결과가 어떤지 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서 빨리 검사를 끝내고 포항으로(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검사를 받고 병원을 나설 때가 정말 기뻤다.

“장애에 대해 이해를 하고 성인이 된 지금은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부모님과 의사선생님이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그냥 무시하지 않고 통역해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한강에서. ⓒ이복남

초등학생 때는 장애가 있어도 워낙 밝고 활발한 성격 덕분에 또래들과도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그 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아픈 추억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학급 남부반장을 했었는데, 반장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3학년에 올라간 뒤 새로 같은 반이 된 친구들에게 반장으로 뽑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3학년 1학기 반장선거를 하는 날은 그의 10번째 생일이었는데 그가 반장으로 당선되었다.

“반장투표가 끝난 후에 학교 안에 있는 공중전화로 달려가 집에 전화를 걸어 반장이 되었다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수화기 너머의 엄마가 뭐라고 하는지는 못 알아들었기에 반장이 되었다는 그의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요즘처럼 문자를 쓸 수 있는 휴대폰도 없던 터라 그나마 그가 부모님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날 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생일파티를 했다. 친구들과 집에 가니 동네 아주머니들도 와 있었고, 생일상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거실 벽에는 풍선이 몇 개 달려있었는데 풍선마다 ‘오빠야 생일 축하해’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생일 파티였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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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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