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닌 곳은 케미라고 하는 신발밑창을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케미컬(chemical, 합성피혁)을 현장에서는 케미라고 했던 모양이다. 회사는 당감동에 있었는데 그는 회사 근처에 하숙집을 얻었다. 급여는 월급제가 아니라 일한 만큼 돈을 주는 돈내기였다.

회사에서 일하는 김원규 씨. ⓒ이복남

특별히 일이 재미있다거나 맘에 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번에는 쉽게 그만 두지 못했다. 그가 다닌 회사는 슬리퍼나 샌들 같은 것을 주로 만드는 회사였는데 여직원들도 많았다. 그 중에 유독 눈에 뛰는 처녀가 있었다. 27살 총각은 22살의 박 씨와 결혼했다.

아들과 딸을 낳고 처음 몇 년간은 그런대로 잘 지냈다. 그런데 부산의 신발산업에 불황이 닥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요일이면 함께 교회를 다니던 아내가 차츰 교회를 멀리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종교에 빠지기 시작했다. 티격태격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졌다.

“애들 둘은 제가 맡기로 하고 이혼을 했는데 얼마 후에 아내가 죽었다는 연락만 받았습니다.”

신발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서자 작은 공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도 공장을 몇 번 옮겼다. 그러다가 그가 다니는 회사가 문을 닫지는 않았지만 여름이면 임시 휴가를 했다. 우연히 장애인 단체 관계자를 알게 되어, 회사가 휴가를 하게 되면 장애인 단체 사무실에 나갔다. 그곳에 나가면서 그도 장애인등록을 했고 사무실에 필요란 잔심부름도 해 주곤 했다.

“참, 신발공장에 다니면서 제 구두에 부족한 부분을 케미로 채워 넣었습니다.”

그는 신발공장에 다니기 전에는 솜뭉치를 넣었다고 했는데 신발공장에 다니면서 신발 자재로 발가락 부분을 채워 넣었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장애인 사무실에 한 여자가 나왔는데 지금의 아내 서현자(1965년생) 씨였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김원규 씨와 서현자 씨. ⓒ이복남

필자가 김원규 씨를 당감동 사거리 부근 카페에서 만났는데 서현자 씨도 같이 나왔다. 서현자 씨는 지체장애 4급이라고 했는데 서현자 씨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자. 처음 김원규 씨를 만났을 때 신발공장에 나간다기에 자기도 취직을 좀 시켜달라고 했었단다. 무엇을 할 줄 아느냐고 해서 보세공장에 있었기에 재봉질은 할 줄 안다고 했더니 자기회사에 취직을 시켜 주어서 현재는 같은 회사에 다닌단다.

서현자 씨의 고향은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으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대여섯 살 쯤의 11월이라고 기억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을 가면서 현자 씨는 온돌방의 아랫목에 재워놓고 갔는데 그도 냄비속의 개구리처럼 뜨거운 온돌방에 엉덩이가 다 녹아내렸던 것이다.

“문전국민학교 까지 10리길인데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국민학교는 겨우 다녔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니는 체육을 못하니 교실을 치키라.’고 하는 말이 제일 서러웠단다. 그녀는 맏이였다. 집안 형편도 어려웠기에 동생들도 키워야 했다. 막내 동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그녀는 서울로 가서 보세공장 시다로 일하면서 미싱을 배웠다. 보세공장에서 밤낮으로 미싱을 돌리면서 동생 넷을 공부시켰다.

동생들도 제 길을 찾아가자 혼자 부산까지 오게 되었는데 부산에서 어떤 남자를 만나 딸 둘을 낳고는 그 남자하고는 헤어졌다. 그동안 딸 둘을 반듯하게 키우고자 이것저것 안 해본 것이 없었으나 살길은 막막했다.

아내 서현자 씨와. ⓒ이복남

그러다가 우연히 장애인 사무실에서 김원규 씨를 만나 취직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애들이 어릴 때였는데 살림을 합치고 아이 넷을 길렀단다.

인간지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다. 변방 노인의 말처럼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될 수도 있음이니 사람의 앞일을 그 누가 알겠는가.

“아이들이 아직은 미혼이지만 이제는 다 커서 얼마 전부터 집을 나가서 현재는 우리 둘만 삽니다.”

서현자 씨는 소망이 한 가지 있다고 했다. 아들 딸 넷을 결혼 시키고 나면 그녀의 고향 보성으로 돌아갈 거란다.

“남동생이 몸이 좋지 않아서 지금은 고향에 혼자 있는데 애들 다 결혼 시키고 나면 고향에 가서 농사지으면서 동생을 돌보고 싶습니다.”

당연히 남편 김원규 씨도 같이 가기로 합의 된 내용이란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부모와 자식 또는 부부 이웃 사회 등 무수한 관계 속에서 상호교류가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은 악연도 인연이고 선연도 인연이다. 우리 모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되도록이면 만나서 기쁘고 행복한 인연들로 이루어지기를…….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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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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