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이 시는 박목월 시인의 ‘가정(家庭)’이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는 큰 어른이자 기둥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군함처럼 커다란 십구문 반의 신발을 신는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가는 고달픈 생활인이다. 자식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의식으로 힘들지만, 그래도 가족 앞에서는 웃음을 보이고 싶은 것이 아버지다.

이철우 씨. ⓒ이복남

이철우 씨, 그에게도 가정이 있었지만 그 때는 누구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동생이고 오빠였다. 그 때는 가정이나 가족의 개념이 제대로 없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자 그의 어깨는 무겁고 막중했다. 그 무게를 사랑하는 딸과 아내가 있는 가정이라는 이름으로 버티다가 마침내 그 무게에 짓눌렸다고나 할까.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서도 신발 사이즈에는 문(文)이라는 치수를 사용했다. 1문은 당시 사용하던 동전의 지름이라고 하는데 24mm정도였다. 남자 신발의 기준을 십문칠(10.7)이라고 했는데, 안성맞춤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선가는 십구문반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mm로 계산하면 십문칠은 256.8mm이다. 그런데 십구문반이라면 465.5mm가 되므로 사람의 신발 치수라 하기는 어렵다.

인터넷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십구문반의 신발치수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발관련 업체 여기저기 전화를 해 보았으나 모두가 잘 알지를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잘 알 수 없었다고 써 놓고는, 며칠이 지나서 다시 한 번 찾아보았더니, 있었다. 그러나 1문이 24mm는 아닌 것 같았다.

1963년 척관법(尺貫法)에서 미터(Meter)법으로 개정되었는데, 어떤 기사에 의하면 17문은 240mm라고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19.5는 275mm가 되므로 말이 되는 것 같다. -‘옛날 신문을 읽었다’ 이승우 지음 에서 발췌-

낙동강 하구와 을숙도. ⓒ네이버 지식백과

이철우(1966년생) 씨의 고향은 부산 하단인데 아버지는 경북 청도에서 할머니와 같이 왔다고 했다. 그는 4남매의 셋째이고 위로 형이 둘 있고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다. 부모님은 낙동강 하구에서 배를 탔다. 그도 어릴 때부터 낙동강 강변에서 놀았기에 헤엄은 잘 쳤다고 했다.

당시 낙동강 하구에서 봄이면 숭어와 도다리를 잡았고 가을에는 전어와 꼬시래기(망둥어)를 잡았다. 겨울이면 복어와 아구(아귀) 그리고 까치고기도 잡았고 대부분은 재첩을 잡았다.

“집은 가난해서 먹고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히지도 않았지만 그 시절에는 고기 값이 너무 싸서 돈이 안 되었던 것이다. 잡은 생선이나 재첩은 중간 상인들이 뱃머리로 받으러 왔다.

8살이 되어 낙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낙동국민학교는 당리에 있다. 하단에서 당리까지 십리 길은 족히 되었는데 책가방을 메고 타달타달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물론 위로 형이 둘이나 있었고 동네 친구들도 있었다. 가방을 메고 학교는 다녔으나 공부에는 애당초 흥미가 없었다.

어렸을 때는 학교에 갔다 오면 가방을 던져 놓고 낙동강 갯가에서 놀았다. 조개도 줍고 게나 고동도 잡고 가을이면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갈대밭 사이에서 놀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가끔 부모님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만 해도 친구들과 어울려 에덴공원을 헤집고 다니거나 게임방을 들락거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다. 그가 중학생이 될 무렵 살고 있는 집마저 주인이 비워 달라고 했다. 하늘아래 내 몸 하나 편히 쉴 공간마저 없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의 한 지인이 ‘그러지 말고(배를 타지 말고) 을숙도에서 횟집을 해 보라’고 했다.

유채꽃 필 무렵. ⓒ이복남

을숙도에는 횟집이 네 군데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집이 이사를 간 모양이다. 그의 가족들은 을숙도로 이사를 했고 부모님은 횟집을 운영했다. 을숙도는 섬이라 교통수단은 배 밖에 없었다. 을숙도에서 학교를 가거나 시장을 가는 것도 배를 타고 나가야 했다. 물론 회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도 배를 타고 왔으나 태풍이 오면 배는 뜨지 못했다. 그럼에도 횟집 장사는 배를 타는 것 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네 집에 학생들이 서너 명 있었는데 아침이면 배를 타고 나가서 학교를 가고 저녁이면 또 배를 타고 돌아 와야 했는데 그 무렵 뱃머리는 똥다리 옆에 있었습니다.”

이철우 씨를 인터뷰 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똥다리’란 소리를 들었다. 당시만 해도 화장실은 대부분이 재래식 변소로 푸세식이었다. 인부들이 푸세식 변소에서 분뇨를 퍼서 들통으로 져다가 분뇨차에 실었고, 그 분뇨들은 하단에서 시작해 바다로 길게 이어지는 통로에 버려졌다. 아이들은 그 위에서 뛰어놀기도 했고 사람들은 그 통로를 ‘똥다리’라고 불렀다. 똥다리 출구가 있는 낙동강 하구에는 꾸리꾸리하고 쿰쿰한 똥냄새가 갈대 밭 사이로 진동을 했다. 요즘사람들은 질색을 하겠지만, 그 무렵 사람들은 그 냄새도 그냥 갈대 냄새려니 하면서 받아 넘겼다.

에덴공원 유치환 시비. ⓒ이복남

고려 말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피다가 이곳에 이르러 산을 보니 마치 학이 웅비하는 것 같다 해서 승학산(乘鶴山)이라 했고,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온 곳이라 하여 강선대(降仙臺)라 불렀다.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와 함께 부산의 팔선대(八仙臺) 중 하나로 예부터 명승지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부산중앙교회 백준호 장로가 겨울철 사냥을 위해 몇 차례 이곳에 왔다가 그 경관에 반하여 그 일대 99,000㎡(3만 평)을 구화 3백만 원에 매입하여 1953년 어머니의 묘를 썼고, 백준호 장로는 에덴동산을 꿈꾸었는지 이름을 에덴공원이라 했다고 한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 발췌-

강선대란 경관이 빼어나 신선이 내려온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산에는 에덴공원 강선대 말고도 덕포동에 두 곳이 더 있다. 덕포동이 조선시대에는 덕포나루였는데 강선대에는 마을제당이 있었다. 상리 마을에는 상강선대(할배당산), 하리 마을에는 하강선대(할매당산)라고 불렀다. 상강선대는 지금도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에덴공원 오태균 음악비. ⓒ이복남

강선대라 불리던 에덴공원 정상에는 유치환의 시비 ‘깃발’이 멀리 낙동강을 바라보며 손짓하고 있었고, 에덴공원 둘레에는 전원, 강나루, 강촌 같은 음악 술집들이 있었다. 이철우 씨는 잘 모르겠지만, 필자도 젊은 시절에는 지인들과 어울려 유치환의 깃발아래서 을숙도 갈대밭을 바라보며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흔들다가 강촌이나 전원 등에서 조롱박에 따라주던 동동주를 마시곤 했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사이로 황금빛 노을이 지면, 카페창가에 앉아서 흔들리는 갈대를 바라보며 구르몽의 ‘낙엽’을 읊었고, 조안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나 돈 맥클린의 ‘빈센트’를 듣기도 했다. 그 때 감미로운 목소리로 천재 화가 반 고흐를 이야기하던 DJ 아저씨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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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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