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희 회장은 이제 장애인 문인들도 비장애인 문단에 도전할 시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에이블뉴스

[이슈와 사람들] 한국장애인문인협회 방귀희 회장

장애인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척박한 현실에서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장애인 문화예술 리더들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장애인문인협회 방귀희 회장(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상임대표)도 이중 한 사람이다.

방귀희 상임대표는 KBS라디오에서 방송작가로 30여년을 활동하며 장애인들의 애환을 담기도 했고, 100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한 국내 유일의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장애인 문인들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도맡았다.

특히 이명박 정부 말기 대통령 직속 문화특별보좌관을 역임하고, 박근혜 정부에 들어 대통령 직속 문화예술융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장애예술인들의 염원이었던 장애인문화예술센터인 ‘이음센터’ 건립에 힘을 쏟아 지난해 11월 문을 여는 결실도 맺었다. 예산으로 인한 난관 등 고비 때 마다 해결에 적극 나선 숨은 공로자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공통된 평가다.

본지 백종환 대표가 지난 21일 방귀희 회장을 만나 지나온 여정과 함께 향후 장애인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목표와 계획을 들어봤다.<편집자주>

백종환 대표 : 방귀희 회장님 하면 솟대문학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아쉽게도 100호를 기점으로 종간됐다. 장애인 문인의 등용문이었던 솟대문학 종간으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분들이 많다. 어떤 이유 혹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방귀희 회장 : 솟대문학이 지속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게 됐다. 종간을 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 사업을 중단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사람들이 솟대문학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월간지 등 잡지가 운영되려면 월 1만원씩 내는 독자 1천명이 돼야 한다. 솟대문학만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한 달에 드는 비용이 1000만원이 든다. 그런데 독자확보가 되지 않고 정부의 지원이 중단되다보니 종간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님에게 솟대문학의 존재필요성의 이유를 조목조목 써서 공개편지를 보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솟대문학이 종간된다는 사실이 언론에 무수히 보도가 됐지만 문화체육관광부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체육관광부의 반응을 보면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장애인과 같은 약자와 소통할 마음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가졌다.

제가 유행가의 가사를 인용,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님에게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전해라’고 한 것은 솟대문학 폐간에 대한 일침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일침때문에 결국 손해보는 것은 나 개인이지만 나는 여지껏 나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솟대문학이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제가 집이라도 팔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솟대문학은 25년 동안 장애인 문인들이 부빌 수 있는 언덕 정도의 역할을 했다.

이제는 장애인 문인들도 비장애인 문단에 도전할 시기가 됐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인 종간의 의미로 본다. 언제까지 장애인 문인들을 장애문학으로 묶어만 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말하고 싶다.

“이제는 비장애인 문단에서 버티고 싸우고 생존하라”라고.

백종환 대표 : 솟대문학은 100호 기념식에서 ‘솟대문학 종간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새로운 시작이라 함은?

방귀희 회장 : 장애인문화예술센터가 세워지면서 장애인 예술이 보다 활성화 됐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활성화된 장애인 예술을 대중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답을 낸 것이 ‘홍보의 중요성’이었다.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장애인문화예술을 홍보할 수 있는 종합지 창간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추구하는 종합지와 비슷한 유형의 샘플을 수 없이 찾아봤다. 여유가 안 되니까 문학과 미술, 음악, 대중예술, 문화 향유 등 5가지 섹션이 담길 수 있는 종합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역시 돈이다. 잡지 전체 페이지를 컬러로 구성해야하고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도 필요하다. 종합지에 게재되는 작가들의 작품료도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솟대문학보다는 5배는 더 소요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잡지를 잘 만들 자신이 있다. 지난해에는 이음센터와의 잡음 때문에 예산을 확보 하지 못했지만 올해에는 잡지 예산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잡지의 이름은 ‘4월의 사과’로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사과를 무척 좋아한다. 사과의 의미가 창조이지 않는가?

첫 번째 사과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 세 번째는 스티븐 잡스의 사과고, 4번째의 사과가 장애인예술의 사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4월이라는 것은 네 번째라는 뜻도 있지만 4월은 장애인의 달이다. 그래서 장애예술 종합잡지의 이름으로 ‘4월의 사과’를 생각하고 있다.

새로 창간하는 종합지는 계간지로 시작할 것이나 월간지로 발행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물론 이 종합지의 온·오프라인으로 모두 운영할 것이다.

향후 장애예술 종합잡지 창간 목표를 밝히고 있는 방귀희 회장.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 솟대문학 100호, 25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떤 점이 가장 기억에 남고, 어떤 사람이 가장 떠오르는가?

방귀희 회장 : 솟대문학 25년 동안 수상을 한 사람은 160명이다. 이 160명의 장애인 문인은 작가로서 손색이 전혀 없다.

그리고 솟대문학을 통해 상은 드리지 못했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460명이다. 25년 동안 솟대문학의 성과는 넉넉잡고 500명이 문인으로 성장시켰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이대우 시인이 기억에 남는다. 이 분의 ‘똥이 무섭소’라는 시가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똥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더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시는 장애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다.

똥이 무섭소

나는 똥이 무섭소.

단순한 똥이 아니라

설사가 무섭소 .

설사 그놈이

천하의 못된 놈이

나를 많이 울렸어 .

그놈 때문에

인생 절반을

도둑맞은 느낌이라오.

누운 사람 치고 설사 앞에

누가 당당할 수 있을까.

해가 나고 멀쩡한 날에도

그놈이 엿볼까 무섭소 .

중증장애인들의

무거운 사슬이 되는

그놈이 호랑이라면 때려잡겠소.

호랑이보다 더 무섭소.

이 시를 보면 시인들은 시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고, 운율도 안맞고, 상징성도 없다고 평가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는 시로써 갖춰야 할 형식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장애인에게는 너무나도 마음에 와 닿는 공감대가 있다.

예를 들어 장애운동을 하면서 장애인들이 편의시설을 갖춰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100번 말하는 것보다. ‘나는 똥이 무섭소’라고 한마디 하는 것이 더 와 닿을 수 있다. 아 저 사람들은 화장실 문제가 급박하구나 생각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 전신마비 장애가 있는 김대원 시인이 기억에 남는다. 이분은 ‘내가 어둠이라면 당신은 별이야’라는 시를 쓰셨다.

시가 던지는 메시지는 ‘나는 어두움이라고 우리 사회에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어둠이 없으면 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아야할 존재이지, 너 혼자 빛나는 별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나는 김대원 시인의 작품을 가슴 시리도록 착한 저항시라고 평가한다. 너는 별이어도 어두움의 내가 없으면 별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면 감동인데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서글프다.

백종환 대표 : 최근 문학도서 2000여권을 국립장애인도서관에 기증했다. 2000여종에 달하는 책에도 놀라왔고 앞으로 장애인 문학을 위해 더 많은 일들을 해 주셔야 된다는 기대감도 큰데 소장하고 있는 도서들을 모두 기증한 것에 놀라왔다.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다.

방귀희 회장 : 지난 1991년부터 장애인이 쓴 책을 분류 보관을 하다 솟대문학을 정리할 시간이 돼서 한자리에 모아 보니 2000권이 되었다. 그래서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을 하게 됐다.

사실 이 책들을 이음센터에 기증하려고 했지만 그게 잘 안됐다. 이음센터는 2000권의 책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 200권의 책만 세팅해 달라고 했다. 장애인문학도서가 있어야 할 곳은 이음센터라고 생각했었지만 장애인이 쓴 책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백종환 대표 : 새삼스럽지만 장애인 문학에 대한 정의를 물어보고 싶다. 방 회장님의 저서인 ‘장애인문화예술의 이해’를 살펴보면 장애예술인에 대해 ‘예술활동을 하는 장애인’으로 공론화되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장애인 문학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르지 않나 싶은데 장애인 당사자가하는 문학이 장애인 문학인지, 아니면 내용이 장애를 포함하면 비장애인 작가가 쓴 글도 장애인 문학에 포함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방귀희 회장 : 초창기 솟대문학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당시 회원들은 시인이름 옆에 장애유형을 넣어 작가가 장애인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장애인임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득해서 이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 원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솟대문학을 떠났다. 대체로 유명 장애인작가들이었다. 물론 20여년이 지나면서는 이분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장애인 문학은 무엇인가? 장애인 문학의 정체성은 장애를 소재로 하는 문학이 아니라, 장애 당사자가 하는 문학이다. 당사자들의 삶과 정서가 문학에 배어 있어야 장애인 문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장애인이 쓴)내용만 장애인을 소재로 한 것은 장애인 문학을 포장만 한 것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종환 대표 : 지난해 장애인문화예술센터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센터장 선임을 놓고 뒷말이 무성했다. 그야말로 우여곡절, 진통을 겪었다. 이제는 모든 상황이 종료됐고, 상당한 시간도 흘렀다. 지금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방귀희 회장 : KBS에서 방송을 잘하다가 이명박 정부 말기에 어부지리로 대통령 문화특별보좌관을 하게 됐다. 이 자리는 확실히 장애계가 만든 자리였고 난, 어부지리로 기회를 얻었다.

사실 주변에서는 대통령 문화특보를 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심했지만 자칫, 장애인들은 자리를 줘도 하지 못한다는 이미지가 만들어 질까 염려되어 허락했다. 내가 대통령 문화특보가 돼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새로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겠냐면서 건물을 리모델링하라고 했다. 건물도 지정해 줬다. 그 건물이 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건물이고 현재 이음센터다.

이후 장애인문화예술센터 설립을 위해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 등에서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다 풀어내고 모든 서류작업을 마쳤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말기여서 예산은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이음센터는 박근혜 인수위원회의 국정과제로 넘어왔다. 운 좋게 나는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이 되어 대통령이 참석한 2013 융성위 대통령 보고회의에서 전통예술 분야 공개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고심 끝에 장애인문화예술센터와 관련해서 ‘세상에는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장애예술인에게도 가치가 있다’는 내용으로 돌출발언을 했다.

회의장이 너무 조용해져서 민망하기까지 했다. 박 대통령은 장애인문화예술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장애인문화예술센터에 대한 검토를 하라고 관계자에게 지시했고 이후 센터는 예산이 확보된 것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내가 이음센터에 애정이 깊겠는가?

방 회장은 건립된 장애인문화예술센터(이음센터)에 대한 큰 애착과 함께 상처 받은 일에 대해 소회했다.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 그래서 방회장께서 이음센터 초대 센터장으로 선임될 것을 기정사실화하지 않았던가?

답변 : 이음센터는 내가 센터장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사람은 공간이 있어야 무언가를 한다. 공간이 없는데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 이음센터를 만들려고 한 것인데 센터장 선임을 두고 좋지 않은 소문은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정말 싸우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들도 직접 찾아와서 센터장을 해야 한다고 했고, 이음센터 도면까지 가지고 와서 의논을 했다. 공무원들이 직접 찾아와 센터에 대해 의논하다 보니 나도 센터장이 되는 줄 알았다.

나는 한강대교를 기면서 장애운동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만약 보건복지부 특보였다면 복지부안에서 풀어야 할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특보였으니까, 문화융성위 위원이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장애인문화예술센터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장애인예술문화센터에 매달린 것이다.

나는 신원복 선생님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일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60년을 살아오면서 나의 목표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리 때문에 내 성향을 바꾸지는 않는다. 양심에 꺼리고 부끄러워서 하지 못한다. 지난해 이음센터장 선임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실패를 많이 했다.

한국장애인개발원 원장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 때도 실패를 했다. 돈을 들여서라도 꼭 해야겠다는 정신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바뀌어서 빽도 없고 돈이 없어도 실력을 인정받는 사회가 되면 그 때는 성공 할 것이다. 그게 내 소신이다. 그게 아니면 부끄럽다.

백종환 대표 : 과정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방회장께서도 초대 센터장으로 임명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센터운영에 대한 계획 등이 나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어떻게 운영해 보고 싶었는가?

방귀희 회장 : 솔직히 센터장에 임명되면 센터를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할 것인지 많은 구상을 했다. 1층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마크는 등등 세밀한 부분까지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염두에 두었던 부분은 장애예술인은 누구나 자유스럽게오고갈 수 있는 창작공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애인역사를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박물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장애인 예술에 대해 무시를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애인예술 모든 장르에 역사가 있다. 깊고, 많지는 않지만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초대 센터장이 되면 영업사원을 자처하려고 했다. 손님이 오면 버선발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가들이 ‘내꺼 좀 팔아 달라’고는 못하기 때문에 내가 영업사원의 마음으로 일 하려 했다.

백종환 대표 : 말씀에 견주어 보면 청와대 문화특별보좌관이라든가,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이음센터 설립이라는 성과가 있었다. 그 성과는 권력을 통해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장애인정치세력화란 장애인 당사자가 어떤 정책에 대한 결정과정에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4.13대 총선이 코 앞에 있다. 주위에서 20대 국회에 도전 해보라고 권유하지 않나?

방귀희 회장 : 국회의원선거에 나가보라는 말을 늘 듣는다. 제가 보니까 15대 때부터 장애인 비례가 시작됐는데 연수로 치면 장애인 의회정치가 20년이 됐다. 그 동안 9명의 장애인 비례대표가 나왔고 그중에 여성이 3명,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3명이었다. 여성장애인과 중증장애인이 적었다는 이야기다.

장애인 비례대표는 장애인을 대표하는 자리로써 그동안 '장애인을 대표 했는가'라는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장애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설득력을 갖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장애인 복지는 발전했지만 우리 장애계에서 우리를 대표할 적임자라고 할 사람을 국회에 보내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방귀희는 권력욕이 없다고 한다. 세상에 권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권력을 얻는 방법이 자기가 할 수 없는 방식이기 때문에 한발 물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나부터 변해야 한다. 내가 변하지 않고 답습하면서 사회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장애인이 갖게 되는 권력은 개인이 갖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계가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번 20대 국회에 들어가는 장애인 비례대표는 우리 장애계와 권력을 나눌 수 있는 공정한 인물이어야 한다.

돈도 빽도 아닌 공정한 과정으로 진행된다면 나는 총선에 나갈 의향이 있다. 그 일이 두렵지 않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백종환 대표 :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상임대표로서 2016년 장애인 문화예술과 관련된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방귀희 회장 : 세세한 계획보다는 2가지를 중점적으로 말하고 싶다. 이제는 장애인예술이 대중화돼야한다. 예술은 관객이 없으면 예술이 아니다. 글을 써서 나 혼자 보면 일기다. 독자가 있어야 한다. 대중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작가에게는 경제화가 돼야한다. 돈이 돼야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제도가 바뀌어야 하니 입법과정이 필요하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는 올해 장애인 예술의 대중화와 경제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겠다.

방귀희 회장은 올해 장애인 예술의 대중화와 경제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 방 회장님은 1981년 방송작가로 장애인 문제를 접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현장에서 35년간 장애인복지와 호흡해 왔다. 방 회장님의 장애인 복지에 대한 철학과 소신을 듣고 싶다.

방귀희 회장 : 일부 사람들은 ‘방귀희는 장애인 문화예술에만 관심이 있다’면서 장애인 복지사람은 아니라고 편을 가르는 것 같다. 장애인 교육이면 교육, 고용이면 고용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장애계가 함께 뭉쳐서 해결하지만 문화·예술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거리를 둔다.

그래서 인지 사람들은 방귀희가 복지와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 자신이 장애인인데 복지 따로, 고용 따로, 교육 따로, 예술 따로 존재하겠는가? 모든 분야가 나의 관심사이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장애인복지서비스 고객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문화는 블루오션이다. 우리 장애계도 외원을 확대해야 한다. 문화예술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에게 있어 최고의 복지는 문화다. 복지가 완전해지면 자연스럽게 문화가 꽃을 피우고 문화를 향유하게 된다. 우리는 아직도 현실문제에 급급해서 문화예술이 후순위로 밀려 장애인문화예술인들이 소외를 당하고 있다.

나는 작은 문장에서 감동을 많이 받는다. 책을 읽으면 반드시 밑줄을 긋고 노트에 적는다. 시간이 나면 다시 본다. 최근 정말 감동 받은 것은 관현맹인과 관련하여 박연이 세종대왕에게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고 했고 세종대왕은 박연의 말에 감동을 받아서 시각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했다고 한다.

박연과 세종대왕에게 감동을 받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늙었든 젊었든 인간이 가진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장애인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장애인복지에 대한 철학이다.

장애인에게 소득 지원을 해 주고, 제도를 개선해 주고, 또 등등의 서비스 이전에 그 사람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장애인인력개발이 절실하다.

내가 한국장애인개발원 원장 공모에 도전한 것도 사람개발을 추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청와대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장애인 인재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자리를 만들어 사람을 찾는데 그 자리에 맞는 인재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현재 있는 사람만이라도 인력풀 만들어야 한다. 의사든, 법관이든, 교사든 인력풀을 만들어야한다. 장애인복지는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주면서 인력풀을 잘 활용해서 주류사회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지난 1995년 장애인들에 대한 대학교 특례입학 제도가 도입되고 20년 동안 많은 장애대학생들이 졸업을 했지만 이들에 대한 보고서가 하나도 없다. 이들에 대한 사후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장애인예술협회는 250여명 장애예술인에 대한 인력풀이 있다. 그나마 그 인력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언론사나 기관 등에서 섭외가 온다. 인력풀을 만들어 놓는 것이 복지의 근본이다.

백종환 대표 : 방 회장께서는 현재 장애인 문화예술을 선도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계에서는 KBS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고 최근에는 대학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 회장님, 작가님, 교수님 등으로 불리운다. 작금에 회장님께서 가장 애착이 가는 호칭은 무엇인가?

방귀희 회장 : 어릴 때부터 나는 애들을 가르쳤다. 숙제하는 것을 지도해주고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애들 가르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선생님이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도 있었지만, 학생들을 만날 때가 가장 편하다. 교수님이라고 불러주면 자존감도 생기고 좋다. 가르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도 느낀다.

물론, 방송작가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방식을 알게 됐고 또한 많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도 나에게는 큰 자산이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됐고, 그래서 어떤 문제든지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터득했다고 감히 자부해 본다. 방송작가의 경험으로 장애인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 등을 체득할 수 있었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백종환 대표 : 우리 장애인문제는 문화예술 외에도 지금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교육문제, 노동문제 등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방 회장님께서 전망하는 향후 장애인 복지가 무척 궁금하다.

방귀희 회장 : 고용정책도 새로운 개념의 정책이 필요하다. 앞으로 장애인 프리랜서 제도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탄력근무제도 적극적으로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어떤 특정분야에서 장애인에게 독점권을 부여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각장애인 안마업처럼 100% 독점이 아니더라도 몇 %를 할당해서 독점권을 부여할 경우 장애인복지는 상당히 발전할 것이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장애인 노령정책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45세부터 65세의 장애인들은 살아오면서 그동안 복지혜택을 그다지 누리지 못하고 또 지금은 복지관 등 지역사회로부터도 복지 서비스를 외면 받고 있다. 이 들을 위한 복지 서비스가 절실하다.

그리고 문화예술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해 주는 신개념의 장애인고용정책 필요하다. 최근 한빛예술단의 공연이 공공기관의 우선구매 대상이 된 것처럼 장애인 공연과 장애인화가의 그림, 장애인 작가의 책 등도 정부부처나 지자체, 공기업 등 공공기관의 우선 구매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다.

또한 휴먼서비스사업이 활성화가 필요하다. 외국은 휴먼서비스 사업이 굉장히 발전했다. 장애인, 노인, 아동이 모두 포함되는 것으로 특히 그 휴먼서비스 산업에 발달장애인 등 중증의 장애인 포함되는 것이다. 휴먼 서비스가 활성화 되면 장애인복지가 장애인들을 위해 퍼주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에게도 일자리 창출이란 개념으로 바뀌면서 불만도 사라지고 장애인 노동시장이 크게 확대될 것이다.

백종환 대표 : 방회장님에게 에이블뉴스란?

방귀희 회장 : 에이블뉴스는 저에게는 창문이다. 창문을 통해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따사한 햇살도 들어오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창문은 반드시 필요하다. 창문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를 상징하는데 에이블뉴스는 장애인계와 내가 소통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저녁에 자리에 눕기 전에 에이블뉴스를 검색하고 있는 나를 보면 나의 하루는 에이블뉴스로 시작하고 에이블뉴스로 마친다. 나중에 은퇴하면 에이블뉴스 명예기자로 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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