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신시가지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아 갔을 때 필자를 맞이한 것은 그의 아내 A씨 였다.

처음 전창배 씨에게 취재를 부탁했을 때 얼굴 공개도 안 되고 실명도 공개도 안 된다고 했었다. 그래도 좋다고 했다. 호흡기장애인은 노출시키는 것을 꺼려하기에 그동안 한 번도 호흡기장애인은 인터뷰를 못 했기에 얼굴은 가리고 가명으로 처리하기로 했었다.

학원 강사 시절. ⓒ이복남

그런데 막상 전창배 씨와 인사를 하고 인터뷰를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실명을 써도 좋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 A씨는 실명을 밝히기를 극구 사양했다. 자기도 나름대로의 사생활이 있는데 “네가 그렇게 고생하는 줄 몰랐다.”는 위로 같은 인사를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창배 씨와 결혼은 어떻게 했을까.

“세관에 다닐 때 결혼 했는데 오빠 친구라 우리 집에 자주 왔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전창배 씨는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실력도 있고 직장도 좋았기에 오빠도 적극적으로 권했습니다.”

A씨는 전창배 씨와 결혼 하고 큰딸(42)과 작은아들(40)을 낳았다. 부부는 서로에게 큰 불평 없이 오순도순 잘 살았다.

“그렇게 귀가 얇은 것도 아닌데, 평생 공무원이나 할 거냐며 부추기는 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잘 나가는 신생기업 율산실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 왔다. 당시만 해도 율산실업은 누구나 알아주는 굴지의 무역회사였다. 비록 외교관은 못 되었지만 율산실업을 통해서 세계로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율산실업에서 동남아 등 세계화의 꿈을 펼쳤다. 그러나 율산실업은 재계의 신화라 할 만큼 급성장한 회사였다. 따라서 요즘처럼 위험에 대비한 위기관리 매뉴얼이 없었다. 1979년 중동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 봤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세관을 다니다가 율산실업에 근무했다니까 스펙이 너무 빵빵해서 곤란하다는 것이다. 세상에나, 너무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라서 어렵다니, 경력사원으로 채용하기가 버거웠던 모양이다.

“세관은 부정부패를 하지 않는 한 평생 가는 좋은 직장인데…….”

호흡기관. ⓒ네이버 건강백과

괜히 율산실업으로 갔다고 후회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들고 다닐 무렵 한 지인이 그러지 말고 학원으로 가 보라고 했다. 학원에서는 스펙이 빵빵할수록 좋은 선생으로 대접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B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정치경제를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 왔다. 종합반은 50~60명 그리고 단과반은 200명 가까이 되는 학생이 그의 수업을 들었다.

“오후 2~3시부터 밤 10시까지 보통 하루에 7~8시간을 강의 했습니다.”

강의 때는 마이크를 착용했지만 쉬는 시간이면 목이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는 시간에는 커피 등 음료수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쉬는 시간에 학생들이 가져 오는 드링크 한 병을 마시고 담배 한 대를 피는 것이 그나마 유일 한 낙이었습니다.”

그의 학생들은 일반학생도 있었고 재수생도 있었는데 대학입시에서 서울로 가는 애들도 있었지만 3수 4수생들도 있었다.

“학원만 왔다 갔다 한다고 다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잘하는 놈 못하는 놈은 어디든지 있게 마련이지요.”

잘 나가는 선생이 되어 덕분에 돈도 제법 벌었다. 남구 대연동에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강의가 없는 휴일에는 아내와 아들딸과 함께 황령산을 오르기도 했다. 그 외에도 텃밭 가꾸기를 즐겨 했다. 김해에 처제가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휴일이면 처제집으로 가서 농사를 지었다. 배추와 상추를 심었고 쑥갓과 근대도 길렀다.

“저는 텃밭 가꾸는 것을 별로 안 좋아 해서 안 따라 갈 때도 있는데 저이 혼자 가서 상추랑 근대 같은 것을 차에 잔뜩 싣고 오기도 했습니다.”

아내 A씨의 설명이었다. 남편이 줄 담배를 피웠어도 술은 마시지 않았기에 아내 A씨는 운전을 생각도 안 했었단다. 그러다가 남편의 병이 깊어 더 이상 운전을 할 수가 없어지자 자동차는 처분을 했단다.

“1999년 가을인가, (김해)밭에서 삽질을 하는데 갑자기 숨이 차고 삽질이 잘 안 됩디다.”

가정용 산소호흡기. ⓒ이복남

곧장 가까운 병원을 찾아 X레이를 찍었다. 의사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폐가 깨끗하지 않으니 담배를 끊으라고 했다. 그것이 호흡기장애의 시발이었다. 학원을 휴직했다. 그것이 영이별인 줄도 모른 채…….

그리고 얼마 후 길을 가다가 피를 토했다. 그제야 놀라서 이번에는 근처 종합병원으로 갔다. 그를 진료한 의사는 폐렴이라며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부산대학병원에 가니까 폐렴이 진전되어 이미 폐가 다 망가졌다고 합디다.”

대학병원에서는 바로 산소호홉기를 처방했다. 그나마 피를 토하게 되는 바람에 발견이 된 것이라고 했다.

흔히 간을 침묵의 장기라고 한다. 폐나 신장도 마찬가지다. 피부에 조금만 상처가 나도 쑤시고 아프고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을 때는 엄청난 통증이 온다. 그러나 침묵의 장기라는 간이나 폐 그리고 신장의 경우 절반 쯤 망가져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폐(肺 lung)는 호흡을 담당하는 필수적인 기관으로 공기의 들숨과 날숨을 통해 산소를 얻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가슴우리(흉곽) 안에 위치하며 오른쪽, 왼쪽 허파로 한 쌍을 이룬다. 그가 대학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폐의 70%쯤이 망가진 상태였다. 간은 웬만큼 망가지거나 병이 들어 잘라내도 재생이 된다지만 폐는 재생이 안 될뿐더러 이식도 말 뿐이지 거의 없단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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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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