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이 시는 김현승 시인의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람이다.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어도 집에 돌아오면 인자하고 자상하고 가족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런 아버지 말이다.

박진영 씨. ⓒ이복남

어린아이에게 아버지는 나라다. 아버지는 자식의 모든 것이고, 자식은 아버지에게 있어 삶의 가장 소중한 존재이자 삶의 전부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집과 같은 존재이고, 집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곳에 주소를 두고,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이룬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가 없기에 집도 없고, 주소도 없고, 가정도 없고, 여기저기 떠돌다 이제 겨우 외로운 닻을 내렸다. 어쩌면 그에게도 그런 아버지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런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없으며 아버지의 술잔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마음속으로나마 ‘아버지’하고 불러 보았을 때 아버지의 눈물이 아니라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박진영(1974년생) 씨는 전라남도 여천군 화양면 이목리에서 태어났다. 이목리는 본래 ‘배낭기미’라 불리던 마을인데 이를 한자로 적다보니 ‘배나무+구미’가 이목구미(梨木九味)가 된 모양이다. 여천군은 여수시에서 여천군이 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여수시가 되었는데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여천군이었다. 아무튼 그의 고향은 여수지만 이목리는 읍에서 떨어진 어촌마을이었다.

여수 이목리. ⓒ네이버지도

할아버지는 이목리에서 배를 만들면서 9남매를 길렀다. 그의 아버지는 9남매 중에서 여섯째인데 월남에도 갔다 온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월남에서 돈을 벌어 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결혼을 하면서 여수에서 쥐포공장을 했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였지만 쥐포공장이 잘 나가던 시절이라 돈을 잘 벌어서 문방구도 했다. 그럴 즈음 그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쥐포 공장하랴 문방구도 하랴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에게는 둘도 없는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이를 보려고 일찍 집에 오곤 했다.

아이는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부러울 것 없는 집안의 장남이었다. 첫돌이 다가오자 아이는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제가 아장아장 걷는 것을 보고 함박웃음으로 흡족해 하셨답니다.”

나중에서야 그가 큰어머니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다. 어느 날밤 아이는 열이 펄펄 끓었다. 부모님은 자다가 놀라서 아이를 안고 근처 병원으로 가서 주사를 맞혔다. 며칠인가 지나자 아이의 열은 내렸고 다시 아프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는데…….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세워 놓으면 주저앉고 세워 놓으면 주저 않고 하더랍니다.”

얘가 왜 이러지, 부모님은 놀라서 아이를 안고 다시 병원으로 달렸다. 동네 병원에서는 잘 모르겠다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소아마비입니다” 부모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소아마비는 폴리오(polio) 바이러스에 의한 신경계의 감염으로 발생하며 회백수염(척수성

소아마비)의 형태로 발병한다. 폴리오바이러스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와, 인두나 소장의 림프조직에서 증식하다가 혈관을 매개로 하여 체내에 퍼져나가 척수전핵세포 등의 감염으로 대부분이 하지마비 증상이 나타나는데 간혹 상지마비가 오기도 한다.

‘폴리오바이러스’는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전후부터 발병하기 시작해서 1950년 6.25 무렵부터 소아마비는 전국을 강타하기 시작해서 1970년대까지 기승을 부린 것 같다.

의령 자굴산. ⓒ이복남

박진영 씨는 1974년생이다. 그 무렵이면 우리나라에는 소아마비가 거의 사라질 무렵이다. 그동안 필자는 많은 소아마비 장애인을 만났는데 마흔 살 아래로는 소아마비가 거의 없다. 그러나 WHO에서 서유럽은 1994년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서태평양 지역에서는 2000년이 되어서야 소아마비 박멸을 선언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등에서는 소아마비 폴리오가 보고되고 있다고 한다.

“저도 제 나이 이하로 소아마비 장애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여수는 그래도 작은 동네라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좀 더 큰 동네인 광주로 나갔다. 광주에는 셋째 큰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큰아버지 집에서 병원을 다녔는데 큰아버지 집에 제 또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며칠 묵는 동안 큰아버지의 아들, 그 또래 사촌에게 소아마비폴리오가 침범했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는 놀라서 큰아버지 댁을 나왔는데 그도 두 번 다시 그 사촌을 보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아버지는 아이를 업고 용하다는 병원 등을 찾아서 전국을 돌아 다녔다는데 그 무렵에는 그래도 엄마가 동행을 했으리라. 주사도 맞고 약도 먹고 침도 맞고 탕약도 달이는 등 별의별 방법을 다 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아마비 폴리오는 일단 침범을 하면 완전히 낫게 할 수는 없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상을 완화시키기는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가 완전히 낫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1년이 가고 2년이 가도 낫기는커녕 아이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일어서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어린 저를 두고 가셨습니다.”

아이가 소아마비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재활방법을 찾아야 했건만, 절망한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뒷산에서 약을 마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갔지만 남은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그의 치료를 위해서 재산을 많이 탕진했지만 쥐포공장을 했고 문방구도 했으므로 그래도 남은 재산이 제법 되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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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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