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술에 절어 있었고 어머니는 눈물만 흘렸다. 동네 사람들은 “저 집안 망했다”고 수군거렸다. 그도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약간의 보상금이 나왔으나 모두 술로 탕진했다.

그러던 차에 동사무소에서 장애인등록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목포시청에 가보니까 상담선생이 “죽을 마음은 있는데 살 마음은 없느냐”고 물었다. 살고 싶다기보다는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안산직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곰탕 한 그릇 앞에 놓고. ⓒ이복남

학교에서 재봉과 인쇄를 배우면서도 하는 둥 마는 둥 심드렁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지인을 만났다. 작은예수회 박성구 신부였다. 박 신부는 “네가 살아야 할 의미가 있어서 그런 시련을 겪은 것”이라고 했다.

그가 찾아 낸 새로운 삶의 의미는 남을 위해 사는 봉사하는 삶이었다. 처음에는 제기동 소망의 집에서 무료급식 봉사를 했다. 안산직업전문학교는 1년짜리였는데 박신부의 건의로 1년을 더 다녔다.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운전면허를 땄고 박 신부의 운전기사도 하면서 명동성당에서 복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박 신부의 주선으로 조선족 홍야(1973년) 씨와 결혼도 했다. 이제 대학을 가려는데 박 신부에게 문제가 생겼다. 한창 시국이 어지러울 때였다. 박 신부는 그에게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고향 목포로 내려갔다. 아내는 근처 공장에 다니고 그는 영암에 있는 동아인재대학 사회복지과를 다녔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자신이 가야할 길이 이 길이구나 싶은 확신이 생겼다.

남은 인생은 장애인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몸은 비록 장애를 입었지만 그래도 남을 위해 살 자리는 있는 것 같았다. 나주정신병원으로 실습을 나갔다. 대부분이 정신줄을 놓아버린 사람들이었다.

파크골프장에서. ⓒ이복남

“육체가 멀쩡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래도 나는 다행이구나 싶었습니다.”

중증장애인들은 욕창으로 악취가 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는 죽으면 화장할 겁니다.”

중학교 때 유도를 했다면서 대학에서 다시 유도는 하지 않았을까.

“유도 때문에 제 인생이 이렇게 된 것도 같아서 유도는 돌아보지 않았고, 대학에서는 파크골프를 했습니다.”

그는 졸업을 했고 아내는 딸아이를 낳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숙식은 아버지가 해결해 주셨고 그는 장학금을 받았고 아내의 월급은 친정으로 보냈었다. 이제 졸업을 했으니 뭔가 돈벌이를 해야 했다.

광주시에서 실시하는 영호남교류를 신청했다. 그리고 2011년 부산시 남구로 왔다. 남구장애인협회에 사무국장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 부산시에서 임대아파트를 하나 받았으나 면적은 너무 작고 남구와 거리는 너무 멀어서 남구에 따로 전세방을 구했다.

그런데 사무국장은 변변한 보수가 없었다. 아내는 친정인 중국으로 돌아갔고 딸아이는 고향에 있는 누나가 데려갔다.

그는 남구협회를 그만두고 월급을 주는 회사에서 주차관리를 했다. 그리고 작년 가을 금정구장애인복지관에서 시설기사를 구한다는 공고가 났다. 그는 시간이 있을 때 자격증이나 따 보자 싶어서 안전관리사를 취득했었고 소방시설관리사도 응시한 상태라 시설기사 모집에 응시를 했다.

금정구장애인복지관에서. ⓒ이복남

면접에서 금정구장애인협회 박동진 회장은 몽키 스패너를 사용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못합니다.” 그래서 떨어진 줄 알았는데 합격이었다. 할 수 없다고 한 솔직함과 진실성 때문에 뽑았다고 했단다.

2016년 1월 2일부터 부산금정구장애인복지관 관리기사로 근무하고 있다. 합격한 후에 소방시설관리사를 취득했다. 그는 복지관에서 보일러나 에어컨 등 건물관리를 하고 지적장애아들의 주간보호 차량도 운전하는 등 그야말로 만물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남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돠자.”란다. 그는 장애를 입고 고통과 절망 속에서 천덕꾸러기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것으로 인생의 목표를 바꾸었다. 장애인들이 몸이 불편하다고 그 자리에 머물면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단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은 대통령이었다. 이제 그 꿈은 물 건너갔지만 그는 또 다른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

“앞으로 장애인계의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

그 꿈이 언제 쯤 이루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진호 씨는 “오늘이 내 생애 최고로 행복하고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정말 행복한 날이 될 것”이라고 했다. 행복이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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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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