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장기

죽은 나무도 생피 붙을 듯

죄스런 봄날

피여, 피여

파아랗게 얼어붙은

물고기의 피

새로 한 번만

몸을 풀어라

새로 한 번만

미쳐라 달쳐라”

이 시는 허영자 시인의 “봄”이다. 시인은 봄이 주는 생동감과 끓어오르는 원초적 본능에 의한 강렬한 욕망을 노래했을 지도 모른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장기’는 봄의 역동적인 생동감 그리고 소유욕일 수도 있다. ‘죽은 나무도 생피 붙을 듯’ 또한 만물이 타오는 봄의 불길과 에너지 같다. ‘새로 한 번만/ 미쳐라 달쳐라’는 봄과 청춘이 활기를 띄는 모습이랄까.

하재국 씨. ⓒ이복남

시는 시인이 쓰는 것이지만 그 시를 읽는 것은 독자의 마음이라. 필자가 하재국 씨를 만난 후 고른 시가 허영자 시인의 “봄”이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의 그는 먹어도 먹어도 시장기를 느끼는 봄이 아니라 아예 먹을 것도 없었고 봄의 생기를 느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다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이 원수를 갚아야지. 가슴에는 세상에 대한 울분과 한(限)만 쌓여갔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같단다.

하재국(1960년생) 씨는 경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은행에 다녔는데 어머니는 병약했다. 그는 형제도 없는 외동이었는데 어머니는 심장병이 있었다.

“그래서 동생도 없고, 어릴 때부터 이모 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언니는 안강에 살았는데 어머니와 그를 언니 집에 머물게 하면서 병간호를 했다.

“이모는 여관도 하고 꽤 부자였는데 어머니 병을 고치느라 재산을 다 탕진했답니다.”

어머니는 이모의 치료도 보람 없이 이모의 재산만 탕진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때가 8살 때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음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재혼을 했던 것이다.

이모는 그를 안강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어머니가 죽었고 이모 집에 살았지만 너무 어린 시절이라 그런지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 무렵 대부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그를 제대로 못 챙긴 탓인지 이가 시원찮았다. 어금니가 썩었는데 이가 아프다고 하니까 이모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서 멀리 치과에 가지 않고 동네에서 사사로 이를 뺐다.

보통 사람들은 뭔가 시원하게 해결되었을 때 ‘앓던 이가 빠진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어금니를 뺐음에도 이는 더 아팠고 며칠 지나자 눈까지 아팠다. 그러다가 이가 좀 덜 아플 즈음부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2016년도 하계수련회 중 하동 최참판댁. ⓒ이복남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하자 그제야 이모는 그를 대구 동산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는 “아마도 이를 빼면서 시신경을 건드린 것 같다”고 했다. 우리 몸에서 느낌을 일으키는 곳은 육근(六根) 즉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인데 무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눈이 멀기 시작했지만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그는 안강국민학교 4학년에 다녔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자 이모는 그를 대구 광명학교 3학년에 편입시켰다. 세상에나, 모두가 눈 감은 사람들이라니, 그는 그전까지 주변에서 시각장애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광명학교에 가보니 모두가 시각장애인들이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선배들에게서 점자를 배웠다. 이게 글자라니, 처음 보는 점자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동안 (묵자)인쇄된 책을 보았는데 이제는 점자책을 읽어야 된다고 했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그런지 별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기숙사에서 자고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이모는 그가 학교에서 공부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학비와 기숙사비를 부담했다. 다시 한 해가 가고 그는 4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4학년이 끝나기 전에 이번에는 이모님이 돌아 가셨다. 위암이라고 했다.

엄마는 늘 아프셨고 어릴 때부터 그를 돌봐 준 것은 이모였는데 이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늘이 무너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보다 더 막막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물어 물어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건천 어디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시골버스를 타고 건천으로 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만나지도 못했고 아버지와 같이 산다는 여자는 싸늘했다.

“네가 올 데가 아니니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그는 다시 버스를 탔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버스 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으려니 차장은 배가 고픈 줄 알았는지 빵과 우유를 주었다. 그는 눈물 젖은 빵을 씹으면서 다짐했다. 이제 하늘 아래에 나 혼자뿐이구나. 어떻게든지 공부를 해서 돈을 벌어야지 그래서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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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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