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말씀에 눈물을 삼키며 다시 공부를 해 보려 했지만 몇 년 동안이나 내팽개쳤던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들은 연고대를 갔지만 그는 떨어졌다.

“당시만 해도 서울대나 연고대가 아니면 안 쳐 주었습니다.”

그도 연고대를 바라보며 재수를 했지만 또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3수를 하는 중에 영장이 나왔다. 국가의 부름을 어찌하겠는가. 논산 훈련소를 마치고 육군 8사단에 포병으로 배치를 받았다.

브리지(선교)에서. ⓒ이복남

“경기도 이동에서 근무했는데 이등병 때 3개월간 육본에 파견근무를 했습니다.”

전 군에서 육군합창단 모집이 있었는데 하필 합창단을 선발하는 사람이 창신교회 목사와 동기였고, 그는 창신교회 성가대에서 테너를 했었다. 육군합창단이 되어 국군의 날 등 행사를 위해 전국을 돌아 다녔다.

“한번은 여의도 행사장에 갔는데 전국의 별들이 다 뜬 것 같았습니다.”

그는 육군합창단으로 전국을 떠돌았고, 나중에는 8사단 훈련장에서 아나운서 보조도 하고, 웅변도 하는 등 자대에서 근무하는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대말년에 밖에서 술을 마시다가 민간인과 싸움이 붙어 옥신각신 하는 통에 10.26이 터져 조마조마 했으나 다행히 1979년 11월에 만기 제대를 했다.

또 다시 연고대를 바라볼 수도 없어 아예 대학을 포기하고 동국대 전자계산원에 입학했다. 전자계산원은 2년제 전문대 과정으로 전산에 관한 이론과 실습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과대표를 했다. 2학년이 된 어느 날 신문에서 해기사 모집 공고를 봤다.

“처음에는 해양에 관한 기록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바다에 나가면 돈 많이 준다고 하더군요.”

1년 과정의 교육을 마치면 해기사 5급으로 취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한국어업기술훈련소에 입학했다. 훈련소는 영도 경찰서 뒤에 있었는데 6개월은 이론이고 6개월은 실습이었다. 이론을 마치고 첫 실습으로 200톤급의 오징어잡이 배에 승선했다.

제주도 신혼여행. ⓒ이복남

“처음에는 아무도 밥을 못 먹어서 저 혼자 먹었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뱃멀미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원들이 오징어를 갓 잡아 올리면 토막 쳐서 회로 먹곤 했는데 그도 다리 하나를 집어 먹었다가 빨판이 혀에 달라붙는 바람에 죽을 뻔 하기도 했다.

동국대 전자계산원 2학년 축제 때 그는 A를 초대했었다. 그 때 A가 ‘나하고 결혼하고 싶냐’고 물었지만 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으나 용기가 없어 대답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1차 실습을 마치고 서울로 가보니 A가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A는 그가 없는 사이에 다른 사람과 결혼해버린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2차 실습을 나갔다. 1차는 70일이었고 2차는 50일이었는데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A에 대한 그리움과 서운함은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일이 없을 때면 갑판 뒤에서 혼자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움과 분노는 눈물로도 씻기지 않았다. 몰래 울었으나 그의 눈물을 본 사람이 있었으니 같은 실습생 유 씨였다. 유 씨는 그의 아픔과 눈물을 씻어주며 그의 집은 영도에 있으니 내리면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친구 여동생이 저의 집사람입니다.”

그는 배에서 내리면 곧장 유 씨 집으로 달려갔는데 집에는 그의 여동생 유윤임(1960년생) 씨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170m에 80kg었기에 배에서 그의 병명은 ‘뚱’이었는데 유 씨도 그를 뚱이라 불렀고 유 씨와는 동갑이었는데 처남 하자고 했다.

부모님과 아이들. ⓒ이복남

그는 훈련소을 졸업하고 어선의 2항사가 되었다가 85년에 1항사가 되었고, 86년에 유윤임 씨와 결혼했다. 결혼을 하고 영도 중리에 집을 얻어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1987년 12월에 선장 자격을 얻었다. 선주들은 자격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선장을 골랐다. 그 무렵에는 주로 한국 국적선을 타고 북태평양에서 조업했다. 얼마 후에는 주로 우루과이 국적선을 탔다.

“회사를 통해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 등 2~3명을 선임했습니다.”

서너 명이 팀을 이루어 남미로 갔는데 부산 또는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일본에서 이탈리아로 가고 케이프타운이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우루과이로 갔다. 보통 24시간 내지 36시간이 걸렸는데 갈 때마다 노선은 조금씩 달랐다. 그렇게 우루과이에 도착하면 600톤 정도의 배에 승선하여 포클랜드로 오징어잡이를 나갔다.

“예전에는 유자망으로 잡았는데 92년도부터 자원보호차원에서 유자망은 금지가 되어 그 후부터는 채낚기로 잡았습니다.”

<유자망이란 그물을 수면에 수직으로 펼쳐서 조류를 따라 흘려보내면서 물고기가 그물코에 꽂히게 하여 잡는 어법이다. - 필자 주>.

손자 첫돌. ⓒ이복남

포클랜드에서는 오징어를 잡았고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는 홍어를 잡기도 했다. 그 쪽은 스페인어를 쓰는 것 같던데 선원들하고 말은 어떻게 통할까.

“간단한 말은 금방 배웁니다. 특히나 욕은 더 빨리 배웁디다.” 우루과이 선원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인데 스페인어로 ‘라피도’라고 했다. 급하면 욕이 먼저 나오는데 개새끼 소새끼 같은 말은 그들도 다 알아 듣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매사에 ‘노 프로그래마’라고 했다.

‘노 프로그래마’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노 프래그래마는 노 프라블럼(no problem)의 스페인어다.

“우루과이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하지만 한국 사람들처럼 악착같이 모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금요일 저녁에는 잘 놀았습니다.”

그쪽 사람들은 잔술을 마시는데 한두 잔을 가지고 물을 부어서 밤새도록 홀짝홀짝 마셨는데 한국 사람들은 병술을 마셨다.

그가 배에 승선하면 6개월에서 1년 이상 배를 탔고 내리면 1~2개월을 쉬기도 했는데 그동안에 아내는 큰 딸(30살)과 둘째 아들(27살)을 낳았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없는 동안에도 어머니가 씩씩하고 훌륭하게 잘 키웠다. 딸은 현재 간호사인데 결혼을 했고, 아들은 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회사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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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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