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아버지 재산을 몽땅 팔아서 야반도주를 했답니다.”

그는 그날 이후로 어머니를 본 적도 없고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단다.

“아버지가 잘 살았기에 이모들도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하던데 그 후 외갓집과는 왕래도 없었습니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아이만 홀로 남았다. 그래서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화양면 이목리 할아버지 집으로 갔습니다.”

청년회 단합대회. ⓒ이복남

할아버지는 바닷가에서 배를 만들었고, 그는 할아버지 곁에서 하루 종일 놀았다. 양손과 양발에 검정고무신을 고무줄로 감고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 살았기에 헤엄을 잘 쳤습니다.”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아무렇게나 하는 개구리헤엄이었기에 나중에 정식으로 수영을 배워 보려고 해도 잘 안되더란다.

“바닷가에서 하루 종일 살았습니다.”

낙지나 고동 같은 것을 잡아먹고 점심을 때우며 해가 다 져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는 마을 또래들하고 놀았는데 아이들은 그를 놀릴 엄두도 못했다. 그는 기어 다녀도 사실상은 골목대장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병신이나 절뚝발이라고 쑤군대는 것 같았지만 걸리기만 하면 가만 안 두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멋모르고 면전에서 절뚝발이라고 그를 놀렸다. 그 애를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그 애는 초죽음이 되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그 애 부모를 찾아가서 사과하고 돈을 물어 주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저를 보면 가만 안 둔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눈에 안 띄게 그를 친구 집에 숨겨 주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성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일주일 후에야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집으로 들어갔다.

창녕 연꽃마을. ⓒ이복남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어울려 놀던 동무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라진다기보다 그와 어울려 놀 아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또래 동무들은 적령기가 되어 하나 둘 학교로 가고 동네에는 그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혼자 놀기도 했는데 손에서 검정고무신은 벗었다. 나이가 들자 할아버지가 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박 씨 문중의 장남이라 명절 때면 일가친척이 다 모였는데 광주 사는 셋째 큰아버지는 안 오셨다.

“한 집안에 절뚝발이가 둘이나 있다는 것이 동네 창피했겠지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해 설날 친척들이 모였다. “그래도 학교는 보내야 된다.”며 걱정을 했지만 누가 어떻게 학교를 보낼 것이냐.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여수 사는 둘째큰아버지가 그를 학교에 보내겠다고 했다.

“큰 엄마는 저를 데리러 오시면서 목발을 사오셨어요.”

그는 처음으로 목발을 짚고 여수 큰아버지 집으로 갔다. 형이 둘 있었는데 형들도 그를 구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12살 때 여수봉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 공부는 별로 재미가 없었고 학교에서도 그는 싸움꾼이었다. 누구든지 그를 놀리는 애가 있으면 목발로 두들겨 팼다.

지금은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리스 그리고 티타늄 같은 목발도 있지만 그 시절은 그야말로 나무 목발이었다. 목발로 애들을 두들겨 패면 목발이 부러졌다.

“큰아버지는 배를 탄다고 해서 집에 잘 없었고, 그 때마다 큰엄마가 목발을 새로 사 주셨습니다.”

2학년 때 또 한 번 목발이 부러졌는데 이번에는 큰 엄마가 안 사주셨다.

“부러진 목발을 줄로 칭칭 동여매고 다녔습니다.”

물론 큰엄마에게 미안해서 새로 사달라는 말도 못하고 며칠인가 그렇게 다녔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목발을 100개나 사 오셔서 문 앞에 두고 니하고 싶은 데로 하라고 하시데요.”

청와대 견학. ⓒ이복남

지금도 잊지 못하는 박병덕 선생님을 그 후로는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며 선생님에게 미안하고 그리고 고맙다고 했다. 그 후에도 목발은 여러 개를 부러뜨렸으나 결국 그 목발 100개는 다 사용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났다.

“공부에는 재능이 없고 학교에서는 싸움만 하니까 큰엄마도 차라리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하시데요.”

그는 초등학교 졸업도 못 한 체 남원으로 갔다. 남원에는 장애인들에게 조각을 가르치는 공방이 있었던 것이다.

“상다리에 조각하는 공방에서 숙식을 했습니다.”

재료는 소나무 엄나무 대추나무 은행나무 오동나무 등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다 들어 왔는데 처음에는 수습기간이라 나무를 다듬고 사포질을 하는 등 잡일을 했다. 숙식은 공방에서 했는데 전체 직원은 7~8명 쯤 되었는데 절반이 장애인이었다. 다리는 불편했지만 양손은 성해야 조각이 가능했다.

“그 때만 해도 장애인복지라는 것은 모를 때라 재래식 화장실 등 불편함이 많았지만 참아야 했습니다.”

그도 기술을 배운다는 일념으로 선배들에게 야단을 받으며 기술을 배웠다. 6개월 쯤 지나자 그도 조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주로 상다리에 조각을 했다.

“나무에 밑그림 종이를 붙이고 조각칼로 깎았습니다.”

상다리에는 새 그림이나 꽃 그림을 조각했다. 그런데 점점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상다리에 조각이 새겨진 교자상이나 밥상이 아니라 내열성 합성수지로 만든 호마이카(Formica)상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판은 호마이카이고 상다리는 철제로 만들어졌다.

“요즘은 옛날 교자상이 더 비싼 것 같은데 그 때만 해도 호마이카상이 유행하면서 상다리 조각은 사양길이었습니다.”

장애인복지 실무교육. ⓒ이복남

상다리 공방에서 3~4년 쯤 근무했는데 점점 더 일자리가 줄어들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일이 없어서 밖에 나갔다 온 한 선배가 순천으로 간다고 했다.

“순천에 가면 장사할 곳이 있대”

귀가 솔깃한 얘기였다. 여기 공방 보다 돈도 더 잘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얘기를 들을수록 아닌 것 같았다.

“그거 앵벌이잖아요?”

“앵벌이면 어때서, 우리는 일만 하고 돈만 벌면 되지.”

그랬다. 우리 같은 장애인에게 앵벌이면 어떠냐? 자존심이 다 뭐냐! “한 번 해 보자 싶었습니다.” 선배를 따라 순천으로 가서 앵벌이 대장을 만났다.

“순천에 가니 조그만 여인숙에 5~6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남원 공방에 있을 때 본 장애인은 그래도 손은 성한 사람들이었는데 순천에서 처음 본 장애인들은 다리도 불편하고 손도 불편한 장애인들이었다. 아침이면 대장은 봉고차에 5~6명을 태우고 작은 구루마와 함께 시장근처에 내려 주었다. 구루마에는 수세미 좀약 빨래집게 때수건 등 온갖 잡화가 실려 있었다.

“하루 종일 구루마를 끌고 시장바닥을 누볐고 저녁이면 대장이 아침에 내려 주었던 곳으로 태우러 왔습니다.”

공방에 있을 때는 일을 잘 못한다고 선배들에게 얻어맞기도 했다. 앵벌이를 하면서도 장사 잘 못한다고 대장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처음 순천에서 만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광주 목포 등 전국을 돌아 다녔다.

“대장이 숙식을 제공해 주고 한 달에 월급 5만원을 받았습니다.”

5만원은 유흥비나 게임비로 다 다 썼다. 큰엄마에게 돈을 보내지는 않았을까? 돈은 안 보냈지만 가끔 큰엄마와 연락은 하고 지냈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며 3년 쯤 지냈을까?<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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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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