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약속과는 달리 배를 타도 큰돈은 벌지 못했고 한번 나갔다가 돌아 올 때는 2~3천만 원을 쥘 수 있었지만 2010년에는 우루과이에서 일을 했으나 돈을 받지 못했다. 선주가 부도가 난 것이다.

국립재활원 입원 중에 병문안 온 친구들. ⓒ이복남

“배운 게 도둑질이라 배를 안 탈 수는 없겠지만 정말 어선은 그만 타고 싶었습니다.”

상선을 타려면 적하법 등의 이론을 배워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경력이 있어야 했다. 그는 해기사 학원에서 공부하여 3급을 땄고, 2항사로 한중일 상선을 타기도 했다.

그리고 2급 시험은 집 근처 독서실에서 혼자 독학을 했다. 독서실 창으로 영도장애인복지관이 보였는데 가끔 공부를 하다가 창을 내다보면서 저곳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할까 싶어서 궁금하기도 했다. 2012년 3월, 2급 시험은 독학으로 합격했으나 상선의 선장을 하기에는 경력이 며칠 부족했다.

“17일이 부족해서 모래선을 탔습니다”

모래는 제주도와 대마도 사이에서 퍼 올려 울산항에 풀곤 했다. 2012년 4월 6일 오후 6시경 모래를 가득 실은 바지선을 울산항에 정박했다. 배를 부두에 정박할 때는 굵은 밧줄에 가는 밧줄을 묶어서 부두로 던지면 부두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밧줄을 잡아 당겨 계류장에 묶으면 닻을 내렸다. 크레인으로 모래를 퍼서 울산항 부두로 옮겼다. 모래를 다 내리고 이번에는 올 때와 반대로 먼저 밧줄을 거둬들이고 닻을 감아 올리는데 닻의 한 쪽에 폐타이어 하나가 걸려 올라왔다.

“엥카(닻)에서 폐타이어를 떨어뜨리는 방법을 고심하다가 폐타이어가 걸린 반대편에 줄을 걸어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정립회관에서 농구용 휠체어를 타 보고. ⓒ이복남

그는 1항사로 승선을 했기에 일을 잘 하고 있나 보려고 갑판 앞으로 나갔다가……. 밧줄에 가슴을 맞고 갑판 위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갑판위에 떨어져서 다행이지 바다에 떨어졌다면 아마 죽었을 겁니다.”

그는 정신을 잃었고 울산병원에 갔으나 불가능하다하여 부산 동아대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했다. 일주일 만에 깨어났는데 경추 4번, 5번, 6번, 7번 그리고 흉추1번을 다쳤다고 했다.

“처음 깨어났을 때는 눈만 떴습니다.”

그는 꼼짝을 할 수 없었지만 100kg나 되는 거구다 보니 간병인으로 구한 사람이 조선족 남자였다. 간병인이 밤에는 깨우지 말라는 등 엄청 툴툴거렸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느라고 아픈 줄도 몰랐다. 이렇게도 살아야 하나, 멍한 상태로 몇 달이 지나갔다.

“한참을 지나고 나니 창밖으로 푸른 산이 보이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살아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가 저절로 나왔다. 배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항상 조명탄을 준비해 두는데 2년이 지나면 폐기처분한다. 아르헨티나 바다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폐기해야 할 조명탄 하나가 남아 있어서 불꽃놀이처럼 조명탄을 쏘았는데 조명탄에 눈을 다쳐서 엄청 고생을 했었다. 그날 이후로 그의 기도는 제발 배에서 내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영도장애인복지관 간절곶 나들이. ⓒ이복남

“하나님 제발 눈만 다치지 않고 좀 쉬게 해 주십시오.”

그는 배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등 뒤에 있어서 그가 다치는 것을 못 보셨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더 이상 배를 타지 않게 된 것이다. ’86년 셀마 때는 남태평양 태풍의 한가운데서 20여 시간이나 키를 잡고 사투를 벌이기도 하는 등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나 그는 아직도 살아 있었고 이제야 드디어 하선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딸이 간호사다 보니 재활치료를 잘 하는 C병원으로 옮기라고 합디다.”

그는 꼼짝을 못하는 상태였는데 C병원으로 옮기고 나서 양 손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1년 만에 국립재활원에 자리가 났다. 국립재활원에서는 신청순서에 따라서 3개월을 입원할 수 있는데 그의 차례가 왔던 것이다. 아내와 같이 척수손상재활과에 입원을 했다. 국립재활원은 최신 장비를 구비하고 있어서 몸이 더 굳어지기 전에 빨리 갈수록 좋은 것 같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부원장님의 말씀인데 ‘경추환자들은 전신이 다 아프니 통증도 참아야 하고, 이곳에 있으면 환자지만 여기서 나가면 사회인이 되라’고 했습니다.”

삼락공원 파크골프장에서. ⓒ이복남

그의 집은 5층 빌라의 4층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국립재활원을 퇴원하면서 부원장님의 말씀처럼 사회인이 되려고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근처 1층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전에 2급 해기사 공부를 하면서 독서실 창밖으로 영도구장애인복지관을 봤는데 이제 정말 장애인이 되어 복지관 이용자가 되어 휠체어를 타고 복지관으로 갔다. 복지관 프로그램 중에서 몇 개를 골랐다. 폐활량을 늘이기 위해 하모니카를 골랐고, 만약을 위해서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컴퓨터와 요가를 신청했는데 그의 눈길을 끄는 또 하나는 파크골프였다. 평소에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운동이었지만 야외에서 하는 파크골프는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복지관에서 이론을 배웠고, 근처 축구장에서 매일 연습을 하고 일주일 한번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삼락공원 파크골프장엘 가는데 파크골프는 복지관의 프로그램이므로 일주일에 한번은 복지관 차량으로 이동을 하고 그 외에 두리발(콜택시)을 이용한다.

“마누라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저는 뭐라도 하고 싶습니다.”

결국 상선의 선장은 해 보지도 못 한 채 1급 장애인이 되고서야 배에서 내리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었다. 아직은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도 잘 모르지만 배 타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남은 삶을 내 이웃의 불행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단다.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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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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